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옵션 |
|
아버지는 나와 같은 찬란한 금발을 가졌다고 했다. 너무 어렸을 적 기억이라 나는 아버지의 외모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형은 언제나 ‘아들 둘이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고 했다. 내가 15살 생일이 되던 무렵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거의 완벽하게 겹쳐 보인다고도 했다. 둘째 아들은 첫째보다 아버지를 더 많이 닮는다는 속설이 정말 맞는 걸까?
아버지는 어둑시니 부족의 족장이자 타르모의 역사학자였다. 부족장인 것은 당시에도 알았지만 역사학자였다는 것은 최근에야 발견한 아버지의 저서 몇 권을 발견하기 전까진 몰랐다. 책에 표기해 두신 연도로 계산해 보면 아마 부족장을 맡기 전, 10대 중후반 즈음부터 결혼 전까지 전 대륙을 떠돌며 자료를 수집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의 저서 중 한 권은 제 가방 속에 있어요. 발견 당시엔 사본도 없던 데다가 보존 상태도 좋지 않아서 급하게 베껴 썼죠. 총 다섯 권 있던 저서는 전부 사본을 세 권씩 만들었어요. 한 권은 학자들의 도시에, 한 권은 로하드리아 왕실 도서관에, 그리고 원본과 사본 한 권은 제게 있습니다.”
“솔직히 책은 흥미가 없지만 내용은 궁금하군. 무슨 내용의 책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역사책이죠. 정확히는 소설이나 여행기를 빙자한 역사책. 로하드리아 건국 초창기와 타르모 건국사에 관한 대략적인 내용을 담은 책들입니다. 정확한 물증은 별로 없고 대부분 추측에 근거한 내용이긴 하지만, 앞뒤가 정확히 맞으니 증거를 찾는 게 제 일이겠죠.”
“…그렇군.”
“아, 앤에게 고생을 시키진 않을 거예요. 안심하세요.”
“하하하, 그래.”
아버지는 상당히 실력 있는 검사였다. 타르모의 검투장에서 선수로 뛴 적은 없기 때문에 공식 기록에 등장하진 않지만, 어둑시니는 검술 실력으로 부족장을 뽑기 때문에 어둑시니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였음은 분명하다.
“어둑시니의 최고 검사가 전 세계에 먹히는 상당한 실력의 검사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이쯤 해서 어둑시니의 능력을 설명해야겠네요.”
“능력?”
아저씨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아저씨에게 다가가며 웃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졌다. 윽, 해가 지니 기온이 꽤 내려갔네? 아직 여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닥불 쪽과 반대쪽의 온도차가 확실히 느껴진다. 나는 아저씨에게 잘 보이도록 돌아서서 허리께를 가리켰다.
“여기 보이세요?”
“음…. 그건 점인가? 점은 아니군. 뭐지? 모르겠네.”
아저씨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선 노려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연히 처음 보는 것일 테지. 나는 허리춤의 검은 얼룩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건 악점惡點이라는 건데요, 어둑시니 부족의 핏줄을 가진 사람들에게 전해져 오는 능력이에요. 이렇게 한 번 툭툭 쳐 보세요.”
“…뭐지, 이건? 마치 잘 말린 가죽 같군. 가죽 갑옷 같은데?”
악점을 톡톡 건드려 본 아저씨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옷을 주워서 걸쳐 입으며 아까 있던 곳으로 돌아가 앉았다.
“이 악점은 피를 마시면 활성화 시킬 수 있어요. 똥 쌀 때 배에 힘주는 것처럼…. 비유가 조야하지만 가장 잘 맞는 느낌이니까 양해해 주세요. 어쨌든 피를 약간이라도 마신 뒤에 그런 식으로 이 악점에 힘을 주면 악점을 번지게 할 수 있어요. 웬만한 몽둥이찜질은 간지러울 정도로 피부가 단단해지기도 하지만 진가는 그 속에 있죠.”
“속이라. 근육을 말하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근육이 폭발적으로 강화됩니다. 부작용이 매우 심해서 어지간하면 쓰지 않는 능력이지만, 목숨이 위험할 때 죽는 것보단 나은 선택이 되겠죠. 상반신을 악점으로 덮어버리면 쇠몽둥이로 바위도 가루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근력이 강해져요. 물론 악점에도 사람마다 격차가 있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온몸을 다 덮는다, 이런 건 보통 불가능하지만요.”
“강한 힘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지.”
아저씨는 자신의 오른팔 소매를 힐끗 보며 말했다. 맞는 말이야. 무력, 권력, 언변이나 장인 기술까지도 다 대가를 지불하고 얻는 능력이다. 나는 괜히 허리춤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맞아요. 악점 활성화의 대가는 활성화를 해제했을 때의 강렬한 고통, 그리고 감각 상실, 노화 가속 등이 있어요. 그러고보니 ‘중독’의 부작용과도 일부 공유하는 부분이 있네요. 어쨌든 신체를 강화시키는 능력은 진짜고, 아버지는 그 능력을 사용하는 전사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남자였어요.”
“젊었을 적 나라면 한 번 붙어보고 싶었겠지만.”
아저씨는 껄껄 웃었다. 나는 그런 아저씨를 마주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저는 허리춤에 악점이 있어서 손이나 발끝으로 보내려면 상당히 많은 요령이 필요하지만, 아버지의 악점은 오른팔 어깨 부근에 있었다고 하네요. 그런 점도 다 부족장이 되는 데 도움이 됐겠지요.”
“그래. 아무리 고통스러운 부작용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이기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으니.”
그래, 아버지는 어쨌든 부족장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훌륭하게 살아남았다. 어릴 때 딤이라고 불렸던 소년은 여행을 마치고 부족의 울타리 안으로 돌아와 그래드 씨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어둑시니 부족 안으로 돌아온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아 디믹 그래드는 어둑시니의 새로운 부족장이 되었다.
“그렇다면 부족장이 되기 위해 돌아온 건가?”
아저씨의 질문은 꽤 날카로운 구석이 있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왜 돌아오셨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의 저서 중 하나에 ‘부족의 뿌리를 들춰 보았고, 숙고 끝에 다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라는 구절이 있긴 했어요. 그런데 다른 언급은 없어서 뭔가 있었다는 추측만 할 뿐 확실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어요.”
“그렇군. 전 대륙을 직접 돌아다닐 정도의 의욕을 가진 사람이 소규모 부족의 우두머리를 맡기 위해 다시 돌아오는 건 이해가 안 되었기에.”
“뭐…. 그렇죠.”
디믹 그래드가 좋은 리더였는지 나쁜 리더였는지는 남은 기록이 없기에 가릴 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젊은 부족장이 부족 내 원로들의 반발을 샀다는 것이고, 결국 암살당했으나 부족도 같이 와해되었다는 것.
“부족장을 살해한 뒤 부족이 같이 와해되었다고? 이해할 수 없군. 비슷한 규모의 적대 세력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아저씨도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육포를 입에 털어 넣고 씹기 시작했다. 그 표정이 매우 흡족해 보였기 때문에 맛있냐는 질문은 미소와 함께 삼켜버렸다.
“어둑시니는 당시 3백여 명의 규모였다고 해요. 타르모 남동쪽에서도 끝자락에 위치한 자치령 발티비아 근처에서 머물던 부족이었죠. 신체가 탁월하게 강했기에 부자 도시 근처에서 상인들 짐 보따리를 약탈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자치령 발티비아라면 타르모에서 유일하게 풍조한 지역이로군? 그곳의 상인들은 발티비아 산하의 상비군에게 보호받는다고 들었는데. 겨우 삼백 명 남짓한 부족이 그들을 건드렸다간 무사하지 못했을…. 아.”
아저씨는 말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세계 지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금방 유추 가능한 사실이다.
“맞아요. 발티비아는 붉은 사막과 직접 닿아있진 않지만, 사이를 가로지르는 바다의 폭이 짧은 탓에 괴물들이 상당히 자주 날아오죠. 아마 그 덕을 본 듯 싶어요. 상인들의 시체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괴물들의 시체를 한두 마리 쯤 던져두면 상인 습격은 영락없이 괴물 떼의 소행이 되는 거죠. 그 이후에 땅에 널브러진 재물을 가져가는 것은 누구든….”
아저씨는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험하게 살아 온 아저씨가 이런 이야기에 저렇게 놀라나? 아저씨는 입맛을 쩍 다셨다.
“어제 말해줬던 얘기지만, 사막의 괴물들이라면 나도 국경 도시 히그에 머물 때 많이 상대해 봤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어. 당시 나는 중독을 갖고 있진 않았지만, 몇몇 놈들은 화살조차 튕겨낼 정도로 강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웬만큼 경험이 쌓인 베테랑 병사라도 일대 일로 싸우는 건 거의 불가능해. 참, 이런 계산법이 있었지. 병사 한 명의 몸집을 가진 괴물은 병사 셋이 상대한다.”
“아…그것 때문에 놀라셨군요. 괴물은 많이 보지 못했지만, 보통의 괴물은 사람 셋을 합쳐 놓은 크기라면서요?”
아저씨는 과거의 책장을 넘겨다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많이 본 얼굴이군.
“그래. 병사들을 아홉 명 묶어 한 개 분대로 편성한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그런데 그런 괴물들을 죽여서 들고 다니고, 그 상태로 또 상인들을 습격하다니. 삼백 명의 집단이 전부 그렇게 몰려다니진 않았을 텐데.”
“맞아요.”
당시 어둑시니 부족에 속한 사람은 삼백여 명. 그 중 어둑시니의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오십 명이 채 안 됐다고 한다. 여성은 어둑시니의 피를 이었어도 악점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고, 노인과 아이를 제외한 청장년 남성들 중에서 악점이 이상한 위치에 있거나 악이 적어 사용하기 힘든 자를 또 가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건 전적으로 내 추측이지만, 아마 오십여 명 중에서 상시 활동하는 인원은 열댓 명 안팎으로 맞추지 않았을까 한다. 사막의 괴물들이 날개가 달렸다고 항상 바다를 건너오진 않았을 테니 사막으로 직접 들어가 괴물을 잡아오는 경우도 있지 않았을까? 실제로 발티비아 외곽과 붉은 사막 사이의 바다는 조각배를 타고도 건널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하고, 괴물의 시체는 토막 내서 운반했을 테니 큰 배가 필요하지도 않았을 거다.
“배 한척 분량의 괴물이면 많아야 한두 마리군. 그 정도 품을 팔아서 쓸 만한 짐수레 두세 대를 약탈할 수 있다면야.”
“사실 한 마리 전부도 필요하진 않았을 거예요. 값비싼 물건을 실은 짐수레일수록 많은 호위가 붙으니까. 스무 명이 호위하는 수레를 공격한 뒤 괴물의 꼬리 일부와 핏자국을 남겨 둔다면 괴물은 살아서 돌아갔다고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과연. 그 후엔 발티비아에서도 괴물을 토벌하기 위한 원정대만 백여 명 동원해서 순찰 시킬 테고, 당연히 그 누구도 발티비아로 오가는 상인을 도적떼가 덮쳤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겠지.”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런데 어떤 얘기를 하다 여기까지 왔더라? …참, 아버지 얘기였지. 이런. 이래서야 이야기가 엄청나게 오래 걸리겠군. 상관은 없지만.
“다시 아버지의 얘기로 돌아갈게요. 원로들의 반발을 샀다고 해서 그게 곧 죽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을 겁니다. 끽해야 삼백 명의 집단에서 원로라고 해 봐야 늙은이 대여섯 명이었겠죠. 그들은 물론 부족 내에서 가장 강하고 젊은 전사를 당해 낼 수 없었을 겁니다. 부족장이 암살을 당했을 정도의 원인이라면 부족 내 대다수의 반발, 혹은 다른 부족장 후보의 쿠데타 정도겠죠.”
“그렇군. 늙은 뱀들은 앞에 나서길 싫어하기 마련이니.”
“그 날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워낙 어렸을 때였고, 저는 형이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까지도 별 일 아닌 줄 알았거든요.”
여름 무렵이었다. 내가 다섯 살, 형이 여덟 살이었으니 형의 생일인 8월 19일이 지났을 것이다. 형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자주 사냥을 데리고 나가곤 했다. 어렸을 적부터 체내 악의 용량이 무척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시엔 악은 어쨌든 몸에 오래 쌓아 두어 좋을 것이 없어서 정기적으로 빼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고, 악을 빼는 방법은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악점을 통해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같이 오른팔 어깨에 악점이 있는 형 스캇은 타고난 성격도 호전적이라 사냥을 즐겼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형의 어린 몸에 무리가 많이 가지 않도록 악점을 크게 늘이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했다.
하지만 형은 그런 제약을 받으면서도 독보적인 속도로 성장했고, 여덟 살 무렵에는 이미 성인 어른과도 대련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아버지에게 무술을 직접 배웠다고 할지라도 겨우 여덟 살. 아주 기초적인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신체 능력이 그만큼 탁월했다는 것이다.
“전사의 핏줄은 떨어져 살아도 한 눈에 알아본다고들 하지만, 부족 내 최고 천재의 아들이 또 최고의 천재로 자라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지.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은 기사의 아들이라도 아버지의 명성을 그대로 잇긴 힘든 법이야.”
“어쨌든 형의 존재는 반대세력에겐 눈엣가시였을 테죠. 형이 열다섯만 되어도 바로 아버지의 든든한 오른팔이 됨과 동시에 2대째의 유력 후보로 부상했을 테니까요. 소규모 부족 내의 2대 세습은 반대파의 상당한 몰락을 의미하지 않겠어요?”
아저씨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한숨을 푸우 내쉬었다.
“부족의 규모는 상관없어. 인간들은 다 조막만한 권력일지라도 남보다 더 가지려고 어떻게든 발악하는 존재야. 다들 대놓고 챙기면 반발을 사니 뒷공작을 하지만, 그게 들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신뿐이지. 멍청하기 짝이 없어.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은 바로 그걸 의미하는 것이네.”
“맞는 것 같네요. 아버지는 정치판 읽기엔 그리 능하지 못했던 듯 싶어요. 아버지가 본심을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어떤 강수를 두었을 테고, 그건 반대 세력을 집결시켜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는 불씨가 되었겠죠.”
그 날, 형은 피투성이에 표정까지 사색이 되어서는 집 근처 풀밭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나를 데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풀밭은 낭떠러지 바로 앞에 있는 조그마한 바위 아래였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 나만의 비밀장소였기에 나도 무사할 수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여느 다섯 살처럼 집에 있었을 터였다. 그랬다면 내 인생은 다섯 살 때 끝났겠지.
형은 나를 데리고 최대한 조용하면서 신속하게 움직였다. 매번 아버지와 사냥을 나갈 때 봐두었던 샛길이 있었는지 형은 능숙하게 길을 찾았다. 운도 따랐는지 발티비아 밖으로 완전히 나설 때까지 우리 형제를 발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나는 형의 모습도 무서웠고, 배고픈데다 풀벌레들도 많은 숲이 어두워지기까지 하자 상당히 많이 칭얼댔던 것으로 기억한다. 형은 형대로 나를 달래려고 애썼지만 아버지가 죽었을 것이란 말은 할 수 없었을 거였다. 형이 잡아다 손질한 작은 동물들과 함께 과일을 먹었지만, 생고기는 맛이 없었고 과일은 너무 시어서 거의 못 먹었다.
그런 식으로 사나흘을 도망치자 형도 나도 완전히 지쳐버렸다. 게다가 아이 둘의 속도는 어른에 비하면 너무나도 느렸고, 형은 숲속을 지나간 흔적을 지우는 법도 잘 몰랐다. 발티비아 서쪽, 국방 도시 히그로 통하는 숲을 채 빠져나가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는 첫 번째 추적자를 마주쳤다.
“아직도 기억나요. 드디어 발견했다는 그 표정이. 그 사람은 제가 책을 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욕을 하던 아저씨였는데, 웃는 모습이 정말 역겹게 생긴 놈이었어요.”
나는 입 양 끝을 손으로 치켜 올리며 눈썹을 모아 기괴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아저씨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내 잘생긴 얼굴을 암만 구겨 봐야 그 토악질 나는 면상을 재현하진 못하겠지만.
“나중에 들은 건데, 형도 그 때 처음으로 악점을 한계까지 늘였다고 했어요. 저는 그 이후로도 그렇게 무서운 형의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어요. 상대도 여덟 살 꼬맹이가 해 봐야 얼마나 하겠냐는 생각으로 한껏 방심하고 있었겠죠. 형은 그날 처음으로 손에 사람 피를 묻혔다고 했어요.”
그 놈은 방심도 방심이지만 제대로 싸울 생각도 하지 못했다. 형의 손에 아버지의 손칼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손칼은 일국의 왕이라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부족 내에선 물론이고 발티비아를 통틀어서도 그만한 값어치를 지는 물건은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고작 손칼 하나가? 칼날에 다이아몬드를 빼곡하게 박아도 그 정도 가치는 못할 텐데. 혹시 ‘중독’과 같은 전설의 무구였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까 소시지를 잘랐던 손칼을 꺼내 보였다.
“그냥 손칼이에요. 아무 능력이나 전설도 얽혀 있지 않은 손칼. 하지만 그 재질에 비밀이 있어요. 바로 용철龍鐵이죠.”
“용철? 용만이 채취하고 재련할 수 있다는 신비의 금속 말인가?”
“맞아요. 바로 이거예요.”
아저씨는 내 손 안에서 빙글 도는 손칼에 시선을 잠시 빼앗기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용철로 만든 무구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네. 용은….”
“용은 무기가 필요하지 않으며, 따라서 만들지도 않는다.”
나는 아저씨의 말을 가로채곤 씩 웃었다.
“맞아요. 용철로 만든 무구는 존재하지 않아요. 이거 말고는. 용들이 왜, 무슨 변덕으로 이런 걸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거 하나는 이렇게 실존하니…. 뭐 다른 설명이 필요하겠어요?”
그 역겨운 놈은 분명 최후의 순간까지 아버지가 들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용철 손칼을 여덟 살짜리가 들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눈이 돌아갔다. 놈은 악점을 늘일 생각조차 않은 채 형에게 달려들었다. 영악하게도 손칼을 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겁먹은 척을 하던 형은 놈이 몸을 굽힌 순간 펄쩍 뛰어선 그 목을 깊게 베어버렸다.
사람 몸에서 그렇게 많은 피가 솟구치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나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굳어버렸고, 형은 새로운 피가 덧씌워진 얼굴로 나를 들쳐 맨 채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리자 샘이 보였어요. 아마 악이 아니었다면 여덟 살짜리가 다섯 살을 업고 그렇게 오래 달리진 못했겠지만, 악의 힘을 빌었다고 해도 형은 엄청나게 지쳐 있었죠.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던 형은 제가 물을 떠다가 천천히 먹여주자 간신히 숨을 고를 수 있었어요. 몸도 몸이었겠지만 마음도 상당히 지쳐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제일 문제였던 건 지친 몸도, 솟구치는 피를 본 마음도 아니었어요.”
“부작용.”
아저씨는 혀를 쯧 차며 나지막이 말했다.
-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