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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9. 02. 월요일
산하
통진당 이석기 의원 사태의 전말을 곱씹어 보자. 이석기 의원이 석 달 전에 당원들을 모아 놓고 했다는 강연과 그 후의 분임토의 내용이 국정원에 의해 녹취됐고 심지어 동영상으로 찍히기도 한 것 같다. 통진당 내 일부 당원들의 움직임을 3년 동안 감시해 왔다는 국정원은 국정원 국정 감사가 끝나고 선거 개입 의혹이 더욱 짙어가는 과정에서 통진당을 압수수색하고 몇 명을 구속한 후 이석기 의원실까지 뒤졌다. 증거를 내놓으라는 아우성 속에 슬쩍 흘려진 녹취록은 실로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그 내용을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하여간 통진당원들도 '허무맹랑하고 악의적인 조작'이라고 입을 모았고 진중권씨는 ‘발달장애’들의 작태라고 직격을 날릴 정도였으며 민주당은 '사실이라면 정신병원에 가야 할 사람들'이라고까지 경악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접근해야 하는 핵심은 하나다. 국정원이 왜 이 시점에 저런 걸 터뜨렸는지, 그들이 제기한 내란 예비 음모가 법적으로 효력이 있는지 없는지, 녹취록 말고 다른 건 없는 건지, 국정원이 어떻게 입수한 건지 등등은 다 중요하지만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할 뿐이다. 문제는 녹취록이 사실인가 아닌가이다. 사실이라면 어디까지가 사실인가이다. 팔씨름 하자고 내민 팔에는 머리 박아 봐야, 발 디밀어 봐야 소용 없다. 통진당은 날조 조작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 팔씨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80년대에 겪었던 공안기관의 그 황당한 조직도처럼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조직을 엮어 놓은 식의 조작이라면, 북한에 대해 긍정적인 말 한 마디 했더니 고정간첩 돼 있던 그런 어처구니 없는 날조라면, 우선 가장 분노해야 할 사람이 사라졌다. 기자들 앞에서 분연히 일어나 그날 그런 곳에 간 적도 없고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으며 이 말이 거짓이라면 모든 법적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해야 할 이석기 의원이 거의 하루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여기서 손목이 일 푼 꺾인다.
흔한 간첩 조직도의 예
마침내 이석기 의원이 나타났고 그는 전면 부인했다. 그러면 희망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김재연 의원은 그런 모임 자체가 없었다고 부인했다가 그만 머쓱해졌다. 국정원이 특정한 그날 그 장소에 당원 모임이 있었는데 통진당 플래카드 걸고 당 게시판에 공고된 그런 모임은 아니었고, 누군가 농산물 직거래 관련 모임한다고 빌린 장소였으며, 이석기가 와서 강연한 것도 맞고 분임토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럼 그 자리에서 무슨 얘기를 했느냐가 사안의 핵심이 된다.
금요일 저녁 이석기 의원의 기자회견을 나는 술집에서 봤다(강남은 역시 강남이더라. 소주집 칸막이 자리에도 티븨가 있더라). 이석기 의원을 정치적으로 지지하지는 않고 오히려 맹렬히 반대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가 명색이 통합 ‘진보’당 의원으로서 국정원의 녹취록을 낱낱이,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날조되었으며 원래의 나의 말은 이러하였는데 이걸 이렇게 뒤바꿔 놨다며 준엄하게 따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기자회견에서 말한 것은 그의 발언의 ‘취지’였지 ‘내용’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청혼하는데 '당신은 오랫 동안 내 곁에 있었고 쏼라 쏼라'한 후 '결혼해 줘요'를 빼먹고 나가버린 셈이다.
'전쟁을 맞받아쳐서 항구적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의도였다'는데 그를 위해 무슨 행동을 하자고 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이건 그의 입만 바라보는 수백만 시청자들, 국민들에 대한 폭력이었다. 그런데 명색이 경기동부의 수장이신 이석기 의원이 그랬다. 딱 그 말만 하고 기자회견을 끝내 버렸다. '나는 뼈 속까지 평화주의자입니다' 나에게는 솔직히 그렇게 들렸다. '뼈 속까지 거짓말을 하고 있군'. 아니 따지고 보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내용 아닌 ‘취지’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일종의 억지들이 발생한다. 우선 '딱총 몇 개로 무슨 내란을 한다는 거냐?', 즉 내란예비음모죄에 대한 시비부터 보자. 우선 이 사안은 내란예비음모이든 국가보안법이든 그 법리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애초부터 정치적 문제였고 정치적 타격을 입히기 위해 던져진 폭탄이며 그는 정치적으로 ‘맞받아쳐야 할’ 사안이었다. 즉 내란을 음모했다 아니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여전히 중요한 것은 '유사시 딱총들고 경찰서 습격하고 유류 저장고 재질까지 파악하고 혜화 전화국 등 통신 기지까지 눈독을 들이는' 세력이 합법 정당 내에 존재하는지, 그리고 현역 국회의원이 그를 주도했는지의 문제다. 그걸 내란이라고 생각하든 소요라고 생각하든 그건 법원이 판단할 문제고 실질적인 정치적 판단은 일반 대중의 평가에 좌우될 뿐이다. 그래서 내란이다 아니다는 아무 의미가 없는 헛트집이 되는 것이다.
'국정원발 녹취록을 어떻게 믿느냐? 왜 그걸로 시비를 거느냐? 그게 진보의 할 짓이냐?'
이 질문에는 단 한 마디로 족하다. 그걸 못 믿도록 설득해 내는 게 공당의 의무고 그 조작을 구체적으로 폭로해 내는 것이 그래도 뭔가 다를 것이라고 표를 찍어 준 사람들에 대한 도리라는 것이다. 3년 전도 아니고 석 달 전의 강연이다. '보도연맹 사건에서 보듯 전쟁 발발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으면 그건 왕년의 나 같은 페이퍼 당원도 아니었을 것이고 '유사시에는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으려고' 식칼을 갖고 다니는 열성 당원들의 모임이었다면 이석기 의원 자신이 그 강연 내용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설사 기억하지 못한다손 치더라도 100명에게 다 전화해서 어떤 말을 했는지 녹취록에 버금가는 강연록을 재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정원의 녹취록을 정치적으로 짓밟으려 했다면 그렇게 해야 했다. 그게 진보의 할 짓이었다.
오늘 통진당은 국정원이 프락치를 투입했다고 그걸로 시비를 걸고 있다. 정보 기관의 불법 사찰이야 당연히 문제삼아야 하지만 이것도 비비탄 개조하든 뭐든 무장을 획책하고 파괴 행위까지도 내다보고 있는 이 회합 녹취록의 날조를 밝혀내지 못하면 그 힘이 빠질 수 밖에 없다. 정보기관의 임무는 유사시 공공의 안녕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파악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이건 전 세계 정보기관의 공통적인 책무다. 문제는 그 책무를 방기하고 엉뚱한 사람들을 때려잡고 주제 넘게 선거에까지 개입하는 작태이지 오히려 녹취록에 등장하는 이들을 감시하고 폭로하는 것은 그들의 본연의 책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국정원은 그 책무를 ‘날조’나 ‘고문’이나 ‘은폐’나 ‘조작’이나 ‘압력’이나 ‘빨간물 뒤집어씌우기’로 대신해 왔기에 욕을 먹고 해체를 요구받았던 것이다.
어쨌든 불법 수사이니 다 무효라는 투로 나온다면 이건 이건희 회장님이 춤을 추실 일이다. '도청이 불법이니 그 안에 나오는 삼성 떡 값 먹은 검사 실명 공개는 유죄'라는 어처구니 없는 판결을 자칭 진보정당이 지지해 주고 있는 셈이니 이 아니 흥겨우랴. 하물며 김기춘 비서실장도 어깨를 들썩일 일이다. 초원복국집 사건 때 도청은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결기를 세우던 그분이 아니신가. 사석에서 한 소리를 도청한 것이 문제라고 주장하던 그 분이 아니신가. 전화라도 해 주시기를 기대해 봐야 하나? "야 야 국정원 살살 해! 걔들 알고 보니 좋은 애들이더라고.”
싸우면서 닮는다던가. 김기춘 비서실장, 이건희 회장님과 비슷한 의견을 펼 기세인 ‘진보’ 정당 지지자들의 논리는 이상하게 옛날 ‘진보’를 탄압하고 민주주의 압살하던 사람들의 논리에 접근해 가고 있다. 무서울 정도다. '네 말도 맞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국정원 앞에서 이러는 것은 이적행위일 뿐'이라는 논리가 그렇다. 이건 '그래 네 말대로 민주화해야지. 하지만 북한이 저러고 있는데 이러는 건 북한에 이로워'라고 을러대던 인간들의 논리와 단어 하나가 바뀌었을 뿐 완전히 똑같다. 거기에 경상도식의 '우리가 남이가'도 등장한다. ‘우리가 죽으면 니들은 무사할 거 같냐’는 식이다. 꼭 '전라도로 넘어가모 우찌 되겠노' 하던 꼴통들이 하던 그 짝이다.
가장 가증스러운 것은 '의견은 다르지만 당신의 의견이 그 때문에 탄압받는다면 싸워 주겠다'고 했다는 볼테르나 뭐 누가 끌려갈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니 결국 내가 끌려갈 때 아무도 없더라는 브레히트까지 호출되는 일이다. 장담하는데 나는 통진당의 주류가 '우리는 주체사상을 지지하며 그 사상적 영도 하에 통일을 이루는 것이 우리 민족의 살 길이다'라고 선언한다면 맹세코 그들에 대한 탄압에 격렬히 반대할 것이다. 머리 속에 들어있고 몸으로 펼치는 사상이란 사상과 공론의 자유 시장에서 서로 다른 사상과 부딪치면서 융성하거나 사멸해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암만 그들을 탄압한다고 해서 없어지지도 않을 것이며 그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사상의 자유’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뼈 속까지 평화주의자 주제에 '오는 전쟁 맞받아치자. 시작된 전쟁은 끝장을 내자 어떻게? 빈손으로? 전쟁을 준비하자. 정치 군사적 준비를 해야 한다......구체적으로 하면 물질 기술적 준비 체계를 반드시 구축해야 한다. 물질 기술 준비란 힘과 힘이 충돌하는 시기에 기술 준비와 포괄적으로 물질적 준비를 갖추자.......정치 군사적 준비 체계를 잘 갖추어 물질 기술적 토대를 굳건히 해야 희생을 최소화하고 피 흘리는 동지도 적고 승리를 앞당긴다'라고 ‘지랄을 떠는’(미안하다 이 이상의 표현을 못하겠다) 강연을 끝낸 분임토의에서 어디 어디를 치고 총을 어떻게 하고 사제폭탄이 어쩌고 하는 이들의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는 태양계, 아니 안드로메다 은하계에 걸쳐서 찾아봐도 없다. 여기서 반드시 이 말이 나올 것이다. '어떻게 국정원발 녹취록을 그대로 인용하여 비난하는가'. 옳거니.
자 돌아온다. 모든 문제는 녹취록에 대한 구체적이고 믿을만한 반박이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 어떤 논리도 통진당을 구해주지 못하고 이석기를 방어하지 못하며 국정원에 반격할 수도 없다. 심지어 '종북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 심리전을 펼쳤다'는 국정원발 개소리의 신뢰도를 높이게 되며 엄연한 불법이자 범죄를 저지른 국정원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에도 저해가 된다.
'내란음모 조작이다. 국정원은 자폭하라'는 구호를 외칠 수 있겠는가? 나는 외치지 못한다. 나 자신도 믿을 수 없는 구호를 어떻게 외치란 말인가. 자 녹취록을 반박하라. 하나 하나 조목 조목, 어떻게 왜곡되었고 어떻게 없는 소리를 집어넣었으며 무슨 ‘취지’로 자신이 이런 말들을 했는가를 자세히 해명하라. 그것이 입증된다면 이석기 의원 이하 100명의 전사들은 한국 현대사에서 저질 국정원에게 가장 심대한 타격을 입힌 공로자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다면 그들은 가장 찌질한 존재로서 한 나라의 발전에 가장 커다란 해악을 끼친 존재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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