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밴드 연습을 마치고 버스를 탔는데 남자 고등학생 네 명이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앞자리가 비어있었는데 너무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데다 듣기 거북한 욕설을 계속 내뱉길래
가까이 앉기가 꺼려져서 기타가 무거웠지만 그냥 손잡이를 잡고 서있었습니다.
잠시 후 한 여학생이 타더군요. 교복이 다 비슷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중학생 정도로 보였습니다.
뒤가 갑자기 조용해져서 봤더니 그 여학생이 빈 자리에 가서 앉았더군요. 그 아이들의 앞자리에요.
아까까지 그렇게나 떠들어대던 남학생들이 조용해지더니 자기들끼리 뭐라고 속닥거렸습니다.
저는 '녀석들, 그래도 여자가 타니까 이미지 관리 하는건가?ㅋㅋ 귀엽네' 라고 생각했는데..
잠시 후 여학생이 내리려고 일어나서 버스 뒷문 앞에 서자 남학생들도 따라서 일어나더군요.
자꾸만 자기들끼리 킥킥대며 이상한 표정을 짓는게 왠지 불안해서 곁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잠시 후 세 남학생이 여학생의 주위를 둘러싸고 한 남학생이 그 뒤에 밀착하더군요.
그리고는 뒤에서부터 감싸안고 여학생의 가슴에 손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앞에 서있는 사람이 저 혼자였는데 그 장면은 제 각도에서만 보일 것 같았습니다.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면서 여기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고민이 되더라구요..
얼굴은 화끈거리고 가슴은 두근거리고 머리는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제가 뭘 잘못한것도 아닌데 죄책감이 밀려오면서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마음 속으로 발만 동동 구르며 망설이고 있는데 버스가 여학생이 내릴 정류소에 도착했습니다.
남학생들이 모조리 따라 내려서 여학생을 밀고 가다시피 어디론가 가더군요.
버스 뒷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하고 나니까 그제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저씨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치고 뛰쳐나가서 그 아이들에게 달려갔습니다.
달려가는 30초 남짓한 시간동안 별의 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가서 뭐라고 말해야하지..?'
'내가 잘못 본건 아닐까?'
'반항하지 않을까? 분명 반항할테지?'
'혼자서 괜찮을까? 맞게 되면 어쩌지?'
'요즘 애들 무서운데..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날테고..'
'먼저 때려야 하는건가?'
'피어싱을 잔뜩 한 걸 보면 좀 쫄아줄까?'
'그래 피어싱이 잘 보이게 해야겠다'
'기타로 때릴까? 아니야 너무 비싸..'
'기타가 중요한게 아니잖아.. 난 성인인데 전과라도 얻게되면 어쩌지?'
'내가 이런 행동을 할 가치가 있는건가?'
'난 저 여자아이를 알지도 못하는데..'
'오늘 일진 정말 더럽게 꼬였구나'
그 짧은 시간동안 정말 찌질하고 본능적인 걱정들이 잔뜩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여학생의 겁에 질린 표정을 보는 순간 그런 걱정들은 싹 달아나더군요.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떠올랐습니다.
결론은, 다행히 이야기만으로 잘 해결했습니다.
여학생은 감사의 표시로 배꼽인사를 하고 돌아갔고 그 남학생들은..
뭐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만 마주치게 되면 인사 정도는 받게 될 것 같습니다.
의외로 천성이 고약한 아이들은 아니었는데 오히려 그 점이 더 무섭더군요..
요즘 아이들은 불량학생이 아니더라도 성추행을 아무렇지도 않은 놀이 정도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죄책감도 별로 느끼지 않는 것 같았고 성추행이 중범죄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해보려는게 아니라 친구의 '쌀치'인가를 만들려고 그랬다고 하는데 아직도 뭔소린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요?
도대체 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며 가정에서는 어떤 교육을 받으며 자라고 있는 걸까요.
집에 돌아오면서 아르바이트 중인 제 여자친구에게 문자로 일 끝나면 데리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딸아이가 있는 부모님들이나 기혼자분들, 여자친구 혹은 누나나 여동생이 있는 남자분들이라면
이 불안감, 누구나 공감하실겁니다.
정말 씁쓸한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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