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도 시 제 1호
13인의 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적당하오)
제 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 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오감도는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작품이다. 원래는 30회를 목표로 연재를 시작했으나 연재가 시작되자마자 공무국에서는 오감도(烏瞰圖)라는 것은 조감도(鳥瞰圖)의 오자가 아니냐고 물으러 오기도 하고 "미친놈의 잠꼬대냐?", "그게 무슨 시란 말인가", "당장 집어치워라", "그 이상이란 자를 죽여야 해!", "무슨 개수작이냐", "그게 대체 어쩌자는 시냐" 등의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쳐 더 이상 연재를 할 수 없어 15회에 중단되고 말았다. 이 때 조선중앙 학예부장으로 있으면서 오감도의 연재를 기획했던 이태준은 독자들의 항의 때문에 사표를 써서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15회까지 연재를 밀고 나갔지만 더 이상 계속하지 못하고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일화가 있다.
오감도 연재를 마치면서 이상은 "이천점(자신이 쓴 시: 필자 주)에서 30점을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31년 32년 일에서 용대가리를 떡 꺼내놓고 하도들 야단에 배암꼬랑지커녕 쥐꼬랑지도 못달고 그만 두니 서운하다. 깜박 신문이라는 답답한 조건을 잊어버린 것도 실수지만 이태준, 박태원 두형이 끔찍이도 편을 들어준 데는 절한다. 철―이것은 내 새 길의 암시요 앞으로 제 아무에게도 굴하지 않겠지만 호령하여도 에코―가 없는 무인지경은 딱하다. 다시는 이런―물론 다시는 무슨 방도가 있을 것이고 위선 그만둔다. 한동안 조용하게 공부나 하고 따는 정신병이나 고치겠다"라는 "오감도 작자의 말"을 남겼다. 그러나 그것은 발표되지 못했다.
이상 시는 기존 문법을 무시하고 씌어지는 난해한 시로 잘 알려져 있다. 띄어쓰기, 단락구분, 역설, 아니러니, 숫자나 기호의 도입 등 일상적인 언어규범을 무시한 이러한 행위는 당시 봉건적인 질서와 모든 정상적인 가치가 무너진 식민지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 있다. 이상은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언어 질서인 문법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 즉 자신의 삶과 의미를 담아내고 세계의 부조리를 고발할 수 있는 새로운 문법을 창조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상의 행동은 봉건적 질서와 식민지 가치의 의미를 상실한 세계에 살고 있는 시인이 자신의 정체성 상실을 막기 위해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상에게 일상적인 언어 질서로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었고 그것은 기성의 제도와 질서를 대변하는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상 자신의 삶을 구속하고 분열시키는 봉건적 질서나 식민지 가치와 다름이 없었다. 봉건적 질서와 식민지적 가치에 순응하면서 자아의 실현을 기도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일상적 가치를 표현하는 그런 언어로는 자신을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시가 일상적인 국어 문법을 무시했다고 해서 단어나 문자, 기호들을 연결하는 규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상 시는 일상언어의 문법을 파괴한 대신 그러한 결합규칙을 나름대로 창조하여 자신의 의미를 구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흔히 비유되는 정신병자와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이상을 정신병자와 동일시하고 이상의 시를 정신분열증의 소산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인과 정신병자를 혼동한데서 오는 잘못들이다. 일반적으로 시인이 쓴 시와 정신병자가 같은 것처럼 취급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통일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시인이 쓴 시는 정신병자가 쓴 시처럼 단어와 문장들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도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병자의 그것에는 아무런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분열된 정신 상태를 보여줄 뿐이다. 이상 시는 일상언어의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겉으로 보기에는 단어와 문장들이 아무런 연관 없이 뿔뿔이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분열된 것이 아니라 일상언어와는 다른 질서를 통해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분열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이 시를 일상언어처럼 읽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시는 근본적으로 일상언어와는 다른 질서를 가진 언어이다. 그것은 일상언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위에 2차적인 질서를 덧붙여 일상언어를 낯설게 함으로써 질서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언어다.
오감도 시 제 1호는 오감도 15편 중 가장 잘 알려진 시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시는 연재 시작부터 물의를 빚었던 작품이다. 이러한 물의의 원인은 대부분 일상언어와 시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오늘에도 마찬가지다. 이 시에 대해 제기된 여러 가지 빗나간 해설과 억측들은 시가 일상언어와 다른 종류의, 즉 다른 문법질서를 갖는 언어라는 것을 망각하거나 알지 못한 데서 나온 것들이다. 그런 예들 중 하나가 이 시를 시인의 분열증의 결과로 보려는 것이며 다른 것들은 해설이나 추측이 가능한 특정 부분의 의미를 전체의 의미로 판단하는 경우이다. 예를들어 13인이라는 숫자에 대해 조선의 13도를 의미하느니,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예수와 12 제자를 의미한다느니 하는 말이라든가 무서운 무서워하는에 대해 무서운은 일본 순사를, 무서워 하는은 조선사람을 의미한다는 해석등이 그것이다.
이 시는 한편의 영화, 특히 공포영화의 세트처럼 구성되어 있다. 첫 연에서 시인은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는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곧 이어 괄호 속에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는 해설을 집어넣고 있다. 다음 연에서 시인은 제 1의 아해부터 제 13의 아해까지 차례로 나열하면서 무섭다고 한다고 말하며 다시 괄호 속에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라는 말을 집어넣어 하나의 장면을 완성시키고 있다.
그 다음부터 마지막까지는 처음에 제시한 상황 자체를 부정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처음에 시인은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는 상황을 제시했지만 이 상황은 마지막 행에서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 좋소"라는 마지막 행에 의해 부정된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라는 2행 역시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라는 구절에 의해 부정된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 그렇게뿐이모였소"라는 구절은 앞서 "무섭다고 그리오"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무섭다고 그리오"가 "무서워하는"과 "무서운"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 이상의 아무 의미도 제공하지 않는다. 또 그 다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에서 "무서운", "무서워하는"의 구분 자체가 별 의미 없는 것임을 드러내준다. 또 "1인의아해가...라도좋소/ 2인의아해가...라도좋소"에 의해 1인, 2인, 3인 나아가 13인 모두라도 상관이 없으며 따라서 13이란 숫자마저 특별한 의미가 없음을 보여준다. 즉 모든 아이가 무서운 아니라도 좋으며 무서워하는 아이라도 좋다는 뜻이다. 일부 연구자들이 13인의 13이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태도는 이런 점에서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는 무엇인가 제시해놓고 그것을 차례로 부정함으로써 처음 제시했던 장면을 무화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시는 아무 것도 의미하는 바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 시는 분명히 처음 제시한 상황을 부정하고 있지만 부정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무섭다고 그리오"의 공포감이다.
시인은 공포감을 제시하기 위해 처음부터 치밀한 전략을 가지고 세트를 짜고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그 공포감이 특정한 대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 절대적인 공포감, 절대적인 존재의 위기감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즉 이 시에서 세트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일 뿐이지 세트 자체가 이상이 제시하고자 하는 목적은 아닌 것이다. 이상은 독자들이 세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것을 걱정하여 그것을 제거시키는 친절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라"는 첫 장면에서 눈치 빠른 독자는 공포감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해 시인은 친절하게 괄호 속에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라는 구절을 넣음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려고 하고 있다. 괄호 속의 대사는 지문 형식을 갖는 것이다. 그 다음 시인은 제 1부터 제 13까지 숫자를 하나씩 나열함으로써 아이들이 한꺼번에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겁에 질려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씩 뛰어나오는 것처럼 인지시킴으로써 상황을 더욱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놓고 있다. 13인이 한꺼번에 달려가는 것보다 하나씩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장면 자체를 더욱 괴기스럽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러한 나열을 통해 충분히 공포감을 이해하게 되겠지만 시인은 다시 한번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 그렇게뿐이모였소라/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세트를 완결짓고 지금까지의 상황이 공포감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 다음에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 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라는 구절은 다시 처음에 제시했던 상황에 대한 부정이다. 결국 이 시 전체에서 처음에 의도적으로 제시되었던 세트들은 모두 부정되고 공포감만이 남게 된다.
이상이 이 같은 세트를 연출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시에서 제시되는 공포감을 절대적인 공포감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목적으로 판단된다.
이상이 살던 시대는 식민지 시대이다. 식민지 시대 모든 인간적인 가치와 실존적 자유는 박탈된다. 모더니스트 예술가로서 20세기 서구적 자유와 개성을 추구하는 청년 시인 이상에게 당시 봉건적 질서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청년 이상에게 식민지적 가치와 제도, 그리고 19세기적 봉건적 윤리, 질서는 진정한 가치로 생각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가치와 질서 속에서 이상의 자아는 질식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와 배치되는 현실 앞에서 이상은 마치 낯선 이방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상 세계는 이상에게 무감각하고 차가운 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이상은 세계를 벗어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죽음처럼 무감각하고 무의미한 세계 속에 홀로 내던져진 존재로서 이상은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절름발이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느끼는 순간 공포감으로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감도라는 제목도 그러한 죽음의 세계를 그려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이상에게 이 세계는 고독한 까마귀가 바라본 세상, 즉 죽음의 세계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까마귀처럼 이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한번쯤 정독해보아하할듯한 글,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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