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6일 11:03 강원도 인제군
"흰둥아!"
"예! 이병 이환동!"
"이 시키, 똑바로 못해? 자, 요요요! 이리 온~"
예비군 한 명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이환동을 강아지 부르듯 했다.
내무반 침상 위에 늘어져 그 광경을 지켜보는 예비군들이 낄낄댔다. 이
환동은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 듯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헥헥거렸다.
"시정하겠습니다! 강아지 흰둥이!"
22사단에서 GOP에 투입됐다가 첫날 큰 피해를 입은 중대는 며칠째
후방 지역에서 재편성을 하고 있었다. 소대는 손보요원으로 들어온 동
원예비군들이 거의 채우다시피 했다. 그리고 훈련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소대원들은 내무반에서 쉬고 있었다.
중대에 현역보다 예비군들이 훨씬 더 많으니 현역 기간요원들은 옴짝
달싹하지 못했다. 그런데 특히 이환동 이병은 예비군들에게 꽉 잡혀 꼼
짝 못했다.
"다른 데 놈들은 전투중인데 너는 안전한 데서 노니까 어때?
"선배님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헤헤~"
"이게 감히 까불어? 이눔시키!"
예비군들이 내무반 침상에 걸터앉은 이환동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
환동은 뭐가 좋은지 계속 웃기만 했다.
"이병, 흰둥이. 헤헤."
"자, 손."
"헤헤."
이환동이 강아지처럼 두 발을 예비군 손 위에 올렸다.
"우헤~ 이놈 정말 또라이 아냐? 잠 잘 때 비명만 안 질러대면 귀여울
텐데 말야."
"선배님들, 너무 하십니다."
김재창 상병이 판초우의에서 빗물을 줄줄 흘리며 내무반에 들어섰다.
그 뒤로 예비군 한 명이 따라 들어왔다. 외곽 경계초소에서 교대하고
오는 길이었다. 머쓱해진 예비군들이 자리로 돌아갔다.
"제 정신도 아닌데 선배님들이 도와주셔야지, 장난이나 치면 되겠습
니까?"
"미쳤으면 통합병원에나 보낼 것이지, 뭐하러 여기서 잡고 있어?"
이환동을 놀려대던 예비군 하나가 툴툴거렸다. 첫날의 전투 이래 이
환동은 시간이 갈수록 정신이 이상해졌다. 자다가 비명을 질러대고 밥
먹다가도 식탁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점점 정상으로 있는 시간이 줄어
들었다.
그러나 중대장은 이환동 이병을 군 병원으로 보내지 않았다. 첫날 중
대원들의 인명피해가 막심했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환동은 증세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이환동에게 총을 맡
기기도 무서울 정도였다. 그래서 조금 전에도 이환동 대신 김재창이 근
무를 섰다. 김재창은 싫은 기색도 없이 이환동을 보살폈으나 이환동의
존재 자체가 거슬리는 예비군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환동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어 예비군들의 불만이 쌓이고 쌓인 것이다.
"야! 이환동 이 자식아!"
판초우의를 벗은 김재창이 이환동을 감싸 안았다. 불쌍해서 견딜 수
없었다. 헤헤 웃던 이환동이 갑자기 표정이 변했다.
"김 상병님!"
"그래! 정신 좀 들어?"
김재창이 얼굴을 보니 이환동은 공포에 얼어붙어 입술이 파르르 떨리
고 있었다. 이환동을 부둥켜 안은 김재창은 가슴이 쓰렸다. 이환동이 김
재창을 보면 적과 전투를 벌이던 때가 생각나는 모양이었다.
"야, 임마! 제발 정신 차려!"
이환동이 갑자기 김재창을 밀치며 벌떡 일어났다.
"충성! 이병, 이! 환! 동!"
내무반에 있던 예비군들이 이환동이 하는 짓을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
았다. 하루에도 서너번씩 지겹게 있는 일상사였다.
"적이다! 김 상병님! 위험해요!"
이환동은 어쩔 줄 몰라했다. 갑자기 바닥에 엎드리는가 하면 총을 들
고 적을 향해 쏘는 자세를 취했다. 물론 그에게 총은 없었다. 군기 빠진
듯한 예비군들도 이환동에게 총을 주면 위험한 줄은 알고 있었다. 내무
반 총가에 자물쇠까지 채워진 유일한 소총이 이환동의 K2였다.
한참 좌충우돌하던 이환동이 침상 위로 뛰어올랐다. 관물대 앞에는
조금 전에 김재창과 함께 경계근무를 서고 돌아온 예비군이 벗어놓은
엑스밴드가 있었다. 내무반에 있던 사람들 눈에 밴드에 달린 수류탄이
크게 들어왔다. 이환동은 그곳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안 돼!"
김재창이 외치는 순간에도 이환동의 오른손이 왼손에 쥔 수류탄 안전
핀에 가까워졌다. 내무반에 있던 사람들 절반은 얼이 빠져 이환동의 손
을 멍청히 보고 있고, 나머지는 내무반을 빠져나가려고 비명을 지르며
문을 향해 뛰었다. 안전핀에 손가락이 걸렸을 때에야 예비군 두 사람이
이환동을 덮치려고 달려들었다.
- 땅!
내무반 가득 총소리가 울렸다. 침상 구석에 처박힌 이환동의 눈이 커
다랗게 떠졌다. 가슴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이환동이 입가에 희
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옆으로 쓰러졌다. 안전핀은 뽑혔지만 이환
동은 죽어서도 수류탄을 꽉 쥐고 있었다. 하얀 눈자위가 드러난 눈이
침상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환동 바로 옆에 있던 예비군 두 명이 털썩 주저앉았다. 예전에 군
대에서 자주 발생했던 흔해빠진 내무반 사고가 자칫 재연될 뻔한 순간
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얼이 빠진 채 이환동을 지켜보던 예비군들이
시체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우뚝 서 있는 병사가 있었다. 총구를 내린 김재창 상병 눈에
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6월 17일 19:25 강원도 인제군
국군 16사단은 1038고지에서 인민군 13사단의 맹렬한 공세를 두 번
에 걸쳐 막아냈다. 하지만 3차 공세에서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
후 국군 16사단은 계속 밀리고 밀려 칠절봉을 내주고 매봉산 주변지역
까지 3킬로미터나 후퇴해야 했다.
오후 3시경에 진부령 동쪽에 있는 해발 1,051미터의 마산이 인민군
145독립보병여단의 파상 공격에 점령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
도 46호선의 목이라고 할 수 있는 진부령은 양쪽 고지로부터 협공받는
위기에 처했다. 국군 16사단 지휘부는 진부령 일대에 포진한 24연대가
포위될 위험에 처하자 즉시 철수를 지시했다.
그러나 인민군의 공격속도는 국군 지휘부의 예측을 앞지르고 있었
다. 소수이긴 하지만 인민군 선두부대 중 일부가 이미 연화동 계곡을
통해 깊숙이 들어와 46번 국도를 차단했다. 24연대의 퇴로가 가로막힌
것이다. 퇴로가 막혔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연대 전체로 퍼졌고, 병
사들의 불안감은 급격히 높아졌다.
국군이 확보하고 있는 용대교 부근까지 이르는 길은 약 2킬로미터
가 남았다. 24연대는 이 골짜기 길을 강행돌파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길 양쪽 산에 포진한 인민군들에게 집요한 공격을 당해 큰 피해를 입
었다. 갑자기 기관총을 퍼붓고 달아나기도 하고, 박격포로 공격하기도
했다.
그외에도 인민군 정찰병들이 숨어서 포격을 유도했다. 정확하게 한
두 발씩 떨어지는 대구경 포탄에 국군은 큰 피해를 이벙ㅆ다. 상황이 이
렇게 되자 조직적인 철수는 헛말이 되고 말았다. 국군 24연대의 진부
령 철수는 패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시커먼 하늘에서 쉬지않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도보로 철수하는
국군 병사들은 빗물에 흠뻑 젖었다. 그들은 진부령에서 용대리 방면으
로 철수하는 국군 16사단 24연대 병력이었다.
24연대 병력은 인민군 포위망을 악전고투 끝에 강행돌파하는 데 성
공했다. 모든 장비를 파괴하고 몸만 간신히 탈출하는 상황이었다. 판
초우의를 걸친 병사들도 있고 그냥 전투복만 입고 있는 병사들도 많았
다. 일부는 철모마저 제대로 쓰지 않고 있었다. 병력은 진부령을 떠날
때에 비해 상당히 줄어들었다. 병사들은 길 양쪽으로 길게 줄지어 남
쪽으로 걸어갔다. 부상병들이 상당수 섞여 있어 행군속도가 느렸다
-씨우우웅~ 쾅!
포탄 한 발이 도로 왼쪽 바위언덕에 떨어졌다. 깨진 돌 조각들이 도
로까지 굴러왔다. 주변에 있던 나무들도 충격에 부러지며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
"포격이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해!"
소대장쯤 되어 보이는 국군 중위가 고함을 질렀다. 중위는 머리를
다쳐 붕대로 이마를 감싸고 있었다. 주변에서 그 고함을 들은 병사들
이 달리기 시작했다. 포탄이 다시 날아와 아까보다 100미터 정도 남쪽
에 있는 오른쪽 언덕으로 떨어졌다.
병사들의 달리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세 번째 포탄 한 발이 도로
가운데에 떨어지면서 아스팔트 조각들을 사방으로 날렸다. 근처에 있
던 병사 7명이 폭발에 휘말려 갈기갈기 찢어졌다. 포탄이 떨어진 아스
팔트 도로 위에 1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구덩이가 파였다. 구덩이 주
변은 피범벅이었다. 포탄은 주변에 계속 떨어졌다.
"내 팔! 내 팔이 어디 갔어?"
"우아악~ 앞이 안 보여!"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피바다 속에서 허우적대던 부상병들이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질러댔다. 부상당한 동료를 양쪽에서 부축해 가다가 세
명이 한꺼번에 포탄에 날아가기도 했다.
"날 버리지 마! 제발 같이 가!"
부상병들은 상처보다 적지에 혼자 버려지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공포에 질린 사병 한 명이 부축하던 동료를 버려두고 도망갔다. 그러
자 선임하사가 달려가 뒤에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선임하사는 일
어서는 사병의 멱살을 잡고 뺨을 한 대 세게 후려갈겼다.
"야,이 겁쟁이 새끼야! 전우를 버리고 혼자 도망가? 부상당한 전우
를 버리면 네놈이 부상당했을 때 누가 도와줘? 누가?"
두 눈을 부릅뜨고 멱살을 뒤흔드는 선임하사의 눈을 바라보던 사병
이 고개를 돌렸다. 선임하사는 멱살 잡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어서 가서 업고 와! 안 그러면 내가 쏴버릴 테다. 어서!"
사병이 훌쩍거리며 부상병에게 걸어갔다. 그의 등뒤로 선임하사가
외쳤다.
"나도 무섭긴 마찬가지란 말야, 젠장!"
앞서 가던 대열에서 소리쳤다.
"아군이다! 아군이 보인다."
"아군? 어디?"
지쳐가던 국군 병사들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남은 힘을 다
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잘려 덜렁거리는 동료를 업고 이를 악물
며 뛰는 사병도 있었다. 눈을 다쳐 미라처럼 붕대를 감은 병사도 동료
들의 손에 이끌려 뛰기 시작했다.
"진짜…… 아군이다!"
"안 보여. 진짭니까? 아군 맞습니까?"
"그래, 임마!"
동료가 대답하며 얼굴 전체가 붕대로 감겨 입만 밖으로 삐져나온
부상병을 끌어안고 웃었다
"우린 살았어! 우린 살았다고!"
-김경진, "남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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