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좋아했다.
너무너무 좋아했다.
나의 학창시절은 책 시절이라 부를 수 있을정도로 책을 좋아했다.
조금더 정확히 말하면 책 중에서도 소설, 즉 이야기를 좋아했다.
내가 왜 책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굳이 지금 와서 추리를 해보면 책을 읽기 쉽지 않았던 어린시절때문이었으리라.
요즘 학생들 혹은 당시 내 또래의 부유했던 친구들의 경우 부모님들이 책을 읽으라 강요하던 일이 많았고
그것은 오히려 반감이 된 경우가 많았으리라.
우리집은 가난했다. 한달 중 유일한 외식은 아버지 월급날 송탄터미널에 있는 중화요리집에 가서 짬뽕 한그릇, 짜장면 곱배기 한그릇 시켜서
아버지는 짬뽕 한그릇을 드시고 어머니, 나, 그리고 내 여동생 3이서 짜장면 곱배기를 나누어먹었던 것이었다.
93년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그 해 어머니는 살림을 일으키시기 위해 비디오가게를 시작하셨다. 당시 비디오가게에서는 비디오, 게임팩을 빌려주고
담배도 팔았다. 하지만 열심히 버셔도 비디오 신작한편을 구매하면 도루묵이 되기 쉽상이라 살림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비디오는 쉽게, 많이 볼 수 있어 또래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았지만 오히려 나에게는 그다지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우리집에는 책이 딱 3질 있었다. 한국 위인전 전집, 세계 위인전 전집, 세계동화 세트.
나는 책이 좋았다. 하루 종일 보아도 다 못보는 만화비디오들이 있었지만 나는 책이 더 재미있었다.
집에 있는 책들을 독파하고 새로운 책을 원했지만 엄마는 책을 사주지 않았다. 아니 사주지 못했다.
아침에는 물에 밥을말아 김치랑 먹고, 점심에는 간장에 비벼 김치랑 먹고, 저녁에는 김과 김치로 밥을 먹을때였다.
굶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생활에 꼭 필요하지 않은 책을 사기에는 어려운시절 이었다.
나는 집에있는 위인전들과 동화책들을 20번 이상 읽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그 정도 읽었다. 자꾸 읽으면 질릴까봐 아껴가면서 보았어도
그정도 독파했다. 어머니 친구가 놀러와 내게 선물해주셨던 TV유치원하나둘셋 잡지도 몇 십번 읽었다. 나는 책에 목말라 있었다.
그러던 나는 4학년이 되었다. 그 해에 국민학교는 초등학교가 되었다.
어머니는 시원찮던 비디오가게를 3년만에 정리하시고 미용기술을 배워 미용실을 차리셨다.
지방이었던 송탄에서 조금 더 발전된 수원으로 이사왔다.
이것이 내게 전환점이 되었다. 내가 이사간 집에서는 2분거리에 동사무소가 있었다. 그 동사무소 2층에는 주민시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도서실 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는 없었다. 책이 가득했다. 나중에 도서관을 가보고 그 동사무소 도서실은 코딱지만 했었다는걸 깨달았지만
처음 도서실을 가본 내게 그것은 충격이었다. 게다가...주소랑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고 회원증을 만들면 책을 '공짜'로 빌려주었다.
당연했다. 작은 도서관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겐 당연하지 않았다. 아...수원은 이런곳이구나. 송탄 시골과는 다르구나.
당시는 방학이었으므로 나는 매일매일 그 도서실을 갔다. 도서실이 문을 닫는 8시에는 책을 3권씩 빌려서 집에서 봤다.
처음에는 닥치는대로 봤다. 시집, 수필, 유머, 위인전 등등....하지만 내가 꽂혔던건 세계근대문학이었다.
죄와벌, 노인과바다, 바람과함께사라지다, 젊은베르테르의 슬픔, 데미안 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걸 이해는 하고 봤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세계명작모음집 이란 타이틀을 달고 같은 출판사에서 만든 같은 모양의 다른제목을 가진 그 책들이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그렇게 고등학교에 입학할때까지 소설과 함께 자라났다.
나는 언어를 잘했다. 수학을 좋아해서 이과를 선택했지만 잘하는건 언어영역이었다. 모의고사에서도 수학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2~3등급이었지만 언어영역은 전혀 공부하지 않아도 만점이 아니면 1개를 틀렸다.
나는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문이 나와있고 그 지문에 나와있는 것을 묻는데 왜 틀리는지 이해를 못하겠어"
친구들이 재수없어 한 이 후로 그런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말했다. "책을 많이 읽어서 그래"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야자를 10시까지 하고 12시까지 학원에서 공부 한 뒤 귀가하는 삶을 살게 된 나는 책을 더 읽지 못했다.
3년간 책을 읽지 못한나는 대학에 가서도 책에 대한 흥미를 다시 붙이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읽게 된 베르나르베르베르의 뇌.
그 책을 접한 나는 개미, 타나토노트, 천사들의 제국, 나무 등 모든 베르나르의 책을 섭렵했다. 그의 책은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그 책을 통해 머릿속에 그려지는 상상물들로 내 머리는 즐거웠다. 그렇게 나는 공상과학소설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 나는 군대에 가게 된다. 지금은 아니라지만 당시에도 일이등병때는 책의 책자도 가까이 할 수 없었다. 책이라고는 수양록과
병영생활 행동강령. 상병이 된 나는 옆의 말년병장이 읽던 책 제목을 보았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굉장히 우울해 보이는 제목에 나는 그 선임에게 무슨책이냐고 물어보았고 그 선임은 이렇게 대답했다. "공상과학소설"
당시에 나는 라이트노벨이라는 단어를 몰랐고 실제로 당시 라이트노벨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2009년)
나는 당시 그책을 일반적인 소설의 범주에서 보았고, 중간중간 그려진 예쁜 일러스트를 보며 좋아했다. 나는 그 책에 빠져버렸다.
말년병장이 남기고 간 스즈미야하루히의 우울~스즈미야 하루히의 분개 까지의 7권의 책은 내게 돌아왔고, 그책을 독파한 나는
전역한 후에 왜인지 모르겠지만 라이트노벨에 빠진것이 아니라 스즈미야하루히의 애니를 다운받았다. 만약 당시 그 책이 라이트노벨
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런류의 소설이 따로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나는 애니가 아니라 다른 라이트 노벨을 찾아보았으리라.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인터넷에 검색하고 애니가 있다는 사실을 안 나는 그 애니를 다운 받았고, 나는 다른책에 흥미를 가질 수 있는
계기를 일본애니메이션이라는 거대한 문명에 빼앗겨 버렸다. 그렇게 나는 책을 버리고 애니에 빠져 덕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