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점 * * * 1/2
[추격자]의 주인공 엄중호는 전직형사입니다. 비리 혐의로 경찰에서 쫓겨난 뒤 지금은 출장안마소를 운영하고 있지요. 그는 그냥 적당히 지저분한 보통 남자입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기엔 상상력과 의지가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양심이 밑바닥까지 떨어진 남자도 아니죠.
그러던 그에게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밑에서 거느리던 마사지사 아가씨들이 한 명씩 사라지기 시작한 거죠. 처음엔 돈 떼어먹고 달아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알고 봤더니 그 여자들은 모두 같은 고객을 방문한 뒤 실종되었어요. 한 동안 안 쓰고 있던 중호의 머리가 느릿느릿 굴러갑니다. 혹시 이 녀석이 내 여자들을 어디로 팔아먹은 거 아냐?
하지만 진상은 그보다 훨씬 끔찍합니다. 여자들은 달아나거나 팔려나간 게 아니었어요. 지영민이라는 연쇄살인마가 그들을 데려와 살해한 뒤 시체를 토막 내 집마당에 묻었던 거죠. 그리고 그는 막 중호의 직원인 미진을 자기 집으로 끌어들여 감금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밖으로 나갔다가 그 근처를 얼쩡거리던 중호에게 붙잡히죠. 벌써 끝인가? 아뇨. 지영민은 이전에도 연쇄살인 자백을 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적이 있어요. 지금도 역시 증거가 없는 건 마찬가지고. 12시간 안에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지영민은 풀려납니다. 그리고 아직 아무도 미진이 갇혀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미진이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찾아다니는 사람은 중호밖에 없죠.
형식상으로 [추격자]는 엄중호와 지영민의 대결구도를 취하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캐릭터 묘사는 중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지영민도 흥미로울 수 있는 캐릭터지만, 영화는 끝날 때까지 그를 일종의 블랙박스로 취급하고 있어요.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려주는 조각 힌트들이 곳곳에 보이긴 하지만 그는 끝까지 마음을 읽을 수 없는 타자입니다. 그에 비하면 엄중호는 관객들에게 마음을 열고 있고, 우린 그의 갈등을 비교적 수월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처음에 중호는 그렇게 올바르다고 할 수 없는 직업으로 먹고 사는 악덕업주입니다. 하지만 그가 더러운 세상에서 지저분하게 살아남느라 억누르고 있던 양심, 죄의식, 형사로서의 본능이 연쇄살인과 얽히면서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내 돈 떼어먹고 달아난 년들을 잡아야겠다!"밖엔 생각이 없던 사람이 중반 이후로는 의무감과 양심의 유일한 수호자가 되어 위기에 빠진 여자를 구하기 위해 목숨걸고 뛰어다니는 거죠. 이런 인물들은 언제나 보기 좋습니다. 졸렬하고 닳아빠진 우리에게도 선을 행할 희망이 있다는 걸 보여주니까요.
중호에 비하면 경찰 집단의 묘사는 암담합니다. 그들이 중호보다 더 타락했거나 무능하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주먹질 수사와 현대 과학 수사, 옛 습관과 피의자 인권보호 사이에 끼어 이도저도 못하는 그들의 행동은 그냥 비능률적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집단 안에서 몸을 사리느라 아직도 어디선가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미진의 생사엔 상대적으로 무관심합니다. 영화는 이들의 일상적인 무덤덤함과 비겁함에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대한 해답이 있는 건 아니죠. 이 영화의 주인공인 중호 역시 해답은 아닙니다. 그도 집단 안에서라면 똑같이 행동했을 거고 그가 이 영화에서 한 행동도 최선의 선택은 아니죠.
개선될 부분들이 있습니다. 경찰 업무에 대한 몇몇 세부묘사는 약합니다. 특히 미행장면은요. 후반 국면 전환은 지나칠 정도로 인공적으로 구성되어 생기가 떨어지고요. 지영민의 연쇄살인도 조금 톤을 낮추는 편이 극사실주의를 추구하는 영화의 분위기와 더 잘 어울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군데군데 이가 빠진 부분도 채우는 편이 좋았을 것 같고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추격자]는 생생하고 사실적이며 힘있는 영화입니다. 김윤석, 하정우, 서영희의 연기도 뛰어나고 그들에게 드라마의 배경을 제공해주는 서울시의 묘사도 현실감이 넘쳐요. 2시간을 훌쩍 넘기는 영화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고, 서스펜스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끈질기게 이어지며, 꼭 좋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뒷맛도 강합니다. 기대 이상으로 센 영화예요. (08/01/28)
DJUNA
기타등등
이 영화에선 서울 시장이 얼굴에 똥물을 맞는 소동이 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물론 이 각본을 쓸 당시 서울 시장은 지금의 오세훈이 아니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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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djuna.cine21.com/movies/the_chase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