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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같이 몰려다니던 친구들이 일곱 있다. 나를 포함하면 총 8명이 되므로 편 가르기도 적당하고 모여서 같이 어리석은 일들을 벌이기에도 매우 적절한 숫자이다. UFC링이 8각형인걸 감안하면 아마 8이 상당히 균형잡힌 숫자인게 틀림없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 8명중 여자친구가 있는 녀석은 2명 뿐이다. 다 없어야 정상인데 2명 씩이나 커플이라는 것이 나에겐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보다 난해하기 그지없다. 그룹인원의 25%나 커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나는 통계라는 녀석이 얼마나 사악한 야누스의 얼굴인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어쨌건, 이 이야기는 눈이 높은 친구와 그 친구에게 소박한 엿을 선물하려던 나에게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미 언급했지만, 내 친구는 눈이 높다. 높은 것도 이만저만 높은 것이 아니다. 빈라덴은 WTC에 비행기를 들이박아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게 아니라 이 녀석의 눈높이에 비행기를 들이박았어야 했다. '녀석의 눈을 멘헤튼에 옮겨가야 높이가 맞을 것이다' 라는 말은 세월이 지나며 '녀석의 눈을 두바이로 가져가야 높이가 맞을 것이다' 라는 말로 변해갔다. 자연스레 나는 고안(高眼) 녀석을 만나면
"성층권 대기는 안구 건강에 좀 좋냐?"
"거 요즘 비행기 항로가 요란하게도 짜여있던데, 눈이랑 안 부딪히게 조심해라"
"오존층이 파괴되는 것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시고 계신데 소감 한 말씀 해 주시죠?"
라며 점점 강하게 놀려댔다. 나의 표현이 화려해질수록 녀석 또한
"내 눈이 성층권이라면 니 눈알은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 아래에 쑤셔박혀있냐?"
"인류가 내려간 가장 깊은 깊이가 고작 12Km인데 네 눈알은 60Km 아래까지 내려갔으니, 전 인류가 네눈알에 경의를 표해야될거 같다"
"엄한 지질학자들 힘들게 하지 말고 이제 외핵의 구성 성분좀 밝혀줘라"
라며 지지않는 태도로 나의 놀림을 맞받아쳤다. 처음엔 가벼운 실랑이였지만 날이 갈수록 우리의 말에는 날이 서기 시작했고, 우리의 자존심 대립은 극에 달했다. 어느샌가 우리들의 작은 충돌은 녀석의 입에서 '내 눈 높다' 라는 말이 먼저냐 내 입에서 '내 눈 낮다' 라는 말이 먼저냐는 싸움으로 변질된 지 오래였다.
그러던 어느날, 커플이던 한 친구가 무려 소개팅이라는 전래동화의 한 구절 같은 일을 가져왔다. 나와 고안은 그 무렵 굉장히 가을을 타고 있었기에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었다. 우리는 각자 왜 자신이 이 소개팅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주장과 서슬퍼런 논거들로 무장하여 세 치 혀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우리들은 법정스릴러의 한 장면이라도 찍는 양 온갖 개드립들을 주워삼키기 시작했다. 무법시대를 눈과 이로 평정한 함무라비가 와도 중재할 수 없을 정도의 개판이었다. 우리는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존경하는 주선자님!' 이라던지 '이의있습니다!' '저 발언은 소개팅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따위의 말을 내뱉으며 서로의 주장을 개껌 씹듯 씹어댔다.
존경하는 주선자는 아비규환에서 간간히 인자한 웃음을 짓다가 '소개팅녀 사진 보여줄게' 라고 말했다. 그리고 순간, 기적처럼 고안과 내가 한 마음이 되어 경건한 마음으로 소개팅녀의 사진을 영접했다. 그리고 결과는 처참했다.
물론 나는 첫인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자는 주의는 절대 아니다. 외모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해버리는 사회에 가장 절망한 것이 나 자신이었으니까. 난 좀 덜 생겼기에 언제나 까이는 편이었고, 사진도 더럽게 못 찍혀서 항상 피를 보는 입장이었다. 평생을 못생긴 상태로 살아왔기에 진짜 딱 하루만 못생겨보고 싶은 마음도 엄청나게 컸다. 하지만 이건 좀 아니었다.
나와 고안은 서로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누가누가 궤변을 더 교묘하게 사용하느냐 하는 싸움판은 치열한 두뇌전으로 탈바꿈 되었다. 사진이 올라온 뒤 뻥 안치고 2분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존경하는 주선자에서 가증스러운 주선자로 바뀌어버린 친구가 눈치도 없이 입을 열었다.
"뭐야 왜 아무도 말이 없어? 니들이 배때지가 불렀구나?"
그 순간 고안이 던진 한 마디가 내 뇌리에 깊숙히 각인되었다.
"야, 아무리 급해도 이건 좀 아니지....."
고안이 자기 눈높이는 멀쩡하고 내 눈이 초열지옥 즈음에 있다며 뻔뻔스레 말하던 일들이 쩡하고 스쳐지났다. 나는 녀석을 굴복시킬 절호의 찬스를 놓칠 수 없다는 마음에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야! 저 정도면 귀엽구만! 너 진짜 눈알을 물로켓에 매달아서 쏴올렸냐? 뻔뻔한것도 정도가 있어라 임마!"
"...야 진심이냐? 너 진짜 저 정도면 괜찮다고?"
고안은 혼란에 빠진 듯 했다. 녀석은 영문도 모른채 자신을 공격하고 있었다.
"당연하지! 내가 누누히 말해왔잖냐. 하여간 눈만 높아가지곤."
나는 즐거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드디어 고안이 스스로 '내 눈이 높구나. 미안하다 친구들아.' 라고 말하는 순간이 온 듯 했다. 이미 삼각산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스텝을 밟는 중이었고 한강물은 뒤집혀서 허리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날이 온 것이다. 내 머릿속은 온통 '내가 이겼다!' 라는 생각들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나는 완고한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고안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허공을 3초간 응시했다. 드디어 자신의 눈이 높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같았다. 녀석은 막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온 병아리 마냥 미약한 삐약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가.... 내가 진짜 눈이 높은가.....?"
"그래. 넌 눈이 높다."
최후의 한 마디만 남은 상황이었다. 나는 녀석의 입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고안이 입을 열어 말을 하려던 찰나였다.
"야, 그럼 알파찌개(가명) 너가 해라."
주선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새하얀 이를 드러내보이며 웃었다. 나는 순간 아차 싶었다. 고안을 짓눌러버리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정작 이 일의 종착역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 나는 내 스타일 아니라..... 내 눈이 높... 하.... 난 안 할란다."
고안도 옆에서 주선자를 거들었다. 그렇게 나는 자승자박의 상황속으로 빨려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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