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사 유진항은 젊었을 때 선전관이어서 대궐에서 숙직했다.
그 해는 1762년 영조 대왕 때로 금주령이 내려 엄하게 지켜지던 때였다.
어느날 한밤 중에 임금님이 갑자기 숙직 중인 선전관은 궁으로 들어오라는 명을 내리셨다.
마침 숙직 중이던 유진항이 명령을 받들어 궁으로 들어가니 임금님이 긴 검 하나를 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소문을 들었더니 아직도 백성들이 몰래 술을 빚어 먹는다더구나. 너는 이 검을 가지고 가서 3일 내로 술을 빚는 사람을 잡아들이도록 하거라. 만약 술 빚는 사람을 잡아오지 못하면 네 목을 벨 것이다.]
유진항은 명령을 받들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유진항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누웠다.
그러자 애첩이 물었다.
[어째서 이렇게 기운이 없고 힘들어하시는가요?]
[내가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 건 임자도 알 것이네. 그런데 술을 못 마신지 너무 오래되다 보니 목이 말라 죽겠구만.]
[날이 저물면 술을 구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셔요.]
밤이 되자 첩이 말했다.
[제가 술이 있는 집을 알고 있는데, 제가 직접 가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그녀는 술병을 들고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린 채 집을 나섰다.
유진항은 몰래 첩의 뒤를 따라갔는데, 첩은 동촌의 한 초가집으로 들어가 술을 사오고 있었다.
유진항이 이 술을 맛있게 마시고 다시 사오라고 시키자 첩은 또 그 집에 가서 술을 사 왔다.
유진항이 이번에는 직접 술병을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첩이 이상하게 여기고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유진항이 대답했다.
[이 근처에 사는 아무개가 내 술 친구인데, 이렇게 귀중한 술을 얻었으니 어떻게 혼자만 마실 수 있겠나? 가서 친구와 함께 마시고 오겠네.]
유진항은 집을 나서 술을 팔던 동촌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 집에 들어서니 몇 칸 되지 않는 누추한 집이어서 비바람도 가리기 힘들 지경이었다.
집 안에는 한 선비가 등잔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다가, 유진항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해 일어나 맞이했다.
[손님께서는 이런 깊은 밤에 무슨 일로 이런 누추한 집에 오셨습니까?]
유진항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나는 임금님의 명을 받들어 왔소이다.]
그러면서 유진항은 허리에 차고 온 술병을 내놓으며 말했다.
[이 술은 이 집에서 판 것이 맞겠지요? 임금님께서 엄히 명하시어 모든 백성에게 술을 금하였는데 어찌 그대는 술을 파는 것이오? 그대의 혐의가 모두 드러났으니 나를 따라가 그 벌을 받아야겠소.]
선비가 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있다가 말했다.
[법으로 임금님께서 금한 것을 어겼으니 어찌 용서를 빌겠습니까? 하지만 집에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부디 하직 인사 한마디라도 하고 궁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유진항이 말했다.
[그러도록 하시오.]
선비가 안쪽 방으로 들어가서 낮은 목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니 어머니가 놀라서 물었다.
[얘야, 왜 아직 자지 않고 어미를 부르느냐?]
선비가 대답했다.
[전에 제가 어머님께 사대부는 비록 굶어 죽더라도 법을 어겨서는 안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머니께서는 끝내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못난 아들이 붙잡혀 가니 다시 뵙지 못할 것 같습니다.]
늙은 어머니가 큰 소리로 울며 말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냐? 내가 몰래 술을 빚은 게 돈을 벌려고 한 게 아니라 너에게 아침에 죽이라도 먹이려고 했던 것인데... 이렇게 된 게 모두 이 못난 어미 탓이니 이를 어찌한단 말이냐!]
그 사이 부엌에 있던 선비의 아내도 이 이야기를 듣고 가슴을 치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비가 차분하게 아내에게 말했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왔는데 울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내게 아들이 없으니, 내가 죽더라도 부디 어머님을 잘 보살펴주시오. 그리고 옆 동네에 아무개에게 아들 몇 명이 있으니,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 중 한 명을 양자로 삼아 편안히 살도록 하시오.]
선비가 아내에게 부탁을 하고 집 밖으로 나왔다.
유진항이 가만히 옆에서 그 모습을 보니 너무 불쌍해서 마음이 아팠다.
유진항이 선비에게 물었다.
[어머님의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
[70살이 넘으셨습니다.]
[아들은 있는가?]
[없습니다.]
유진항이 말했다.
[이런 광경을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구려. 나는 아들도 둘이나 있고 부모님을 모시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당신 대신 내가 죽겠소. 그대는 마음을 놓고 술병을 모두 가지고 나오시오.]
아내가 술병을 내오자 유진항은 선비가 술을 한 잔 하고는 술병을 깨트려 집 뜰에 묻고 말했다.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는데 집안 꼴이 말이 아니구려. 내가 이 검을 줄테니 이것을 팔아 어머님을 잘 모시구려.]
유진항은 차고 있던 검을 주고 그 곳을 떠났다.
선비가 따라오며 한사코 자신이 죽으러 가겠다고 외쳤으나 유진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선비가 지쳐서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부디 은인의 성함만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나는 선전관이오. 이름은 알아서 어디에 쓰겠소?]
말을 마치고 유진항은 멀리 떠났다.
다음날은 임금님이 말한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대궐에 들어가니 임금님이 물으셨다.
[너는 술 빚는 사람을 잡아왔느냐?]
[잡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소리치셨다.
[그런데 감히 네 놈이 아직도 머리를 목에 붙인 채 내 앞에 나타났느냐!]
유진항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도 못했다.
한참 뒤에야 화를 가라앉히신 임금님은 유진항을 평소보다 3배 멀리 돌아서 제주도에 유배하도록 명하셨다.
유진항은 유배를 간 지 몇 년뒤에야 비로소 풀려났고, 10여년 동안 가난하게 살다가 복직되어 경상북도 합천군 초계 사또가 되었다.
그런데 유진항이 가난히 살았던 탓에 원한이 사무쳤는지 그 마을에서 오로지 자신 혼자 잘 사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백성들은 모두 근심하며 매일 사또의 욕을 했다.
그러다 마침 그 주변을 돌아다니던 암행어사가 출도해서 창고를 봉하고 관가로 들어섰다.
어사는 이방과 아전들을 모두 잡아들인 다음 매를 칠 준비를 했다.
유진항이 두려워하며 문 틈으로 엿봤더니, 놀랍게도 어사는 바로 옛날 동촌에서 술을 팔다 자신에게 걸렸던 선비였다.
유진항은 아랫 사람을 시켜서 어사를 알현하기를 청했다.
어사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감히 탐관오리가 암행어사를 보겠다고? 정말 양심도 없구나!]
유진항은 막무가내로 들어가서 어사 앞에 절을 했으나, 어사는 얼굴도 보지 않고 정색을 한 채 앉아 있을 뿐이었다.
유진항이 물었다.
[어사께서는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어사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혼잣말을 했다.
[내가 그대를 어찌 알겠는가?]
유진항이 말했다.
[혹시 어사의 집이 옛날에 동촌에 있지 않았습니까?]
어사가 놀라서 말했다.
[어찌하여 그것을 알며, 또 어찌하여 그런 것을 묻는 것이오?]
유진항이 말했다.
[임오년에 임금님이 내리셨던 금주령을 어겨서 당신을 찾아갔던 선전관을 기억하십니까?]
어사가 더욱 놀라서 궁금해하며 말했다.
[그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진항이 말했다.
[제가 바로 그 선전관입니다.]
어사는 급히 일어나 유진항의 손을 잡고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말했다.
[은인이 여기 계셨군요. 지금 여기서 우리가 만난 것은 하늘이 이어준 것 아니겠습니까!]
말을 마친 뒤 어사는 죄인들을 모두 석방하고, 밤이 새도록 풍악을 울리며 유진항과 회포를 풀었다.
어사는 그 곳에서 며칠 동안 머문 뒤 서울로 돌아가 보고서를 올렸는데, 유진항을 칭찬하는 내용이 가득이었다.
임금님께서는 그 보고서를 보고 흡족해 하시어 유진항을 특별히 평안도 삭주부사로 임명하셨다.
그 후 어사는 대신의 지위까지 올라갔는데, 가는 곳마다 유진항과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그리하여 조정에는 유진항과 어사의 의리에 대한 칭송이 가득했다.
유진항은 이후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역임했다.
어사는 소론의 대신인데, 내가 그 이름을 잊어버려서 여기에는 적지 못했다.
원문 및 번역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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