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널은 정말 재미있게 보고 있기에 조잡한 글로 해피엔딩을 적어봅니다.
노래는 역시 회상.
희미한 시야로 보이는 건 엑셀 창이 떠있는 모니터였다.
여긴 대체, 박해영은 둔중한 두통에 이를 살짝 물며 고개를 들었다. 노이즈낀 듯한 대화소리가 점차 선명하게 들려온다.
"일단 식사들 하자고."
"과장님, 오늘은 뭐로 하실 겁니까?"
"부대찌개 어때?"
"부대찌개요? 좋죠."
저녁시간인가, 밖으로 나가 저녁을 해결하고 밀린 업무를 봐야겠다는 일상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해영이 이마를 손으로 집으며 신음을 흘렸다. 강렬한 미시감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신 후 돌아와 옆에 앉은 동료와 가벼운 대화, 그 후에 기획서와 씨름하며 가지 않는 초침을 지겹게 쳐다보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 일련의 과정은 지난 수 년간 반복해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었다. 낯설 리가 없는 행동들이 지금 이 순간 더 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야, 박해영이."
해영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네, 하고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새끼 저거, 어제 잔뜩 마시더니 정신 못차리네. 먼저 가있을 테니까 얼른 따라와라."
"예, 예. 과장님."
과장님. 이 말이 왜 이렇게 거북하고 입에 안 달라 붙는지 모르겠다. 과장님, 과장님. 몇 번을 입에 굴려봤을 때 의도치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이재한 형사님."
떠올랐다. 해영은 경악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따닥따닥 붙은 네 개의 책상에서 투덜투덜 거리고 있어야할 사람들이 이곳에는 없다. 에프프레소 머신을 들여놔야 한다고 시도 때도 없이 말하는 정헌기 경사도, 지겹도록 오대양을 부르짖는 김계철 경사도, 그리고…….
"차수현 팀장."
해영은 비틀거리며 사무실을 나왔다. 느리게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가 없어 계단을 밟고 뛰어내려갔다.
"박해영! 야, 야!"
뒤에서 과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차를 몰아 서울지방경찰청으로 갔다. 서 안으로 들어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잡고 이렇게 물었다.
"이, 이재한 형사님을 아십니까?"
"예?"
"이재한 형사님이요!"
"저기 진정 좀 하시고."
"제발, 제발 좀 말씀해주세요. 여기 이재한 형사님 계신가요?"
붙잡힌 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그런 사람 모릅니다." 라고 답했다. 해영은 호흡을 진정시키고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무전으로 인해 모든 것이. 자신이 평범한 회사에 다니고 있는 걸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바뀌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기억이 혼재되어 수습이 되질 않지만 해영은 침착하게 필요한 질문을 내놓았다.
"장기미제수사전담팀."
"네?"
"장기미제수사전담팀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남자는 손목시계를 한 번 들여다보며 빠르게 말했다.
"그런 팀 없습니다. 이제 가봐도 되겠죠? 그리고 문의할 게 있으면 데스크로 가세요. 아주 친절하게 알려줄 테니까."
- - -
해영은 운전석에 앉아 핸드폰을 켰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단축번호 2번을 꾹 눌렀다. 화면이 전환되며 글씨가 뜬다.
'형'
"여보세요?"
핸드폰 건너편에서 대답이 없었다. 해영은 초조한 숨을 내뱉으며 기다렸다. 그리고 무슨 일이야, 라는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형."
[갑자기 왜 그래.]
"형 맞지? 형 맞는 거지?"
[어, 그래. 형 맞아. 대체 무슨 일이야?]
해형은 목구멍을 틀어막는 울음에 대답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핸들을 붙잡고 소리 없이 울었다.
[해영아, 해영아.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형 목소리 들으니까 너무 좋아서."
[힘든 일 있어? 저녁에 술 한 잔 할까?]
"어, 형. 술 한 잔, 아니 정말 많은 잔이 필요할 것 같아. 정말로."
[우리 동생 많이 힘든가 보네. 내가 비번 바꿔달라고 해서라도 꼭 시간 낼게.]
선하디 선한 형의 목소리였다. 해영은 저녁에 보자는 말과 함께 통화를 종료했다. 의자에 기대 떨리는 숨을 토해냈다. 형이 살아있다. 그것만으로도 구원 받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곧 불안감이 엄습했다. 무전으로 인해 과거가 바뀌고 그 영향으로 현재까지 바뀌었다. 인과는 엄중했다. 무전기를 통해서 과거를 바꾸어도 반드시 일어날 일은 일어났었고, 때때로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들도 일어났다. 과거의 작은 변화 하나가 현재의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빌어먹을 나비효과.
해영은 진양서로 차를 몰았다. 미제전담팀이 결성되기 전 팀원들은 그곳에 있었다. 진양서. 그곳으로 가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 - -
"계철아, 너 찾아온 사람있다."
해영은 마른 침을 삼키며 밖으로 나오는 남자를 보았다. 까칠한 눈매에 짧은 머리카락. 다듬지 않아 너저분한 수염.
"뉘슈?"
목소리까지, 해영은 눈앞에 선 김계철 경사를 보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 지 몰랐다. 나는 이 사람을 안다. 너무나도 잘 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이제 날 모른다.
"김계철 형사님?"
"내가 김계철은 맞는데, 무슨 일이요?"
"저, 저기……."
"어허, 젊은 양반이 왜 이렇게 얼을 탈까."
과거에서 우린 서로 자주 다투었지만, 그럭저럭 마음이 맞았던 동료였습니다. 이 말을 해영은 내뱉을 수가 없었다.
"거 이상한 친굴세. 볼일 없으면 이만 갑니다잉."
"저기!"
"아따, 사람가지고 장난 하는 것도 아니고."
따갑게 쳐다보는 계철에게 해영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차수현 경위님을 아십니까?"
"누구?"
"차수현 경위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계철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차 형사는 왜?"
- - -
경찰청에 차수현이 있다. 해영은 계철에게 들은 대답을 가지고 경찰청으로 차를 몰았다. 아까부터 직장 동료가 계속 해서 전화를 걸고 있지만, 해영은 받을 수 없었다. 어두워진 하늘. 경찰청 건물의 불도 대부분 꺼져있다. 안으로 들어가 민원실을 찾아갔지만 근무시간이 끝났는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서울청에서처럼 지나다니는 사람을 붙들고 늘어졌다.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차수현 형사라고 하는데, 아시나요?"
"차수현 팀장님이요?"
해영은 광명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한시름 놓았다. 차수현은 살아있다. 그리고 차수현과 만나면 이재한 형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리라.
"예, 그 차수현 형사님이요. 성격은 더럽고 자기중심적에 사람 말 정말 안 듣는 그 차수현 형사님이요."
"실례지만 어떤 관계이신지."
"아, 그건……."
뭐라고 설명해야할까. 해영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요. 정말 고맙다고. 계신 곳, 아니 전화번호라도 좀 알 수 있을 까요?"
"음, 죄송한데 개인의 신상정보를 함부로 말씀드리기가 곤란해서. 내일 날 밝으시고 민원실에 요청하면 연락할 수 있을 겁니다."
"역시 그래야 하겠죠."
남자가 옆을 지나쳐 사라졌다. 해영은 조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어쨌든 차수현은 살아있다. 이걸 안 것만으로도 약간의 여유가 생겻다. 넋나간 얼굴로 운전석에 앉아있는데 핸드폰이 울었다. 형이었다. 술집에 있으니 오라는 전화였다.
[근데 선배들하고 같이 있어. 너 한 번 보고 싶다고 해서.]
해영은 알았다고 대답한 뒤 차를 출발시켰다. 마침 경찰청 근처 술집이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형이 말한 술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곱창집이었다.
"왔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형이 보였다. 해영은 순간 다리의 힘이 풀렸다. 정말 형이다. 살아있는 형.
"앉아."
"어, 형."
"회사원이 힘들긴 힘든가 보네."
"힘들긴."
겨우 현실에 다리를 붙인 기분이 든다. 머릿속은 양분된 세계관으로 어지럽지만 지금은 형과 얘기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근데 선배분들하고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잠깐 요앞 편의점 가셨어. 금방 오실 거야. 담배사러 가신 거니까."
"아."
"얼른 먹어. 대충 익었으니까."
형이 젓가락으로 곱창을 집어 하얀 쌀밥 위에 올려주었다. 해영은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어 밥을 입 안으로 넣었다. 온기가 퍼져나간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에 해영이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형이 말없이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우리 해영이 고생이 많네."
"내가 뭐, 뭐가 고생이 많아. 형이 더 힘들지."
형이 더 힘들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해영은 눈을 살짝 감았다. 그러고 보니 형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지? 단절된 기억이 번뜩이며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형이 여깁니다, 라고 말하며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는 게 보였다. 해영은 시선을 입구 쪽으로 던졌다. 열린 문 사이로 그리운 얼굴이 들어오고 있었다.
"얘가 제 동생입니다."
형의 말을 들으며 해영은 천천히 일어섰다. 느긋한 걸음으로 나가오는 여자. 그녀가 앞에 서서 당당하게 손을 내민다.
"차수현이에요. 동생 자랑을 하도 하기에 궁금했는데, 이렇게 보내요."
해영은 떨리는 손으로 악수를 했다.
"과장님은요?"
형이 말했다.
"바로 들어올 거야. 담배 다 태웠으니까."
차수현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가게 문이 열렸다. 고집이 느껴지는 주름에 까끌까끌한 수염. 거대한 풍체를 가진 남자는 코를 한 번 훌쩍이며 테이블을 향해 다가왔다.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앞에 선 남자는 헛기침을 한 번 하며 입술을 뗐다.
"이쪽이 그 동생?"
형을 보며 묻는 이재한이었다.
"예, 과장님."
"그렇구만. 흠흠, 그래. 그랬어. 자자, 일단 앉자봐."
둥근 테이블을 끼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형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과장님, 저 잠시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 아무래도 그 건 때문인 것 같네요."
"어어, 그래. 얼른 받고 와."
"예."
형이 자리를 비웠다. 가벼운 침묵이 테이블에 내려앉았다가 이재한의 기침에 날아간다.
"저기, 박해영이라고 했나?"
"선배님이 이 사람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차수현이 말했다.
"그 선우가 매번 그랬잖아. 우리 해영이 정말 잘났다고, 어."'
"선우가요? 걔 맨날 그냥 동생이라고만 했는데."
"아니야, 내가 들었어. 씁, 쩜오 너 자꾸 내 말에 안다리 건다?"
"선배, 쩜오가 뭐에요, 쩜오가. 나이가 몇인데."
"넌 인마, 나이로 계급장 따냐. 넌 그냥 나한테는 평생 쩜오야."
"선배님."
"왜?"
"집에 가서 봐요."
"……뭔 말을 못 해요."
해영은 대화하는 두 사람을 멍하니 쳐다봤다. 가슴이 요동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두 사람의 손을 꽉 쥐며 웃고 울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이 두 사람에게 박해영이란 존재는 형사 박선우의 동생일 뿐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울고 웃는다면, 그건 그냥 미친놈이 될 뿐이다.
'형은 경찰이 됐구나.'
기억이 난다. 누명을 벗고 그 계기로 경찰로 들어간 형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때였다.
"박해영 씨?"
이재한이 소주병을 들고 있었다.
"아, 예."
"술 한 잔 받지?"
술잔을 한 번 털고 소주를 받았다. 차수현의 잔에도 술이 차오른다. 해영은 소주병을 넘겨받았다.
"제가 한 잔 따르겠습니다."
"나야 좋지."
이재한이 내민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럼 가볍게 짠해야지."
"예."
"선배 왠일이에요. 짠 같은 거 싫어하면서."
"이런 날은, 이런 날이니만큼 해야지. 아암, 그래야지."
세 개의 잔이 가볍게 부딪쳤다.
시원하게 웃는 이재한과 형을 보며 해영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 공기가 마시고 싶었다. 가게 밖으로 나와 술기운을 날려보내고 있을 때였다.
"어색하네."
뒤를 돌아보니 이재한이 서 있었다. 어색하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아주 어색해."
"예?"
영문을 몰라 가만히 이재한을 보았다. 이재한은 품에서 담배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물고 있었다.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번 빤 이재한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마디 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과거, 바뀔 수 있다고."
해영은 놀란 눈으로 이재한을 쳐다봤다. 이 말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였다.
이재한이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박해영 경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