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을 준비하던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고난의 시기 큰 형의 집에 잠시 얹혀산 적이 있었다. 내가 큰 형의 집에 입성하기전 형수님은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보다 훨씬 더 미운 입이 마트 행사 품목보다 더 저렴한 막내 도련님"이 온다는 사실때문에 반대를 하셨지만, "너희들 아니면 서울 하늘아래 저 못나고 부족한 놈 거둬줄 사람이 없다"는 간절한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입싼 막내 도련님이자 응가대장 식충이인 나를 받아주셨다.
형 부부는 맞벌이를 하셨는데, 두 분이 출근할 때 나의 모습은 쇼파에 누워 영화 케이블 방송을 보고 있고, 두 분이 퇴근하실 때도 같은 자세로
영화를 보고는 했다. 매일 쇼파에 한 쪽팔로 턱을 괴고 영화를 같은 자세를 한 달간 지속하다 보니 목과 어깨 근육이 뭉쳐 병원에 다니게 되었고,
그런 나의 모습이 한심했는지 (아마도 취사완료 직전의 압력밥솥처럼 형수님은 폭발 직전 이셨던 것 같다.) 형은 내게 "빈둥빈둥 놀지만 말고 밥 값 좀 해라" 라고 하시며 내게 몇 가지 밥 값을 위한 일을 하달하셨다.
형과 형수님이 내게 하달한 매우 임파서블한 임무는 1. 아침에 4세 조카 어린이집 데려다 주고 오후에 데려온 뒤 함께 건전하게 시간 보내기 2. 집에 오는 택배 받기 3. 내 방 청소 매일 하기 였다. (아.. 생각해보니 매일 머리 감기도 있었다.)
특히 형과 형수님은 1번 임무를 강조하셨는데, 조카에 긍정적인 의미의 좋은 삼촌이 되어주기를 바라셨다. 나는 잠시 진지하게 고민한 뒤 조카와 함께
운동도 하고 조카와 삼촌이 다정하게 함께 비지땀을 흘릴 수 있는 건전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닌텐도 위' 를 사달라고 했다. 절대 내가 하고 싶어서 사달라고 했던 건 아니었음을 강조하며 실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운동량이 부족할 수 밖에 없는 조카에게 자연스럽게 운동을 시킬 수 있는 것은 닌텐도 위 만한 것이 없다고 설득했다. 형은 이 새퀴.. 뭔가 병신같은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비자금을 털어 내게 닌텐도 위를 사주셨다.
다음날부터 내가 시작한 일은 다른 엄마들과 함께 어린이 집 버스를 기다리며 조카를 배웅해주는 일부터 시작했다. 조카는 다른 애들은 엄마가 데려다
주는데 자기는 삼촌이 데려다 준다고 매우 기뻐했고, 친구들에게 "우리 삼촌은 집에서 놀아~" 하면서 자랑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 말을 들은 조카의
친구들은 "와 너희 삼촌은 집에서 노는구나!" 하며 부러워 했다고 한다. 조카가 어린이집을 가면, 영화만 보던 지난 시절을 반성하며 새롭게 발전적인 모습으로 낯선이들과 새로운 인간관계 형성을 위해 아제로스 대륙에서 호드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우들과 함께 리치왕과 사투를 벌였다. 리치왕과의 힘겨운 사투를 마치고 3시가 되면 어김없이 조카를 데리러 갔다.
나의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조카는 항상 큰 소리로 삼촌~~ 하고 달려 나오곤 했다. 초반 몇 일을 입던 추리닝에 슬리퍼를 직직 끌고, 머리는 산발하고 조카를 데리러 다녔는데 조카가 다니는 어린이 집 선생님 (아침에 오는 선생님과 다른 분) 이 블엘 여자 사제 처럼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본 뒤 블엘 여 사제에게 보호막을 받고 싶은 한 마리의 갸날픈 타우렌 전사가 되었다. 그 뒤 나는 어린이집에 갈때마다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삼촌이 선생님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는 질문을 하며 친분을 도모해보려 했다. (물어볼 필요가 없는 질문은 뭐.. 우리 조카의 성장을 위한 식단이나 조카가 자꾸 삼촌이 잘생겼다고 하고 닮고 싶다고해서 큰일이에요 하하핫. 이런 쓸데없는...)
나는 조카에게 형수님이 금지시킨 식품들(마이구미, 더위사냥, 빠삐코, 마이쮸 등)을 사주며 선생님에 대한 신상정보를 캐물었지만, 조카녀석이 알고 있는 정보는 그녀가 아직 미혼이라는 것 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조카가 원하는 데로 놀이터에서 놀아주기, 금지식품 같이 먹고 형수님께 오리발 내밀기, 놀이터에서 뿡뿡이 노래부르며 엉덩이로 춤추기 등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무시하고 헌신한 결과 조카는 내가 원하는 정보를 하루에 하나씩 선생님에게 물어봐주기 시작했다. 그녀가 아직 20대 중반이고 남자친구도 없으며, 재미있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정보까지 알아내며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조카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닌 우리 둘만의 행복한 미래를 위한 건설적인 대화의 장을 마련하나 고민할 때,어느 날 조카가 "삼촌~ 선생님이 삼촌은 뭐해?" 이렇게 물어봤어 하는 것이었다.
순간 그녀도 내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내가 하는 일을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다.
닌텐도 위 테니스를 4살 아이를 상대로 전혀 봐주는 것 없이 정정당당하게 플레이하는 냉혈한 승부사? 아니면 목 근육통 환자? 와우에서 채광과 약초수집을 한뒤 경매장에 올리는 1차산업 종사자 ? 하지만 결론은 백수 였다. 결국 나는 조카에게 "삼촌이 매일 게임하는 거 알지? 선생님이 다음에 뭐하냐고 물어보면 게이머 라고 해야되. 그것도 아주 실력있는" 조카는 큐피트의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응 게이머!"라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뒤... 그녀가 나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뭔가 안타까워하는 표정이었고, 내가 인사를 하면 "힘내세요" 하는 표정으로 인사를
받아주고는 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 몇일 후 어린이집에 선생님이 면담을 요청해 형수님이 어린이집을 다녀가셨다. 형수님은 어린이집에 다녀온 뒤 형을 강제로 조퇴시킨 뒤 3자대면을 하게 되었다. 나의 사랑하는 큐피트 아니 조카는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삼촌이 "집에 매일 있는 과자 잘 사주고 테니스 잘치는 실력있는 게이"라고 말한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이 놀라서 다시 한번 조카에게 "게이?"라고 물었을 떄 조카는 "삼촌이 게이랬어요~" 라고 확인 사살까지 했다고 한다. 형수님은 선생님에게 삼촌의 정체는 취업준비생을 가장한 백수이며, 매일 게임을 하는 여자를 좋아하는 것으로 봐서는 게이는 아닐거라고 아이가 말을 실수한거라고 했다고 한다. 형과 단둘이 소주 한 잔 하며 형은 내게 "집에 내려가 이 새퀴야" 라고 하셨다. 결국 난 조카의 앞날을 위해 형의 집에서 쫓겨나 시골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아마도 그녀는 마음씨도 이쁘고, 나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나 지금쯤 행복하게 살고 있을거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