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edia.daum.net/society/newsview?newsid=20130825210312095 "소모품 취급 일본군, 위안소에서 성욕 처리..."
아버지의 일기에 대체 무슨 비밀이 담겼길래
[인터뷰] 전쟁 진실 알리려 매년 독립기념관 찾는 다나카 노부유키씨 몇 달 사이 주름 골이 더 깊어졌다. 지난 5월 구마모토현에서 만난 이후 지난 15일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다나카 노부유키(62·田中信幸·일본 구마모토현 거주)씨를 다시 만났다.
그 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창립 20돌인 지난 2010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참전 당시 쓴 아버지(무토 아키이찌)의 일기를 기증했다. 그 일기에는 중일전쟁당시 중국에 있던 군위안소를 찾은 기록이 담겨있다. 기증한 부친의 일기는 일본이 위안소를 운영한 거증자료의 하나로 서울에 있는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기자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8년께였다. 15년 전 그는 거칠 것 없는 청년이었다. 당시 구마모토현교육위원회는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기술돼 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부분을 삭제하려고 했다. 이를 접한 그는 앞장서 반대투쟁을 벌였다. 충남도청과 구마모토현청이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것에 착안해 대전과 충남시민단체에 연대를 요청한 사람도 그였다. 토론회마다 목소리는 높았고 관공서 항의방문 때는 늘 선두에 섰다.
한국사 정통한 일본인... 매년 독립기념관 찾아 역사연수 기자는 그 후 거의 매년 한 차례 이상 그를 만났다. 그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 등에서 추진하는 역사교과서 불채택 운동을 주도해 보수적인 구마모토현에서 채택율 0%(2001년·2005년·2011년)의 신화를 일궈냈다.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 반대운동을 위해 일부러 충남을 방문하기도 했다.
자위대 이라크 파병 위헌소송을 제기한 이도 그다. 지난 2007년부터는 매년 일본인 수십여 명을 조직해 천안의 독립기념관을 찾아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고 있다. 한일 을사늑약, 3·1독립운동,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역사 왜곡 교과서, 독도 영유권 분쟁에 이르기까지…. 그의 한국사에 대한 이해는 넓고 깊다.
그는 어린 시절 여느 아이들처럼 노트에 일본군의 전투기나 군함을 그리며 놀았다. 아버지로부터 전쟁체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군가도 즐겨 불렀다. 그의 아버지도 참전 경험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런 그가 전쟁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고3 때였다. 1970년 구마모토대학에 입학한 그는 학생운동에 참가했다.
"아버지 세대가 행한 조선 침략·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한 때였다 '이것은 누가 봐도 침략전쟁이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전쟁과 같은 것'이라고 강하게 느끼게 됐다." 그는 오키나와 반환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아버지와 전쟁의 책임을 문제를 놓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 구치소에서 긴 구류가 이어지면서 아버지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때 마음먹고 아버지에게 '아버지 세대들이 참가한 전쟁은 침략전쟁이었다, 진실이 알고 싶고 알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취지의 편지를 썼다. 전쟁을 주제로 아버지와 대화가 시작됐다." 구치소에서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참가한 전쟁은 침략전쟁"
출소 후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졌다.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된 때도 그 무렵이었다.
" 아버지가 징병되기 전에는 경찰의 눈을 피해 신사에서 유인물을 뿌렸다는 이야기를 했다. 입대 직후에는 '위험 사상의 소유자'로 의심받아 혹독한 심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는 '나는 천황각하의 백성'이라고 소리쳐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생각도 못한 내용이었다. 아버지 역시 전쟁 피해자란 사실을 깨달았다." 다나카씨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때는 1975년. 그는 유학생 간첩 혐의로 수감된 재일동포 이철씨 구명운동에 적극 나섰다. 이듬해 대학 철학과를 중퇴하고 후쿠오카로 올라가 노동운동에 참가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했다. 그는 가정을 꾸린 후 전기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지만, 평화시민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1989년에 일본국기(히노마루)와 국가(기미가요) 강요반대 시민넷을 결성했다. 또 1992년에는 자위대 해외파병 반대시민네트워크를 결성해 사무국장을 맡았다. 아버지가 그에게 누구도 몰랐던 일기를 건넨 것은 그즈음이다.
"1990년대 중반, 아버지가 중일전쟁 당시 쓴 일기를 내게 건넸다. 이 일기가 현재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그것이다." 건네 받은 '아버지의 일기' 속에는... 그는 아버지의 일기를 읽으며 전쟁터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됐다. 때로는 일기에 등장하는 위안소 출입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을 묻기도 했다.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처음 사람을 죽이고 일주일간 음식을 먹지 못할 만큼 충격을 받은 일, 이후 담력 훈련을 위해 살해한 중국인에 대한 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죽음을 각오한 기록, 병사를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분위기, 절망한 군인들의 위안소 내 성욕 처리…." 그가 아버지의 치부가 담긴 일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는 분명하다.
"아버지의 일기를 통해 일본이 저지른 전쟁의 진실을 조금이나마 접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침략한 쪽의 '변명'이 되지 않도록 아버지들이 피해를 준 아시아 민중들의 눈길에 닿아 진실을 후세에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버지 일기가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것은 내 가족에게는 큰 영광이다." "아버지의 전쟁 책임 나눠지겠다" 그의 부친은 지난 2006년(향년 91세) 세상을 떴다. 그가 스스로 묻고 답한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계셔 현재 일본 정치 상황을 보신다면 뭐라고 말씀하실까. 나는 위안부 피해자분들이 살아 계시는 동안 일본 정부가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하는 것을 일본 전후세대에게 부과된 책무라고 생각한다. 내 여동생도 같은 생각이다. 지금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에서 위안부 피해자 관련 문제에 대한 해결 활동을 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아버지의 일기가 일본 국내에서도 아이들의 교육에 활용되면 좋겠다." 다나카씨는 오는 10월 중순 20여 명의 구마모토현 시민들을 이끌고 독립기념관을 찾을 예정이다. "일본 시민들이 역사인식을 바르게 하도록 돕는 자체가 아버지의 전쟁 책임을 나눠지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