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한 달 전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오니 내 이름으로 된 택배 하나가 출입구에 버려져 있었다.
기사님께서 배달을 안 하시고 자꾸 바닥에 찌끄리고 가신다.
월 중순쯤 되면 통장도 탈탈 털리고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린다.
때문에 자잘하게 뭘 지른다거나 하는 등의 사치를 부릴 수가 없는데
그 와중에 배송된 물품이라 의아한 기분으로 박스를 주워들었다.
무게와 부피도 꽤 나가는 게 벽돌 아니면 건축자재 또는 액체폭탄 같았다.
송장에 붙어있는 발송처를 확인하니, 엄헝 이거슨!!!! 하이트 마케팅부~!
주류 회사에서 날아온 맥주 기프트 세트였다.
블로그에다 틈만 나면 맥주~맥주~소주는 잔이 작아~얼굴 겁내 커보이잖아~
맥주로 가~흐자아~(전하, 그것은 비겁한 변명입니다. 커보이는게 아니라 원래 크....)
여튼 포스팅에 죄다 맥주~술~맥주~술타령을 끼적거려놨더니 하이트 측에서
애주가의 탈을 쓴 알콜중독녀에게 맥주 마시고 음주 인생 종지부 한번 찍어보라고 술을 다발로 안겨주셨다.
(아웃뷁 100분 무제한 맥주 이벤트에 참가했던 포스팅을 보고 선물을 보내주셨다고 한다.
매번 카스 라이트만 부르짖었는데 앞으로는 맥스에게도 기회를 줘야겠다.
집에 돌아갈 때 팔이 묵직하긴 했지만 여느 때보다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근길에 올랐다.
는 것은 포스팅 끝맺음의 식상한 마무리고
무겁고 덥고 배고프고 하는 짜증 3종 세트가 치밀어 올라 결국 버스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겨드랑이가 젖으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게 사람 심리 아니겠는가.
버스 손잡이도 잡을 수 없었어. 쫌 젖은 게 아니었거든.
승객도 빡빡하고 차도 밀리고, 버스 안에서 하얗게 불태웠어.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뒤, 휴대폰으로 문자 하나가 수신되었다.
액정에 뜬 문자의 간편 내용을 확인하니 미스터 피자 기프티콘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깜빡거렸다.
이벤트에 응모하거나 그 주에는 딱히 착한 일을 한 적도 없어 아마도 스팸문자일거라 확신하고 수신함을 열었다.
분명 인사말은 ‘미스터 피자 기프티콘 도착~!’ 이래놓고
본문은 ‘고래떼 한번 몰고 가실래요? 바다이야기 바카라~승률 120% 어쩌고저쩌고
접속은 요 사이트로 데헷~!’ 이 용천지랄을 싸겠지.
고래잡이고 뭐고 이 숑키들은 내 손에 걸리기만 하면 비 투더 고자.
별 큰 기대 없이 문자 전문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어게인 엄헝 이거슨!!!! 하이트 마케팅부~!
미스터피자에서 멕시칸 칠리 레귤러 한판 몰고 가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맥주에는 치킨, 치맥이라는 환상궁합에 반기를 들며 피자도 아주 훌륭한 맥주 안주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하이트 측에서 보내주신 것 같았다.
선생님, 세상에서 곡해가 제일 쉬웠어요!
아이 뭘 이런 걸 다~하는 마음으로 집에 가자마자 피자 사이트에 접속하여 냅다 핀번호를 빈칸에 때려넣었다.
아끼고 아끼고 아껴서 나중 돈 떨어져 힘없고 의지할 데 없어지면 시켜먹을까 했지만
수신함과 사진첩을 일주일에 한 번씩 삭제 및 갱신 하는 습관 덕에 분명 핀 번호를 날릴게 뻔했다.
한입 뜯어보지도 못하고 가슴 안에 묻어버리기엔
멕시칸 칠리 너 인마....꽤 맛나게도 생겼더라. 너 내 농노해라.
그리고 오늘, 기사님이 또 택배를 문 밖에다 패대기를 쳐놓고 가셨다.
박스가 세로로 서있었다.
일관성 있는 이 터프한 배달 스타일에 기사님에게 조금씩 관심이 간다.
지금은 월 중순, 역시나 보릿고개 시즌이다. 근래 주문한 물품이 없어 발송처 먼저 살피니,
원몰타임 엄헝 이거슨!!!! 하이트 마케팅부~!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한 달 반 전에 맥주 세트는 이미 수령했는데 전산 문제로 이중 발송 처리가 된 듯 싶었다.
하이트라는 회사를 위해 개인적으로 판촉활동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블로그 상에서 하이트 맥주에 관한 전문적인 포스팅을 올린 적도 없는데(오히려 카스 라이트로 도배)
두 번씩이나 선물을 받고 이번에 또 맥주 박스가 전달되니 지나치게 과분한 처사라고 느껴졌다.
해서 송장에 적힌 마케팅부로 전화를 걸어 물품이 오배송 된 것 같다는 신고를 때렸다.
그러자 담당자님께서 이름을 확인하더니 이내
그것은 네게 보낸 맥주가 맞고 넌 닥치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전해주었다.
지난번에 두 번이나 공짜로 먹고 마셨는데 왜 또 가슴 설레게 맥주를 하사하시냐 되물었더니
하이트에서 운영하는 맥주 관련 블로그에서 내가 파워블로그 명목으로 명단이 올라가있다고 하셨다.
허구한 날, 인생은 언제나 닝기리~~~맥주만 처마셨더니 맥주 블로그에서
‘주류 업계에서 저 냔을 잃는 것은 사업적 큰 손실일 수 있다.
일당백의 효과를 거두는 그야말로 술귀신 같은 냔이니
조금씩 하이트 맥주에 입맛을 길들여 매출을 상승시켜 보는 거다.’
의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맥주를 보내주신게 아닌가 싶었다.
여기까지 곡해에 일가견 있으신 똘짱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여튼 감사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담당자님 계신 곳 향해 배꼽인사를 드렸다.
“똘짱님에게 드리는 거 맞으니까 그냥 계속 받으시면 됩니다.”
아..앙대~눈물이 날 것 같아.
2012년.
퇴근을 두 시간 남겨둔 오후 4시.
푹푹 찌는 무더위에, 찌뿌드드한 노곤함에, 그냥 단순 지병에...
본격적으로 미쳐가고 있을 때쯤 택배 기사님께서 들이닥치셨다.
근래 개인적으로 주문한 물품이 없으니 당연히 회사 택배일거라 생각하고
접견용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평소에는 내것, 네것 정확히 따져보는 편이지만
그날은 만사가 성가셔 수취인도 확인 않고 곧장 퇴근길에 올랐다.
그리고 다음날, 전날 접견 테이블에 올려뒀던 택배상자가 내 영역으로 넘어와 있었다.
선을 넘었으니 이건 무조건 내끼야! 오배송건이라 해도 얄짤없어!
설레는 마음에 인중을 길게 늘리고 운송장 라벨을 확인했다.
굳이 강제로 취하지 않아도 수취인명에는 내 이름 석자가 떡하니 박혀있었다.
반사적으로 발송인명을 훑으니 엄헝, 원써겐 하이팅 마케팅부.
연일 지속되는 폭염에 옥탑방에 거주해 있는 독거노인,
열사병으로 디질까 우려하여 하이트측에서 갈증 해소차원으로 음료를 보내주신 듯 했다.
알콜 성분이 소량 함유되어 있는 놈으로다가.
큼지막한 택배 박스를 가르자 그 안에 또 다른 상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를 하나하나 가를 때 마다 계속해서 작은 상자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최종적으로 반지케이스만해진 상자의 뚜껑을 열었는데
짤깍거리는 포춘쿠키 하나가
‘지금이야 말로 한층 더 일해야 할 때입니다.’
이딴 점괘나 찌끄리면서 열사병에 홧병까지 얹어주는건 아니겠지.
러시아 전통인형 마트로시카 돋는 포장법이 아니길 빌며
다시 한 번 박스면의 테이핑을 뜯어냈다.
다행히 또 하나의 상자가 나오는 대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렬된 캔맥주와 카드 한 장과 함께 나를 반겼다.
야구공 박음질 패턴에 각각 유명 구단주의 심볼마크로 치장한 다섯 개의 캔은
사실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내겐 별 감흥없는 디자인이었지만,
‘술’이라는 본질에 초점을 맞추고 무한감동에 휩싸였다.
맥주라곤 하이트의 라이벌격인 OB맥주만 마셔대는 카스 라이트파인데
잊을만하면 하이트에서 맥스를 패키지로다가 안겨주시네.
이런 은혜에 보답하려면 빠른 시일 내에 하이트파로 소속을 옮겨야하는데
그놈의 33% 칼로리 다운이 뭔지, 당최 다른 맥주에는 손이 안가 문제다.
물론 그렇게 칼로리에 신경 쓰는 인사라면
애초에 술 자체를 금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겠지만
또 그 정도로 쩔쩔매는 건 아닌지라 참.....우에야 할꼬~
퇴근길에 인근 쌀국수가게에 들러 스프링롤 한줄을 포장해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상자에서 알맹이만 쏙 빼내 냉동고에 넣어놓고는
난장이 된 집안을 치우고, 땀으로 끈적끈적해진 몸을 씻고,
어김없이 푸른산호초 컨셉으로 방에 들어와 또랑이를 안아들고 선풍기 앞에서 블루스 한판 좀 땡겼더니
금세 한 시간이 흘렀다.
포장해온 스프링롤과 캔맥주를 컴퓨터 앞에 셋팅하고 에어컨 전원을 올렸다.
즐겨보는 영화 한편을 모니터에 띄우고는 살얼음이 낀 맥주를 홀짝홀짝 들이키고 있으려니
정말이지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음정이 불분명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을 까닥거리다
문득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난 황송함에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그리곤 송장에 붙어있던 발송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취기로 알딸딸해진 발음이 조금 부끄러워 부러 목소리에 힘을 실어
조금은 딱딱한 뉘앙스로 입을 열었다. 목구녕에 차도녀를 끼얹었음ㅋㅋㅋㅋ
-이번에 맥주 패키지를 받은 고객입니다. 마케팅부 담당자 좀 부탁드립니다.
-여기는 발송만 담당하는 출고지라 바로 통화는 어렵습니다.
성함과 전화번호 말씀해주시면 담당자에게 전달하여 직접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바로 좀 부탁드립니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담당자를 찾는 내 요구에 상대는 클레임건으로 오해를 하신건지
조금 긴장한 음색으로 응대를 하셨다.
그리곤 두 시간 후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즈음의 내 상태는.....시동을 걸고 있었다. 꽐라의 세계로 향한ㅋㅋㅋㅋ
선물로 받은 캔맥주들은 이미 빈깡통으로 전락한지 오래였고,
냉장고에 쟁여둔 패트병을 두통째 개봉하여 모니터를 상대로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느닷없이 울린 전화벨 소리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그래봤자 혀는 이미 취기에 돌돌 말려있었지만
최대한 맨정신 상태의 음성을 이끌어내 입을 열었다.
자신을 마케팅부 담당자라 소개한 직원에게 대뜸,
-맥주 패키지 셋트 잘 받았습니다. 수차례 받기만 하다 보니 괜히 죄송스럽네요.
멀쩡한 발음으로 감사함을 전했다. 하지만 대화 중에 돌돌말려있던 혀가 슬금슬금 풀리면서
-넘무~고마워서요오~아이구~매번 괌싸합니드아~전에도 보내주고,
또오~보내주고~피자도 보내주고~컵도 보내주고~으흥흥
아, 맞다. 맥스 마싰네요오, 정말 잘 마셨으요~으흥흥흥흥~
감사인사는 주접스런 주사로 변질되었다.
수식어만 이래저래 바꿔 근 30초가량 고맙다, 맛있다, 감사하다, 하이트 할렐루야!
찬양을 해대다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통화를 마쳤다.
술에 취해있어도 내 정신은 회전문 시스템이라 수시로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ㅋㅋㅋ
2분도 채 안 되는 통화였지만 뭔가 주책없고 괜히 뻘짓거리한 기분이 들어
앉은 자리에서 머리를 좀 쥐어뜯었다.
담당자 연락 요청에 심각한 사안으로 알고 수화기를 들었을 직원은
이 실없는 통화를 마치고 뭔 생각을 했을까.
외로우면 060에다가 걸라고~이웬수야! 뭐 이런 생각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