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주변에 미팅이나 소개팅을 시켜주겠다는 사람은 많았었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공약을 남발하고 실행하지 않는 국회의원처럼 입대 전에도, 심지어 제대 후에도 선뜻 내게 미팅이나 소개팅을 주선해준 공약을 이행한 월하노인 같은 은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중 "왜 선배같이 괜찮은 남자가 여자친구가 없어요?"라는 립서비스를 남발하는 여후배들이 가장 싫었다. 그렇게 괜찮은 남자면 니가 사귀어주던가..
못 생긴 감을 왜 찔러나 봐서 마음 상하게 하는지.. 나쁜 X들..
학기 초 세렝게티 초원의 하이에나 무리처럼 같이 어울려 다니던 친구들도 하나 둘 씩 여자친구가 생기면서 점박이 하이에나에서 암사자들을 거느린 멋진 목도리를 한 숫사자가 되어갈 때, 나는 혼자 외롭게 풀을 뜯는 무리에서 도태된 늙은 코끼리가 되어갔다.
그러던 중 나를 안쓰럽게 여긴 절친의 여친이 자신의 친구를 소개팅 해주겠다며 그 자리에서 바로 친구의 전화번호를 받게 되었다. 그녀와 만나기 전 몇 번의 통화를 했다. 그녀는 내게 목소리가 좋다는 칭찬과 말투에서 상대방의 배려가 느껴진다는 호감의 표시를 보였다. (사실 전화통화에서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이야기한 것은 그녀였다. 난 그저 그녀가 하는 말에 아~ 네. 그렇군요 하면서 호응만 했을 뿐이었다.) 몇 번의 통화 후 우리는 드디어 만나기로 했다.
그녀와 약속이 잡힌 이후 여자와 단둘이 만나보지 못해 소개팅을 망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원활한 정상생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나처럼 대한민국에서는 절대 인정받지 못할 외모를 가졌지만 이상하게도 여자친구가 자주 바뀌는 인기남인 과 동기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 녀석은 담배를 한 대 물고 여유있게 말을 시작했다. "소개팅 별거 없어 내가 시키는데로 하면 최소 애프터는 성공할거야" 난 메모장을 꺼내 그 녀석의
말들을 적기 시작했다.
그 녀석이 내게 전수해준 내용은
1. 처음 만나면 무조건 그녀를 칭찬해라 (외모는 기본, 무조건 칭찬해라)
2. 서로 동질감을 가져야 한다. (비슷한게 없다면 그녀가 먹는거라도 시켜서 같이 먹어라)
3. 너는 형사가 아니다. 절대 호구조사 하지 마라. 자연스럽게 그녀가 그녀의 이야기를 하게 만들어라.
4. 첫 만남에 많은 것을 바라지 마라. 대신 헤어지기 전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멘트와 세 번만 더 만나달라고 하며 자연스레 애프터를 신청해라.
5. 너의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 시켜라. 여자는 자신감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
6.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둘이 있으면서 절대 대화가 끊기면 안된다. 할 말이 없으면 메뉴에 있는 리스트라도 읽어줘라.
나는 그 녀석에게 강의를 받으며,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그녀를 벌써 내 여자친구로 만들어 버린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드디어 그녀와 만나는 날, 그 녀석이 코디해준 의상을 입고, 머리도 만지고 약속장소인 커피숖으로 갔다. 하지만 약속시간이 되었는데 아직 그녀가 도착하지 않았다. 약속시간보다 15분이 지난 뒤 내 전화기가 울리며, 커피숖에 여기저기 주변을 살피는 한 여자가 등장했다.
지금도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그녀는 정말 이뻤다. 그녀의 자세한 외모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녀는 밝은 미소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내게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었다며 사과했다. 나는 순간 (무조건 칭찬해라) 가 떠올랐다.
"잘하셨습니다. 시간맞춰 오실 필요 없습니다. 지하철이 막힐 수도 있는거고, 요즘 서울에서 누가 제 시간에 약속을 지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공짜로
물도 얻어 먹었습니다."
그녀는 약간 민망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아.. 네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구요." 라고 했다.
서빙하는 직원이 우리 테이블로 왔을때 나는 '젠 젠 젠 젠틀맨' 답게 그녀에게 먼저 주문하라고 말했다.
그녀는 "저는 아이스 라떼 시럽 한 번만 넣어주세요" 라고 주문했다.
또 다시 친구의 충고가 떠올랐다. (동질감) "저도요"
그녀는 "라떼에 시럽 넣어서 드시나봐요. 저랑 비슷하시네요" 라며 약간의 미소를 보였다. 성공적이다!
그녀에게 날씨 이야기, 그리고 학교 이야기 등을 하고 있을 때,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어디 사세요? 자취하신다고 들었는데..."
(호구조사 금지) 나는 자신있게 "어디 사는게 뭐가 중요합니까! 자연스레 서로를 알다가면 제 고향도, 그리고 사는 곳도 아시게 될 겁니다. 저는 **씨가
어디 사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아요." (사실 그녀가 어디 사는지, 그녀의 형제 관계, 그녀 집의 숟가락 갯 수 까지 궁금했지만 참았다.)
그녀는 뭔가 당황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화제를 바꾸며 "그런데 **씨 되게 이국적이신 거 같아요. 그리고 키도 크시고 운동도 잘하실거 같아요."
나는 속으로 '흠... 드디어 나의 가장 큰 단점인 비쥬얼... 외모 지적질이 올게 왔구만...' 다 준비 되었지..'라 생각했다.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켜라.)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네~ 제가 태국사람 같이 생겼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별명도 '싸와디깝' 입니다 하하하. 그리고 제 콧구멍이 좀 커 보이죠? 저 500원짜리 동전이 콧구멍에 들어가는데 한 번 보실래요?"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지며 500원 동전을 찾는 나를 말렸다.
이후 소개팅을 주선한 친구 커플 이야기와 서로의 취미 이야기 등을 했다. 하지만 점점 그녀와 나와 대화의 빈도가 줄어들고 음료수를 마시는 횟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대화가 끊기면 안된다.) 나는 커피숖의 메뉴를 들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메리카노는 왜 아메리카노 일까요? 미국사람은
먹지 말라는 뜻인가..그리고 마끼야또? 마끼야또는 일본이 원산지인 커피인가요?" 그녀는 민망과 황당을 넘어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고 얼마 남지 않는 벽의 잎새만 쳐다보는 소녀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내게 커피숖에서 자리를 옮겨 다른데로 가자고 했다. (첫 만남에 많은 것을 바라지 마라) 나도 그녀와 점심도 함께 먹고, 영화도 보는 등 하고 싶 싶은 것이 많았지만, 첫 만남에 내 욕심을 채우면 안될거 같아 단호하게 "이제 집에 들어가세요!"라고 했다.
그녀는 "네?? 이제 1시밖에 안됐는데요? "
그렇다. 그녀와 나는 정오에 만나 1시간 동안(정확히는 45분) 커피숖에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첫 만남에서 함께 많은 것을 하면 안됩니다. 대신 저를 앞으로 3번만 만나주세요. 그럼 그때 같이 밥 먹죠!" 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 네 그러시던가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수모를 당하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그녀를 보낸 뒤 나는 로맨틱! 성공적! 즉.. 오늘 난 소개팅을 잘했어 라면서 내 자신에 만족하고 있었다.
잠시 후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의 목소리는 상당히 흥분되어 있었다.
"야... 이 fdklasfjoiklasdjfaiofakfdjaklfjkal (욕설 필터입니다.) 너 때문에 나 완전 개욕먹었잖아." 뭐? 앞에서 개판쳐놓고 뻔뻔하게 3번만 만나달라고 하고 그리고 앞에서 콧구멍에 동전 넣으려고 했다고? 너 미쳤나!"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어 나는 **이가 조언해준데로 한건데. 분위기 살릴려고.."
친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야.. **씨가 핸드폰에 저장된 니 이름 바꿨데.. '수신금지 떡진상' 이라고 바꿨데. 전화하지마, 해도 안받을꺼니까"
그렇다... 나는 그녀의 45분을 망친 수신금지 떡진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