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의 한국인입니다.동네에서도 나를 쿠리(한국인)라고 부르고 음식도 한국음식 밖에 할줄 하는 것이 없습니다.”32년을 주카이로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지난 4월 정년퇴직한 구마 사이드 칼릴(60)은 오늘도 집에서 서성거리기만 한다.“자식들은 밖에 나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낚시도 하면서 좀 즐기라고 하지만 지난 30여년간 취미생활을 배울 시간도 없었습니다.”구마 할아버지는 한국 대사관과 집만을 왕복하며 지난 30여년을 살아왔다고 얘기한다.
청소부터시작해서 요리까지 대사관의 모든 잡일은 구마씨의 담당이었다.몇년 전부터는 아예 대사관 주방에서 한국 외교관들의 점심식사를 맡아왔다.잡채,불고기,갈비,새우볶음 등 여러 음식들을 대사관저 주방아줌마로부터 배웠다.대사관 주최 각종행사에서도 행사준비를 도맡아와 카이로 ‘구마 할아버지’로 친숙한 그다.
한국인들과 함께 오랜시간을 보낸 그가 가장 슬펐던 때는 지난 4월말에 가진 퇴임식이었다.더이상 대사관에서 한국인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생각에 구마 할아버지는 그자리에서 펑펑 울었다.“준한국인이니 한국의 노동법에 따라야지요” 구마 할아버지는 아직도 튼튼하다며 팔뚝을 보여주고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구마씨가 72년 2월 당시 총영사관에서 임시직 청소 업무를 맡은 것이었다.그의 성실함에 당시 최운상 총영사는 구마씨를 73년 7월부로 정식고용했다.그러나 3개월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해 구마씨는 징집돼 전선으로 나갔다.6개월을 전장에서 보내면서 구마 할아버지는 영원히 한국 대사관에서 일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당시 최총영사와 정무삼 영사가 자신의 가족에게 해준일을 그는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월급도 챙겨주고 집을 방문해 아이들까지 돌봐준 한국인들을 그때부터 정말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고 구마씨는 말한다.실제로 전후 이집트 정부는 참전한 모든 사람들에게 공무원직을 주었지만 구마씨는 이를 거절하고 한국대사관에 남기로 결정했다.
“따스한 정(情)이 한국인들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구마씨는 주장한다.95년 외무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때도 마찬가지다.한때 이집트에서 근무한바 있던 당시 공로명 장관의 부인이 직접 그를 집으로 초청해 식사를 같이했다.“대사관 청소담당인 나를 장관 부인께서 직접 초청했습니다” 구마 할아버지는 몇번이고 자랑스럽게 말했다.그리고 이집트에서 거주한 바있던 외교관,교수,사업가들도 모두 나와 자신을 위한 파티를 마련해 준것도 그는 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구마할아버지는 95년 한국 총영사관이 대사관으로 승격됐을때가 가장 기쁜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파티를 준비하면서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올 정도였다”고 그는 말했다.당시 승격준비를 위해 정태익 대사 및 외교관들이 철야작업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도 대사관에서 쓰러져 자곤 했다고 그는 말했다.“한국인들의 단점은 일을 너무 많이 그리고 급히 하는 것”이라고 구마씨는 주장했다.그는 특히 공로명 전장관과 정태익(현러시아 대사)대사를 이집트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한 한국인들로 꼽았다. 일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지만 불평하는 후배 이집트 고용인들의 불만을 달래느라 고생도 했다고 언급했다.“일을 너무 많이하고 스트레스를 받다보니 가끔은 모든일을 너무 조급히 처리하려한다”고 그는 지적했다.‘빨리 빨리’라는 단어가 이집트 고용인들이 1주일도 안돼 배우는 말이라고 그는 웃으며 말한다.
구마 할아버지는 출가한 딸과 분가한 장남을 제외한 아들 네명 및 손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이 중 한 아들은 현재도 한국 대사관저에서 일하며 아버지의 길을 걷고 있다.
출처:중앙일보 중동전문기자 서정민기자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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