國父 이승만 선생 1~6
출처:
http://sonnen.tistory.com/130 밀덕행보관
國父 이승만 선생 1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으로 알려진 이승만 선생의 일대기(이후 존칭생략)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에서 태어났어.
양녕대군의 서자의 몇대손의 어쩌고 해서 아무튼 왕족이야. 물논 몰락한 양반이었지
생활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나름대로 왕족의 가오는 있는데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기에
이승만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은 조선왕실에 대하여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
어린시절 이승만은 집중력이 뛰어난 아이었다고 알려져있어
예를들어 나비에 꽂히면 나비그림만 며칠씩 계속 그리는 그런스타일 ㅇㅇ
아무튼 이승만은 대단한 교육열을 가지고 있었던 아버지덕에 공부를 열심히 할 기회를
많이 얻으며 어린시절을 보냈고 1895년 20살의 나이에 아젠펠러의 배제학당에 입학해
당시로서는 초 엘리트 코스였던거지
그 당시 그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보고 분노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한 청년들 중 하나였고
미국에서 막 귀국하여 강연을 하던 서재필의 강연을 듣고 서양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가진 청년이었지. 또한 독립협회가 주도하던 만민공동회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었어.
고종황제가 만민공동회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자 이승만은 서양의사 집에 숨어서
""고종은 늙었으니 황태자에게 물려줘야 한다"" 라는 내용이 담긴 유인물을 퍼뜨려
물론 당장 체포되서 감옥에 처박힌다. 그는 성격이 매우 급한사람이라 처음해보는
감옥생활을 잘 버티지못했다고 하며 친구였던 한글학자 주시경이 몰래 건네준 권총을
이용해서 탈옥을 감행하지-_-
물론 다시 붙잡혀서 무기징역받고 감옥에 처박힌다.
그는 오랜감옥생활동안 원래 급했던 성격이 점점더 급해졌다고 해. 한편 그는 감옥에 나름
적응하면서 주변죄수와 교도관들에게 독학으로 공부한 영어를 가르쳤다고 하는군.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면서 어찌어찌 예정에는 없던 석방이 이루어 진다.
젊은날의 이승만
그리고 그는 민영환의 밀서를 받아들고 미국대통령에게 전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게 되지
떠나기 직전 고종황제가 그 소식을 듣고 직접 미국대통령에게 밀서를 보내기 위해
이승만을 불렀는데 이승만은 ""그런 나약하고 재수없는 황제따위와는 만나지 않는다"" 라고
무시했다고 하더군-ㅅ-...
그는 어째어째 미국까지 가서 기자들을 모아놓고 기자회견을 열어 여론의 주목을 끄는데
성공하고 여러단계를 걸쳐 어렵사리 미국대통령을 만나는데 성공해
물론 별 성과는 없었다.
그 이후 이승만은 가쓰라-태프트 밀약(미국이 조선을 일본에 넘긴 비밀약속) 을 알게되고
조선은 더이상 안되겠다고 생각한뒤 미국에 눌러앉아 대학공부를 시작하지.
1910년 그는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해. 그 이후로 이승만은 무조건 서양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고 ""박사"" 라는 호칭을 반드시 붙여서 불렀지.
그는 나름 미국의 한인들 사이에서도 엘리트로 통하며 인정받고 있었어.
그러던 차에 친일파 인사인 스티븐슨을 한국독립운동가가 사살한 사건이 벌어진다.
미국의 관심은 모아졌고 당시 미국의 한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돈을 모아 독립운동가를
변호하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했어.
통역이 필요했던 한인들은 명망이 있던 박사님께 통역을 부탁했지.
하지만 여론의 추이를 살펴보던 이승만은 미국인들의 반응이 안좋은 쪽이라는걸 보고는
"" 살인자의 변호따위에 도움을 줄수 없다"" 라고 하며 매몰차게 거절하지.
이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때도 미국인들이 싫어한다며 왜 그런 살인을 하냐고
이미지 나빠진다고 걱정하셨다고 해.
이후 그는 하와이의 기독교계 학교의 교장에 추천받아 하와이로 이동하게 되지.
1편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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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父 이승만 선생 2
1917년이 되었어.
이승만은 자신이 옥중에 있을때 썼던 글들을 정리해서 출판했고 그해 10월에 뉴욕에서 열린
25개 약소 민족대표자 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한다(누가 시킨건 아니고 그냥 스스로 국가대표)
그리고 1919년 민족지도자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지.
당시 미국의 박사학위라는건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는 단박에 조선에서
가장 유식하고 뛰어난 분으로 떠올랐어.
아무튼 3.1 운동이 맹렬하게 벌어졌고 그 여파로 독립의 열망은 대단히 강해져서
조선에서는 수많은 임시정부가 여기저기서 생기게 되지.
임시정부"들"은 이승만에게 국무총리 라던가 하는 자리를 제안했고 이승만은 무려 7개의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신다.(전부다 수락 ㅋ)
그리고선 대한민국 대통령령이라는 명함을 재빨리 만들어서 미국에서 행세를 하고 다니지
그는 대통령 자격으로 프랑스와 영국등 당시 열강에게 공문을 발송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워싱턴에 공사관을 혼자 설치하고 활동했어.
이후 상하이의 임시정부로 통합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에게 연락해서 상하이로
와서 독립운동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승만은 쌩깐다-_-;
계속된 상하이 임시정부의 요구에 이승만은 잠깐 상하이로 가지만 그곳에서 있지도 않았던
대통령직을 혼자 만들어서 국제사회에 설치고다닌 일로 인해서 안창호 선생과 대립이 생기지.
이로인해 임시정부는 편가르기가 생겨서 내분이 생기지. 어쨋거나 당시 미국대통령이
마침 이승만이 대학다닐때 학교 총장이었던 윌슨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수장이 된다.
하지만 삐진 이승만은 5개월만에 미국으로 냅다 출국해버려. 그리곤 돌아오지 않지.
그러다사 1925년 이승만은 독단적으로 국제연맹에 조선을 위임통치해달라고 청원을 해
임시정부는 격노하고 이승만은 탄핵당해서 대통령직에서 쫓겨난다.
그 이후 이승만은 일본천황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을 독립해줄것을 요구하고 이 행동은
같은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조롱을 당하지-_-
그는 이후 임시정부에서 구미위원회라는 미국지부의 지부장 비슷한 직함을 다시 얻었고
미국에서 활동한다.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가 성공하자 이승만은 공개적으로 이를 "어리석은 짓" 이라 비판했어.
이승만은 항상 내분을 일으켜 이른바 "라인"을 만들었고 그로 인해 재미 한인동포사회는 항상
둘로 갈라져 싸워야만 했어.
결정적으로 이러한 내분의 영향으로 미국정부는 임시정부를 조선의 정통성있는 정부로
인정하지 않아. 그리고 세월이 흘러 태평양전쟁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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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父 이승만 선생 3
진주만 기습으로 일본과 미국의 전쟁이 터지자 미국의 이승만은 독립의 기회라고 생각해서
미국에게 상하이 임시정부를 승인해 줄것을 계속 요청했고 무기지원도 요청했어
특히나 소련에 의한 한반도 점령을 우려해서 소련을 경계해야 된다고 계속 주장했지
하지만 미국은 같은 연합국인 소련을 견제할 수 없었고 이승만의 모든 시도는 실패한다.
그리고 2차대전 말엽 한국의 독립의지는 무시당했고 미국은 소련과 함께 조선의 신탁통치를
합의한다. 그리고 1945년 5월 유엔총회에서 이승만은 미국이 소련에게 조선을 넘겼다고
소련을 맹비난하는 전단지를 만들어 배포하며 소련을 공격해
이 사실을 알게된 소련은 격노해서 이때 이후로 한반도 내의 모든 행동에서 이승만을
배제하게 된다. ( 이후 결국 소련이 지배한 북한지역은 이승만을 전부 거부 )
또한 미국국무부와도 이일로 인해서 충돌하게 돼.
아무튼 조선은 해방이 되었고 이승만은 서둘러 귀국을 하지. 연합국측에 비교적 알려져있던
이승만은 가장 빠른속도로 귀국할 수 있었고 귀국하자마자 바로 다음날 방송국으로 달려가
방송을 한다.
""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
이후 그는 김구, 김규식 등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그리고 당시 공산당의 지도자였던 박헌영이 방문해서 한 제안인 친일파 제거를 거부하지
이승만은 건국부터 하고 그다음에 친일파를 제거하자고 주장했거든.
그 이후 이승만은 통일안을 제안했으나 공산당이 거부했어. 그러자 이승만은 방송에 나가
공산당은 나쁜놈이며 어쩌고 공개적으로 마구 공격을 한다. 그리하여 당시 그냥 다른당~
수준의 공산당과는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게 되지.
이후 신탁통치에 대한 찬탁과 반탁의 격렬한 대립속에서 이승만은 김구와 손을 잡고
반탁운동에 최일선으로 나섰고 공산주의자들을 가장 격렬하게 비판하며 공격했어.
미국은 지나치게 갈등을 조장하는 이승만을 오히려 견제했지.
그는 계속적으로 반공을 주장했고 북한이 공산주의화 되어가자 1946년 3월 전라북도 정읍에서
"" 공산당놈들이 총선거를 막는다면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하자 ""
라는 요지의 정읍발언을 한다. 사실상의 분단을 선택한거지.
그는 "공산주의자는 가족이라도 배척하라" 등의 발언을 하며 어서 총선거를 해서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세운뒤에 북한으로 처들어가서 다 죽여버리자고 주장을 하고 다니지
이후 한반도 처리문제를 상의하던 미소 공동위원회에 참석하던 소련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 격렬한 반공행동을 하며 이승만은 자신의 주장을 이어간다.
결국 유엔에서는 남한만의 총선거를 결정하지.
김구 등은 이는 영구적인 분단을 가져올 것이라 격렬히 반대한다. 그때 사건이 터져.
김구와 갈등관계에 있던 유력정치 인사가 갑자기 테러를 당해 사망한거지.
미 군정은 김구를 소환해서 가뒀고 김구는 결백을 주장하며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이승만은 왠일인지 그동안의 협력관계를 깨버리고 냉정히 등을 돌리지.
이후 김구는 이승만을 버리고 북한을 방문해서 통일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이승만은 남한만의 총선거를 계속 주장하지. 어쨋거나 김구의 노력은 실패하고
이승만의 바램대로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이루어져 이승만은 동대문구에 혼자 입후보해서
선거없이 무투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최고령자란 이유로 국회의장에 취임한다.
그렇게 구성된 제헌국회는 헌법을 만들고 이승만은 내각책임제 등의 제도를 거부하고
대통령제를 강력하게 밀어붙여 성사시키지.
그리고 그 이후 이승만은 김구 등을 누르고 그토록 집착했던 대통령에 드디어 당선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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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父 이승만 선생 4
1948년 8월 15일 그토록 원하던 대통령직에 취임하고 정부수립을 선포한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이 된다.
그는 바로 한미동맹을 체결하지만 그의 바램과는 다르게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해.
그리고 일본에 대해 철저하게 반일정책을 펼치지. 그런데 희안하게도 친일파에게는
대단히 관대하게 대응한다.
당시에 반민특위라 불리는 친일파청산을 위한 반민족행위처벌법 이라는 법이 있었어
개념이 가득했던 국회에서 만든 법으로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만든법이었지.
이승만은 이 법을 싫어했어. 그는 국회프락치 사건등을 통해 이 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하고
결국 해산시킨다.
-주. 국회프락치 사건.
당시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국회에 구성된 의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감옥에 처넣은 사건.
근거는 여자간첩이 소지했던 명단이 제시됐다. 물론 그 여자간첩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고
사건을 주도한 인물은 당시 내무차관이었던 장경근. 지시한 사람은 이승만이다.
이로서 대한민국에서 친일파청산은 실패했고 친일파들은 사회요직을 맡으며 아주 잘먹고
잘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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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50년이 되자 이승만은 위기에 몰린다.
두번째로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의원들이 대규모로 당선되고
거창 양민 학살사건으로 이승만의 지지기반은 대단히 약해져.
** 개인적인 밀덕시각으로 봐서는 6.25 전쟁발발을 이승만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승만 입장에서는 전쟁은 단비같은 존재였을꺼야. 내 개인적으로는 이승만은
북한의 침략을 알고도 사실상 유도했다고 본다.
아무튼 6월 25일 북한의 침략으로 6.25 전쟁이 발발한다.
이승만은 곧바로 대전으로 도망가고 라디오를 통해 방송을 한다.
"" 국군이 잘 막고 있습니다. 생업에 종사하세요~~""
그리고 빛의 속도로 부산으로 도망가지.
북한군이 미아래 고개까지 처들어온걸 보고서야 서울시민들은 대 혼란에 빠져 피난을
시작했고 국방부 장관이던 신성모의 지시로 유일한 한강철교가 폭파되지. 그로인해
수많은 사람이 강에 빠져죽고 북한군 앞에 버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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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父 이승만 선생 5
침공 바로 직전 이승만에 의해 내려진 일제휴가령에 의해 병력의 많은수가 휴가중이어서
안그래도 부족한 병력은 위험한 수준이었어. 그래도 국군은 막강한 장비와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에 맞서 그야말로 맨주먹으로 혈투를 벌이며 저항하고 있었어.
서울지역은 3일만에 무너졌지만 춘천지구의 국군이 기적적으로 인민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해서
국군은 포위당해 전멸당하는 사태를 겨우 면한채로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지.
당시엔 보도연맹이라는 단체가 있었어. 뭐 공산당 비스무리한건데 문제는 얘네가 노는 사람들
데려다가 일도 시키고 쌀도 나눠주고 해서 정치단체라기보다는 사회사업에 가까운 행동도
많이 했다는거야. 특히 뭣도 없는 서민들은 쌀한바가지라도 얻으려 가입한 경우도 많았어.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은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과 공조해 반란을 일으킬꺼라는 정보를 들었고
헌병대에 지시해서 전국의 보도연맹원들을 모아서 학살하도록 지시한다.
앞에서 밀려오는 적군을 버려둔채 국군은 이승만의 명에 따라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고
이 사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상황이야.
낙동강까지 밀려난 국군은 지원온 미군과 함께 인민군에 맞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어
우리의 이승만은 일본으로 도망갈 계획을 짜고 일본에 미리 준비까지 다 해놓는다.
하지만 승리의 노병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전세를 반전시켜 인민군을 안드로로
날려버리지.
덕분에 이승만은 서울로 돌아오고 인민군 점령하게 있던 주민들을 대상으로 공산당에 협조한
놈들을 잡아내서 죽이는데 열을 올린다.
하지만 짱개의 대규모 참전으로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은 후퇴를 하게되고 레알 저녁은
압록강드립을 발사했던 이승만은 그냥 조용히 하게돼.
다시한번 후퇴의 기운이 감돌자 이승만은 지난번 ㅌㅌㅌ에서 실수했던 부분을 보완하지
지난번엔 너무 열심히 도망가느라 병력이 될만한 젊은이들이 다 인민군 점령지에 남겨졌거든
그래서 이번엔 젊은 남자를 몽땅 징집해서 국민방위군이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처넣는다.
국민방위군 대장에는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씨름꾼 출신이었던 사람이 임명되고
기타 이승만의 호위대 역할을 하던 양아치군단이 한자리씩 해먹지.
당연히 비리가 대폭발했고 엄청난 횡령으로 인해 국민방위군들은 한겨울에 맨발로 굶어가며
고생하다 많은수가 얼어죽거나 굶어죽는 사건이 터지지.
이승만은 그건 오해며 소통이 부족했을뿐. 이라고 버텼지만 개념찬 국회의 맹공격에
결국 어쩔수없이 국민방위군 간부 몇을 사형에 처하고 대충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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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父 이승만 선생 6
1951년 유엔군과 인민군은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대혈투를 벌이고 있었어.
이승만에게도 1951년과 1952년은 기념할 만한 업적을 세운 해지.
당시 대통령은 국민이 뽑는게 아니라 국회의원이 뽑는거였어. 그런데 1950년 벌어진 두번째
총선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국회의원들이 대거 낙선하고 무소속이 대거 당선됐거든.
국민들이 새로운 정권을 원했던거지.
이대로뒀다간 1952년 대통령선거에 이승만은 당선될 가능성이 없었어.
그러자 부산으로 피난가있던 이승만은 결단을 내린다. 일단 대통령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는
법안을 제출해. 멍청한 국민들은 고무신만 나눠주면 되거든. 조작하기도 편하고 말야.
하지만 당연히 야당의원들은 격렬히 반대한다.
이승만은 이에 대한민국 어버이연합..이 아니고 비스무리한 단체들을 동원해서 국회를
공격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내린다. 그리고 헌병대를 동원해서 야당의원 50 여명을
빨.갱.이 로 몰아서 버스에 태워서 감옥에 처넣어 버리지.
그런다음 군경을 동원해서 국회를 포위한다음 반대하는 사람을 일어나서 표결하는 방법으로
투표를 진행해서-_- 166명 투표 163찬성 3기권이라는 개간지 결과를 바탕으로
대통령선거를 직선제로 바꿔버리지.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부통령이던 김성수는 ""해도해도 너무하네 씨발"" 이라는 말을 남기고
부통령을 때려치고 나가게 된다.
아무튼 전쟁은 끝났고 이승만은 계속 대통령이었어.
전쟁이 끝나고 국회의장과 정부요인이 수도를 버리고 도주한것에 대해 대국민사과를 하라고
요구하자 이승만은 끝까지 거부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과장된 몸짓과 함께
"" 과인이 부덕한 탓이오 "" 이럴까? 하면서 꺼지라고 대답해주지.
1954년 제네바에서 6.25 참전국들은 모두 모여 한반도의 정부를 해체하고
남북이 함께 총선거를 하여 통일 대한민국을 구성하자고 합의했어. 하지만 단한명 이승만이
끝까지 격렬하게 반대한다. 결국 당사자의 반대때문에 한반도 통일의 마지막기회는
실패로 끝나게 되지.
그리고 며칠후 이승만은 국회를 이용해 영원히 대통령이 되기위해서
""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제한이 없이 영원히 대통령 할수 있음"" 이라는 법안을 제출하지
하지만 국회의 표결결과 여당의 압도적인 대가리수에도 불구하고 헌법개정수인
재적의원 203 명의 3분의 2인 136명에 한명 모자란 135표의 찬성을 얻어.
헌법개정안은 부결로 선포되었지만 이승만과 여당은 너님 계산을 해보세요 라고 들이대며
203의 3분의 2는 135.3333 이니까 반올림(사사오입)하면 135만 찬성하면 된다는 주장을 하지
그리고 닥치고 개정으로 선포해버린다.
로마 시대부터 투표의 가결은 닥치고 올림이라는 법칙을 인류 최초로 격파한 이승만은 역시나
다음 대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해서 대통령을 계속한다.
그는 1957년 휴전협정 폐기와 군비강화를 주장했고...
또한 같은해 경제각료들이 제시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공산주의자의 방식이라며 거부했다-_-
그리고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선거를
조작하다가 들통이 나버리지..
마산에서는 개씨발 이게 말이되냐고 3.15 의거가 일어나 시민들이 시위를 한다.
경찰은 시민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12명의 시민이 사망하지.
참고로 이 3.15 의거는 바로 며칠전 정부에 의해 국가기념일로 선정되었다.
경찰에 의한 총격사건은 대충 덮어지는듯 했으나 4월 11일. 마산앞바다에서 낚시를 하던
낚시꾼이 시체를 하나 건지게 돼.
3월 15일 시위를 하다 실종된 고등학생 김주열 군의 시신이었는데 눈에 최루탄이 박힌채로
죽어서 바다에 버려졌다가 떠오른 것이었지.
시민들은 대폭발했고 결국 전국적으로 민주화를 위한 4.19 혁명이 일어난다.
처음에 이승만은 자유당 당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에 전념하겠다고 버텼지만 시위는 점전더
격화되었고 상황이 더 악화되기전에 주한 미 대사는 이승만을 찾아가 하야할 것을 설득하지.
이승만은 4월 26일 결국 하야했고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한다.
그는 처음에 아주 도망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후임정부가 그의 귀국을 거부하지.
그는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를 끊어놓고 3월 16일에 사과성명을 발표하지만
당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특별지시를 내려 이승만의 귀국을 막아.
결국 그는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솔직히 할말 존나 많지만 사실의 나열로만 연재글을 마칩니다.
출저 : 밀덕행보관
밀덕행보관 블로그가 사라진게 아쉬웠던 블로그쥔장이 밀덕행보관의 글들을 긁어 모아놓은
곳에서 퍼왔구요, 밀덕행보관이라는 분.... 글이 참 찰지다고해야하나... 긴 글이지만
함 읽어보세요.. 현대사를 간략하게 팩트 중심으로 정리해놓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