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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뻘글로 직결될 것이라 예상하기에
용감하고 무모하게 써보겠습니다.
다 했던 얘기를 재탕하게 될 것 같지만,
제 나름의 정리 차원에서 써보려 합니다.
-
철학이란 단어를 분석하면 크게 2개가 나온다.
첫째로 밝게 하는 것이고
둘째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철학이 뭔지에 대해선 알기 힘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를 종종 봤는데,
내 생각엔 '밝게 하는 것'이 더 와닿는 것 같다.
그 이유로
철학은 대상 자체는 아니다.
즉, 오브제가 아니라는 소리다.
이 말은 '철학'이란 단어에 해당되는 지시물이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철학이란 존재하는 것 같다. 마치 그런 것 같다. 왜 그럴까?
단순하다.
과정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철학 자체가 존재한다기 보다는, '철학적'이라는 게 존재한다.
이는 관계일 수 있고, 어프로치일 수도 있다. 뭐가됐건 어쨌건, 내 생각엔 '철학적'인 게 존재한다.
어떤 문제에 관해서 '철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철학적이라는 건 무엇인가?
위의 뜻 대로다. '밝게하는 것'이다.
즉, 어떤 것에 대해서든, '밝히게끔'하는 것이다. 이 뉘앙스가 중요한 것 같다.
밝다는 것은
"아 저기 태양이 눈부셔" 같은 것이 아니라,
어둠침침하고, 흐릿해서 안보이던 곳에, 빛을 내리쬐서 명확하게 보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면 '철학적'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만약 어떤 여성이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호호호'웃으면서, 눈을 흘끗 뜨는 것을 보게 된다면(그것을 보면서)
철학적으로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아주 냉정하게, 냉혹하게, 저 여성의 '본심'을 꿰뚫을 수 있어야 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저 여자가 겉으로는 친절하게 굴면서 허세를 부리는구나.'라는 식으로, 냉혹하게 명확하게 볼 수 있어야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런 어프로치를 해낼 수 있다는 게 '철학적'인 자세,라고 생각한다. 좀 특이한가? 하지만 이 부분을 잘 염두에 두자.
(덧붙이자면, 태도에 있다는 것이다. 즉, 명료하게 보려는 태도. 그런데 때로는, 결과가 명료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알고봤더니 여성이 배가아파서 눈을 흘깃 떴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태도는 '현상을 명료하게 밝히기 위해, 냉혹하고 냉정하게'보려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철학은 이런 자세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당신은 지속적으로 이 편견, 착오를 줄이기 위한 연구를 계속 해야한다.
왜냐하면 결국 목적이 '명료하게 만드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편견마저도 파악할 수 있으면, 명료함에 더 가까워질거라 보기 때문이다.)
대원칙은 '명확하게'가는 것이다. 명확하게 할려면, 자기 자신의 편견마저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자신의 오류, 한계, 편견, 편향, 모든 것을 고려하여, 명확해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빛을 내리쬐야 하는데, 그 빛에 노란색 샐로판지가 붙어서 누리끼리한 빛이 떨어진다면, 그 빛에 비춰진 대상은 명확할까?
물론 당신은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과연 당신이 말한대로, '명확해지는 게 가능한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어쨌거나 원칙은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내 나름의 이유가 있긴 한데, 일단 지금은 잠깐 넘어가려 한다.)
다른 사람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철학에는 크게 3가지가 있는 것 같다.
첫째로 '이해의 조건과 과정'을 다루는 것이고
둘째로 '개념을 만드는 것'이고
셋째로 '윤리'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말하려 한다.
첫째는 단순하다. 앞서 말했듯 '밝히는 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에선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도대체 안다면 왜 아는 것이고, 어떻게 알게 되는 것이고, 그걸 알았다는 보장은 어떻게 하는가?
그럴려면 당연히 머리속을 뜯어야 된다.
이 작업을 하는 게 첫번째 부분이다. 이는 과거에도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즉, '이해의 조건과 과정'을 알아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대상과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대상을 만난 것이 왜 가능한지 다시 연구하고 반복하고,
그런 작업을 지금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뇌과학도 철학이고, 인지과학도 철학이다.
그리고 인간의 오류를 다루는 것도 철학이다. 어쨌건 인간의 이해 과정을 다루니까 철학인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논리학'이 가장 철학적이다. 비유적으로 말해, 논리학은 인간의 학문에 있어 거의 최종관문이다.
사실 '철학적'이다는 말은, 논리적이다는 말과 같다고 본다.
밝히는 것과 '사리'에 맞는 것은 왠지 궁합이 맞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밝히려고 하는 게 이치 아니겠는가?
편견과 잡음이 전혀 섞이지 않은, 뉘앙스에 있어서 수학적인 이치,
바로 그것이 철학적인 탐구의 결과물일 것이다.
근데 이건 사족일 수 있는데,
이 경우 미학도 이 부분에 속하게 된다.
왜냐? 인간의 이해 조건과 과정에는 지각과 정서,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인식이 빠질 수가 없다.
난 차라리 이렇게 얘기하려고 한다
우리는 '명료하고 깔끔한 것'은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지저분하고 혼잡스러운 것은 추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 왜 자기 입장이 난처해서, 억지로 사태를 왜곡하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짜증이 날까? 왜 오류는 짜증을 부를까?
왜 실패나 잘못된 것은 불쾌감을 줄까? 왜 오디션 참가자가 떨면서 노래를 못하면 내가 답답하고 혼란스러워질까? (대부분 이러면 탈락된다.)
어쩌면 세상의 기준은 미학에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즉 '아름답다'는 느낌을 주면, 긍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진리의 참/거짓의 판별 기준도 미학적인 감성에 있지 않나 생각해보기도 한다. 예쁘면 다 용서가 된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 부분은 언제 더 언급해보고 싶은 부분이다. 진리와 아름다움의 관계)
개념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개념이란 용어의 정의부터 보자.
개념이란 용어가 독일어로 '움켜잡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Cept역시 잡다의 뉘앙스이고, 한국말로도 개념은 '파악'하다는 용어와 말뭉치를 이룬다.
개념은 그 말 자체로 '대체로 그러한 생각' 또는 한 대상에 대한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관념 등등으로 표현되곤 한다.
존 듀이는 재밌는 견해를 보여준다.
인간이 개념을 얻어내는 방식은 '수많은 대상들을 놓고서,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속성을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대상을 훑어본 다음, 그룹을 지어놓고, 그 중에서 가장 대표성있는 것을 잡은 다음, 바로 그 한 대상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뽑아낼 수 있을 때까지 다 뽑아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 그렇게 뽑아낸 것을 가지고 다른 것과 비교하면서, 개념을 분명히 해간다는 얘기를 한다. 즉 비슷한 것을 계속 체크하면서, 차이가 나는 것도 별도로 체크하면서, 이런 식으로 작업한다고 본다.
생각컨대, 이게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원래 세상에는 애초부터 그룹핑이란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룹핑은 인간이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룹핑이 가해지기 전에, 이미 그 오브제들이 존재했다는 얘기다.
그러니 그룹핑이 아무리 게슈탈트적으로 존재감을 부여한다 하여도, 원래는 개별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바로 그 때 존듀이의 성찰은 의미있다.
그러면 존듀이의 말대로, 이것들이 '그룹핑'되는 것인 셈이다.
그래서 그룹핑이라며, 서로가 개개별이지만, 비슷하게 '묶일'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게 된다.
바로 그래서 '대표성'을 제대로 분석하면, 나머지에 대해서도, 어림짐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비교검증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면 개념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하다.
존재하는 사물, 현상, 사태에 대해서,
위의 말대로, 직접 탐구하여 '뽑아내는'것이다.
즉, 그것이 어떤 필요에 의해서든 관계 없이, 일반적인 접근으로 '공통적인 속성'을 뽑아내기 위함이든, 아니면 '개별적인 특징'을 잡아내기 위함이든 관계없이, '뽑아내는 것'이다. 즉 '탐구'가 된다.
그러니 개념을 만든다는 말의, 다른 뜻은 '탐구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개념을 만드는 작업 등등에 쓰여지는 단어들을 잘 분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첫번째 말한 '인간의 이해과정'이라는 것이 언제나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어렵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탐구하고
개념을 만드는
그 과정에 있는
그 인지과정은 무엇일까?
심리학적으로 보자.
이 경우 너무나 단순해진다.
감각되고, 인지되고, 느낌을 갖게 된, 그것들에 대해서, 이미지에 대해서,
부호화를 한 것이다.
왜냐?
말 그대로다.
개념을 잡아챘다는 것을, 인지과정에서만 본다면, 그는 '파악'을 한 것이다.
즉 '움켜잡은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움켜잡는가?
당연히 그가 감각하고 느끼고 했던 것들.
대상, 사물, 사태에 대한 것이고,
그것이 이미지로 나타났을 때, 그 이미지에서 몇몇 부분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즉 움켜잡은 것이다. 그게 개념이다.
그러니 개념은, 바로 그것들을 탐구하면서 '움켜잡은'것들이다.
그러니 다름아닌 이 과정이 탐구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해선 더 할 얘기가 많을 것이다. 인간은 한번에 수많은 다양을 잡을 수 없다.
전경과 배경의 원리, 초점의 원리에 따라, 특정 부분, 특정 요소, 등 몇 개만 초점을 둘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개념은 대개 소수의 요소들만 잡아채게 된다. 물론 여기에 있는 방사원리, (혹은 가족의원리)는 그 다음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 과정을 염두에 두면
다음의 3가지 정도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로
이 개념을 잡았다는 것은
당신이 어떤 사물,사태에 대해서, 특정 부분을 잡아챘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스탠더드한 것이 있을 것이고 (공동체가 공유하는), 또 당신만의 캐취가 있을 것이다.
가령,
나는 오디션 프로를 보면, 누가 귀엽고 예쁜가를 보지만,
프로듀서는, 누가 어떤 컨셉이 어울릴까를 캐취할 것이다.
이게 차이다.
이런 건 프로듀서만의 캐취인 셈이다.
결국 이 얘기는 개념을 잡아낸다는 것은, 언제나 '합의된대로, 공동체가 요구하는대로'만 해야되는 게 아니라,
그것은 그것대로 스탠더드한 것이고 (왜냐하면 이를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은 '요소'를 주고받는 게임같은 것이다.)
당신만의 개인적인 캐취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언제나 스탠더드를 맞춘 다음에는 자신만의 캐취를 해야 한다. 그게 당신의 개성이기 때문이다. 당신만의 특별한 시각은 별개 아니다. 당신이 어디에 관심이 갔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자 생각해보자.
그러면 미개척영역은 도대체 언제 개념이 생겨날까?
기존에 존재하는 개념은 누가 만들었을까? 왜 그가 만들었을까? 누가 시켰을까? 그런데 왜 그가 해야했을까?
아마 답이 쉽게 나올 것이다.
분명 누군가가 개념을 제시했고, 그 말은 그가 개념을 잡아챘다는 얘기고,
누가 시켰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건,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누가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새로운 영역에 대해서, 어떤 개념을 잡아채는 것도 누군가가 하는 일이란 점이다.
누가 할 것인가? 내가? 당신이? 죽은 사람이? 학자가?
이는 사실 정해진 게 없다.
앞서 언급했듯, 개념은 잡아채는 일이다.
쉽다.
당신도 할 수 있다.
대상을 보고, 느끼고, 거기서 성찰하고, 주목되는 점을 다시 살피고, 그 부분을 언급하면 된다. 그 자체가 파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탐구과정인 것이다. 개념은 탐구과정의 결과에 가깝다.
즉,
이렇게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 뭐냐하면
아직 아무도 개념을 만들어내지 않은 영역이나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서,
본인이 탐구를 하고, 그것에 대해서 고찰을 한 다음, 요소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뽑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이미 존재하던 개념에 대해서도,
다시 그 개념의 근원이었던 현상과 사물을 재차 탐구해보면서,
기존의 개념으로 한계가 어디었는지를 염두에 두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발견이 없는지, 다시 확인해보는 것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재구성'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철학자들이 복원되는 것도, 사실상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들의 개념을 재구성한다거나, 더 풍성하게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다.
이건 개념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접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리고 발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통을 할 때, 서로가 서로의 용어들을 주고받고, 첨가하고 발전시켜가면서, 대화를 발전시켜가는 것과 같다.
다시 인지과정을 살펴보자.
이렇게 개념잡기라는것은 결국 언어로도 나타나는 부분인데,
그 전개방식을 잘 보면(인지과정을 보면), 자기 머리속에서 이미지를 떠올리고, 관계를 잡아냏고, 그리고 부호화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신경과학으로 보면, 아마 뉴런의 연결이 잡혔거나, 했을 것이다.
즉, 그래서 결국 본질은 1번으로 가게 됩니다.
이것도 인간의 이해를 다루는 문제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
그리고 결국 이 이해방식이, '잡아챈 것들, 방식이'
이 세상을 보는 전제가 될 것이므로,
이게 곧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세계관"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는 딱 고정된, '관'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이해를 시도하고, 개념으로 잡아내고,
그 개념을 기반에 깔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타난 '시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개인적인 문제가 된다. (스탠더드한 것을 넘어서면)
그래서 스타일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만의 대응방식이니까.
그래서 아마 니체가 말한 "스타일을 가져야 한다"라는 말에는, 이런 뉘앙스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생각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럴 때 타자의, 공동체의, 합의되는, (라고 쓰고, 누군가의 지배적인 결정권에 따른) 요소만을 접하고, 그것으로만 소통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캐취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철학이라는 것이 '과정'에 있듯이,
이것역시 과정에 있다.
즉 스타일이란 것은 과정에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얼마나 '자기 시선'으로 볼 수 있는가? 얼마나 '자기 시선'으로 파악을 하고 있는가?
그 대응방식은 자신만의 것인가? 아름다운가? 효과적인가? (자기 나름의) 임팩트 있는가? 싫은 것을 부정했는가?
그런데 민망한 것이 나는 니체를 읽지 못했다.
유일하게 읽은 게 안티크리스트인데, 그것도 맥락을 몰라서 무슨 말인지 갈피를 못 잡았다.
대충 짐작컨대, 아마 동정심에 대한 것고, 기독교의 행태가 상당히 불량하다는 것을 지적했던 책으로 보이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건 철학서라기 보단 윤리서적?에 가깝단 생각을 해본다.
엉뚱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지만 애교로 봐주시길)
3. 윤리학
이렇게 가게 된다.
사실 이유가 있다.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있고, 나만의 스타일이 있다.
내가 "이것만은 안된다"라고 생각하는 느낌이 분명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행위'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내가 행동하기 이전에,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무의식적 행동 이런것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조금 보류해두려고 하지만, 일단 '의식적인 행동'은 윤리로 집어넣는다.)
즉 어쩌면, 필연적인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세계를 바라보고 파악한 것이 있고, 그것에 입각한 관점이 있고, 나만의 스타일이 있기 때문에,
나는 그에 입각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충돌할 때가 종종 있다.
이유는 상당히 많다. 여기서 언급하면 곤란해질 정도로 많다.
가장 문제되는 것은 욕망과 희소성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잠깐 보류해보자.
그리고 다시 얘기를 이어가보자.
분명 제각각 자기만의 입장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윤리를 '논의'하게 된다.
내 입장에서 윤리란 '행위에 대한'논의다.
어떤 행동이 좋냐 싫냐, 옳냐 그르냐, 를 떠나서,
일단 문제삼고 논의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내멋대로 할거면, 이런 논의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내 행동이 다른 사람과 어울릴 때 문제가 있다면 어떨까?
가령, "난 나니까 내 멋대로 할거야"라고 막 범죄를 저지르고 이런다면?
이에 대해서 논의를 하게 된다.
극단적으로 논의를 안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이것도 인간의 이해구조, 세계를 파악하고 행동하는 일 때문이다.
모두가 주도권을 갖고 세상을 살기 때문에, 타자가 충돌하게 되면, 서로의 주도권이 충돌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거기서 소외가 되거나, 장악이 벌어지는 등의 문제가 생긴다. 솔직히 힘이 센 쪽이 무조건 유리하다.
하지만, 이유는 모르겠으나, 여기엔 그리스 신화에서 종종 나오듯이 '호소, 청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잦게 발생한다.
아마 그런 이유로, 이러한 '합의'가 나왔을 것이다. 내 생각에 윤리란 그렇게 출발한다. '인간적으로 해야 할 것'은 그렇게 출발한다는 것이다.
즉, 이게 왜 되는지보다는, 일단 되고 있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윤리에 대한 논의가 생기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욕망의 발현'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즉 서로가 좀 더 '논의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출발하자.
만일 상대가 "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뭐 이렇게 해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갑자기 강간을 정당화시킨다고 해보자.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기엔 감정과 불쾌감이 기초가 된다.)
일단 내 의견을 말하면,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강간당하기 싫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이제 두 입장, 세계관이 충돌한다.
즉, 앞서 언급한 것과 연관짓자.
상대방은 세계를 관찰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게 좋다'라는 개념화를 했으며,
여기에 입각해서 '자기 멋대로' 해야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강간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 입장은 다르다.
나는 "누구나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해도, 그게 결국 내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지 말라고 요청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나도 상대에게 그래선 안된다." 라고 개념화를 했다고 하자. 이것이 곧 내 세계관이 된다. 나는 이 입장을 취하며 행동을 한다.
즉, 상대방에게 '반박'하는 것이다.
심할 경우
나는 '눈에는 눈'의 태도를 취하여,
청부를 의뢰하여, 저 사람도 강간을 당하게 만든다.
그렇게 해도, 그 세계관을 유지할 수 있는지 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특이한 접근이다. 그냥 복수하거나 처벌할 수도 있지만,
만약 그런 더 큰 차원의 '기준'이 없다고 할 경우, 나는 그의 세계관을 테스트 해보는 것이다.)
어쨌건 그래서 윤리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실제로 이 오유에서나 또는 다른 커뮤니티에서, 고민이라고 해서 쓰는 글들은 전부 윤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뭐가 옳으냐 좋으냐? 어떤 게 좋고 싫으냐?, 그리고 왜 그렇게 해서는 안되느냐? 왜 나는 그걸 싫어하느냐? 이런 식으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개의 고민은 '충돌' 때문에 생긴다.
즉, 나의 세계관이 있는데 (그때까지의 한정된 경험과 정보로 축적되고 구성된)
그것이 지금 외부의 세계 또는 타자의 세계와 맞지 않아, 충돌이 되어버렸고, 순간 브레이크가 되어 멈추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그 다음 질문은 이렇다.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 문제에 처한 사람은 세계관을 검토하고, 상대방의 세계관을 알아내려고 하는 등의
숙고를 하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각자가 가진 세계관을 검토하며,
요소를 협상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결국 해결책을 찾지 못해
쓰러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조각이 없는 것이다. 그 극복이라는 퍼즐을 완성시킬 조각이)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고, 격려를 요청하는 행위가
'고민상담'에 해당한다.
그리고
고민 게시판의 특징은 "내가 싫었던 것"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다.
(이 얘기는 앞서 언급했던 것과 관련된 것인데, 한번 미학적으로 표현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무시해도 큰 지장은 없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오늘 여친한테 차였다고 하자
그 사람이 만약 "내가 뭘 잘못했지?" 라고 고민하며
그와 관련된 글을 올리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글을 쓴 이유는 단순하다.
그 사람은 지금 그 상황이 싫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떻게 행동해야좋을까?' 이 부분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해의 문제이기도 하면서, 그에 입각한 행위의 문제가 된다.
아마 여기서 반박을 제기하실 분도 있을 것 같다.
가령 행위라는 것을 '규정해야한다'거나,
'원칙'이 분명히 설정되야 되지 않느냐, 이런 얘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류애 걸쳐서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시도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게 바로 '금지어'라고 본다. 대표적인 것이 금기, 십계명, 이런 것들이다.
근데 생각컨대, 이는 그 순간의 사람들에게 전달했던 것이, 계속 이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즉, 사람들에게 '하지마라~'라고 한 것들이다.
근데 나는 이게 굉장히 '생략된 문장'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태어나자마자 "하지마라" 이렇게 들으면, 듣는 사람은 당연히 '왜 하지 말아야되지?' 이걸 모른다
그래서 궁금해할 수 밖에 없다.
사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금기는 종종 위반된다.
그러나 이는, 첨부터 위반되게끔 금지어가 제시되었으니까 위반되는것이다.
막말로,
"얘야, 가스렌지에는 손을 대지마라" 라고 할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나서, 직접 '체험하게' 해줬다면 어땠을까?
즉,
화상을 입지않는 수준에서, 따금해서 손을 때버리고 싶을 정도의 '뜨거움'을 체험하게 해줘서
아이가 "아 뜨거" 하면서, 다시는 그 쪽으로 가까이 가지 않게끔 체험해준다면,
그 아이는 "손을 대지마라"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부정어는
처음부터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뭐를 해봤는데, 해봤더니 영 아니더라" 바로 그래서 "그걸 하면 안되겠더라" 라는 구조로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 부분에 대한 전제를 느끼게 해주지도 못했는데,
다짜고짜 하지마라,
이렇게 해버리면 나머지는 믿음의 문제가 된다.
그러니까 의심이 많고, 호기심이 많고, 실증적인 성향의 인간들은 확인을 해보려는 것이다.
그래서 금기가 깨지고 위반되는 것이다. 금기가 깨지는 건 별개 아니다. 모르니까 확인해보려고 해보는 것이다.
(물론 여기엔 '금지되는 것의 욕망'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꼭 그런 욕망을 느끼는 경우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어떤 경우엔 나르시즘이 너무 심해서, '보면 안되'라고 하면, '내가 왜 보냐? 시간 아깝게'라고 하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너무 미안하고 순진하고 착해서, 하지말라고 하면 정말 안하거나 쳐다도 안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건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인간의 옹졸함이 드러난다.
즉 상대가 위반을 해버리면, (호기심과 납득못함이 분명 있었기 때문인데도)
마치 상대가 나에 대한 믿음이 없다라는 식으로, 자기 스스로에 대한 비하를 하게 되고 비참함을 느껴서, 상대에게 복수를 한다.
그래서 그게 때로는 처벌로 가게 되는 것이다.
즉, "너 왜 엄마 말 안듣니?" 이 말에는, 굉장히 이기적인 뉘앙스가 있다. (만일 그가 커뮤니케이션을 제대로 했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건 진짜아이를 탓해야 하겠지만, 잘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자기가 제대로 소통을 했는지를)
애들이 뭘 알까?
애들을 떠나서, 정보가 없으면, 알 수 있다고 판단할 근거도 없다.
그러니 그런 근거 없이 "하지마라~" 이래버리면 곤란한 것이다.
그게 십계명이나, 금지어가 이해되기 어려운 이유다.
십계명은 '하지마라'고 되어있지만
실제로 체험 수준에서 이해할려면 '하지마라'로 가는 게 아니라,
"해봤더니 이렇게 되더라, 그러니 차라리 시작자체를 하지마라" 이렇게 가는 게 적절하다는 것이다.
아무거나 넣어보자.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마라, 가 아니라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해봐라. 어떻게 되는지. 결과를 봤는가? 계속 탐할 것인가?
이렇게 되는 것이다.
십계명이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면 (만약)
그건 체험에 기반한 다음, 금지할 것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체험에 비추어봤을 때, 항상 안좋았던 결과를 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근데 이렇게 전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 밑도끝도 없이 '하지마라'가 되고, 믿음의 문제가 되고, 안따르면 상처와 복수와 (불신지옥 같은) 저주의 문제가 되게 된다. 그리고 심해지면 권력의 문제, 카르텔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는 가설이지만,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소통에 실패하는 사람은 언제나 성공을 해서 권력을 집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실패하거나 거절당할 확률이 줄어드니까.)
요지는 커뮤니케이션을 잘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지, 잘 전달되고 있는지를.
왜냐하면 그것이 윤리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이 행위가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이런 얘기를 하여, 규정짓고 단정짓는 게 윤리가 아니라,
숙고 자체가 윤리라고 봐야 한다. 여기 윤리도 지시되는 대상이 딱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윤리적'인 것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때 윤리적인 것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말한 '세계관에 입각한 그 행위에 대한 숙고', 그리고 이를 '타자간에 하는 숙고'로도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커뮤니티에는 윤리적인 것이 넘쳐난다.
막말녀가 도마위에 오르는 것도 윤리적인 문제인 것이다.
저 사람이 자신만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저지른 저 행동에 대해서
나는 내 세계관에 입각해서 어떻게 대응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결과를 맺게 되는가? 어떤 타협을 맺게 되는가? 어떤 논의가 벌어지는가?
딱부러지는 얘기는 할 수 없지만, 이렇게 '논의'하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윤리적인 것이고,
또 한편으로 이해과정과 세계관에 의해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어쨌건
이래서 3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본다.
물론 여기에 미학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헌데, 나는 이렇게 생각해본다. 앞서도 말했지만 미학은 이해의 문제와 직결된다.
인간은 '좋다/나쁘다' '옳다/그르다'라는 것을 아름다움과 결부짓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즉, 뭔가가 싫다, 안되고 있다, 혼란스럽다, 라는 것에는, 좀 짜증난다는 뉘앙스도 있을 뿐더러,
그게 조화롭지 못하며, 계속 쾌감을 느끼게 해주지 못한다, 라는 생각을 갖는 것 같다.
아마 그래서
어쩌면 유추로 쓸 영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나는 이해의 과정 자체에, 이미 지각과 정서를 넣어버렸기 때문에, 미학도 포괄해본다.
사실 나는 그래서 미학을 따로 철학과 구분하려고 하진 않으려 한다.
(이 문제는 부실하게 언급을 했지만, 그 이유는 명확한 구분을 할 만한 근거가 내게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냥 질러보는)
요점을 잡으면 다음과 같다.
1. 인지의 조건/과정을 속속들이 알아내는 것
2. 개념을 만드는 것. 즉, 탐구하는 것.
3. 윤리, 인간의 (제각각 세계관에 입각한) 그 행동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
그러나 결국엔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명료하게 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철학은 분석과 종합이며, 모든 유용한 접근법과 데이터의 총합이 녹은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학문의 왕? 이렇다기 보다는, 한 사람이 결국 자기 자신을 정리하는 작업으로서 써야 되는 '접근법'이라고 생각해본다.
철학이 있는 게 아니라,
'철학적'인 게 있는 것이고,
그것은 과정에서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접근할 때에만, 철학이 존재할 것이다.
-
무모하게 질렀기 때문에
그르냐?
하는 느낌으로 봐주시면 됩니다.
저는 모든 것은 결국
문제-문제인식-문제해결
이런 걸로 보는데,
그런 과정에서, 어떤 식의 색이 더 많이 붙었느냐? 그걸로 구분하려고 합니다.
가령 경제학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겠죠
이것도 제 글로 보면
스타일인 것이죠.
왜냐하면 어떤 특이한 자기만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니까요.
철학, 이 자체도 스타일에 해당되는 것이죠.
그러니 '철학 스타일'인 것이죠. 이걸 줄여 말하면 '철학적', 이런 표현이 되는 것이구요.
어떤 분은 '개념을 명료하게 하는 것'을 철학적 작업이라고 보던데,
전 이것도 되게 좋은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곧 그것이 세계관이 될 것이니까요.
그러니 철학은 세계관을 정립하는 것과 연관이 많을 겁니다. 개념을 잡는 것 자체가 '세계를 보는 방식'을 설정하겠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는 인지로 보면, 단순하게 보면 '부호화'를 시키는 일이죠.
그러니 사실, 어떻게 보면, '세계관을 인스톨'하는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즉, 이런 식이죠.
플라톤이 국가를 쓴 이유는,
또 국가로서 뭘 했느냐 하면,
실제로는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고 했던 겁니다.
즉 플라톤이 살던 폴리스에 대해서 숙고하여 쓴 것입니다.
근데 그것을 '철학적'으로 한 것이죠. 즉, '개념을 제시하면서' 달리 말해, 세계관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적인 국가관'을 제시하는 것이죠.
이는 굉장히 주관적인데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가 아니라, '이렇게 나는 보고 있다, 이렇게 한번 보는 게 어떻겠느냐?'하는 것이죠.
즉, 플라톤이 '세계를 보고 파악하여, 개념화시킨 것을 바탕으로, 플라톤은 그런 개념을 조각조각 제시하여, 자신이 보고있는 방식을 제시한 것이죠.
때로는 이런 누군가의 통찰이 굉장히 강하여,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죠. 바로 그런 경우일 겁니다.
만일 여기에 누군가 '설복'이 된다면, 그는 그렇게 보는 게 좋겠단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플라톤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근데 주입식으로 공부하면 이렇게 접근할 수가 없겠죠? 밑줄 긋고 외우고 그렇게 되면 말입니다. 전 이런 공부는 좀 쓸데 없단 생각을 해봅니다.
심지어 좀 토나온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맥락없이 그냥 외워야된다는 강박에 빠지는 것이니까요.
저는 어쩌면 플라톤은 컨설턴트에 가깝단 생각을 해봅니다.
컨설턴트의 문제해결과정은 의미있지만, 이걸 굳이 외우거나 알아야될 필요는 없을 겁니다. 필요한 사람만 알면 되는 것이죠.
그리고 플라톤의 접근과정을 아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가 어떤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고, 어떤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개념화과정이 어땠었는지, 등등을,
인간은 '공통된 인지기제'가 있다고, 저는 전제하므로, 내 머리를 통해 플라톤을 유추해보는 것이죠. 시뮬레이션을 거치면서.
지금 이 괄호 부분은 이 글과 크게 연관은 없지만, 일단 써둡니다. 왜냐하면 세계관을 제시하려는 사람의 발화를 이해하려면, 그 전후/제시방식/목적하는바를 이해하는게 좋지 않을까, 생각 때문입니다. 물론 철학하시는 분들은 이렇게 접근하고 있겠죠 이미. 더 전문적으로 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구요.)
사실 이렇게 보면 별 거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어떻게 생각한다'라는 것을 제시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것을 '자신이 관찰한'현상들에서, 플라톤만의 관심사로 요소를 따와서, 그것들로 조직화를 시킨 다음,
자신이 파악한 것을 기저에 깔고서, 그것에 입각하여 '발화'를 한 것입니다.
이게 플라톤의 발화인 것입니다.
그러니 철학을 할려면
자신이 어떤 것을, 어떻게 탐구했고, 어떤것을 파악했고, 어떤 것을 개념으로 제시하는지, 보여주고,
그것에 입각해서 뭘 하려고 하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다른 세계관과는 어떻게 충돌하고 타협할 수 있는지,
그런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써보면서
과연 철학 아닌 게 있느냐?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개념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이죠. (제가 쓴 것만 보면)
물론, 이는 2번을 다룬 것입니다. 더 정확해지려면 1번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게 인식론이겠죠.
이 1번은 아마 숙고로만 되는 건 아닐 겁니다. 이제는.
왜냐하면 지금 이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대개 인지과학자,인지심리학자,뇌과학자,신경과학자, 이런 사람들이니까요.
하지만 그들도 결국 철학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 입장에서 그들은 '밝히려고 하는' 사람들이며,
1번을 연구하여, 그것을 '개념'으로 제시하기 때문입니다.(2)
이제 나중에 이를 통해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게 좋을지 (3)를 제시하면,
지금 제가 언급한 1,2,3은 다 하게 됩니다.
제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만 하면, 다 철학자가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철학자는 이런 '철학적 접근'을 하는 사람이니까요.
이들은 철학자를 연구하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즉 플라톤을 연구하는, 이런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안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루 먹고 살기 바쁘거나, 그냥 복종하면서 살거나,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차라리 철학자를,
문제해결자 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할 것입니다.
다만 그 방식이 굉장히 '명료할'것을 요구하는 것이죠.
또 '개념'으로 나타낼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를 더 분명히 말하면 '개념화 과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는 '탐구하는 사람'이 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탐구하는 사람이면서 가장 '정직하게, 명료하게' 탐구하는 사람인 셈이죠.
이 부분을 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느껴지느 뉘앙스를 품는 게 더 좋겠단 생각이 들어서
일단 여기까지만 써놓겠습니다.
위 글이 헷갈릴 수도 있는데
가령 명료함과 스타일이 충돌되는 거 아니냐, 이럴 수 있습니다.
아마 그런 혼란이 있을지 모르는데, 감안하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굳이 언급해보면, 스타일은 '초점이 꽂히는 부분들의 차이'라고 보면 될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팩트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과 선호도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글의 요지는 철학이란 '철학적'이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는 것이고,
철학자는 밝혀내려는 사람, 명료하게 만들려는 사람인데,
그것은 첫째로 이해의 조건과 과정이며 (이는 언제나 명료함이 기준, 그러니 명료함을 위해서라면 통섭적 접근은 불가피.)
둘째로 개념화를 하여, 개념을 제시하는 사람이며
셋째로 세계관에 입각한 행동, 실천에 대해서 논의하는 사람이다.
이구요.
철학은 '과정'에서 있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 어떤 위엄이 있다거나, 칭송되어야 하거나 하는 게 아니라,
'명료함'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어떤 학문이든지, 어떤 분야든지, 가리지 않고, 장점을 흡수하여, 가장 최선의 것을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통섭적'이어야 하고, 경계를 깨는 것을 개의치 않아야 합니다.
만일 심리학의 연구결과들이
이해의 구조와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면, 바로 그것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과정'에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그 목적은 '명료하게'만드는 것이구요.
그렇게 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조건 쓸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앞전에 끝낼 수 있었는데,
이 얘기를 하려고 좀 더 써봤습니다.
개인적으로 철게에서 좀 분명한 접근을 보고 싶단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철게가 질문만 던지는 곳도 아니고, 철학이 과연 그렇게 질문 던지고 끝내는 작업일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공간이 궁금하다면, 본인이 탐구를 하던가, 공간과 관련된 논의들을 수집해서 탐독해봐야겠죠?
그것이 물리학의 분야이든, 회화의 분야이든 간에, 자신의 궁금증/의문을 '명료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철학은 성찰로만 이뤄진것도 아니며, 성찰로만 해야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위엄'이 서는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가장 큰 목적은 뭐가 됐건, 어떤 것이 됐건, 어쨌건 최대한 '명료하게'만드려는 '시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거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요하고 끈질기고 독하고 아주 진이 빠지고 탈수가 일어나는 일인 것이죠.
제 생각엔 게임에 가깝습니다. 추리 게임이죠.
아무튼 여기까지 써봤습니다.
수정할 내용은 읽다가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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