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주차하자마자 헐레벌떡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시간은 6시 5분... 첫 만남에 5분이 늦었다.
아.. 구리휴게소에서 소변만 보지 않았어도.. 일찍 오는건데...
..
나이먹고 하는 소개팅인지 선인지 모를 자리인지라 평소에 가보지도 않았던 구리 아웃백으로 약속을 잡고 청주에서 올라오는 길이었다.
촌놈 티 팍팍내며, 두리번 두리번 거리면서 인상착의가 그녀일 법한 사람을 찾았다.
혼자 있는 사람이 드문상태라 그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평소 입지 않던 정장을 입어 몸이 매우 불편한 상태였고, 나이보다 열살은 더 먹어 보이는 노안을 납득하게 할만한 갈색 코트를 입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소싯적에 미팅할때 취미를 물어보면..
영화보기와 독서요...
라고 씨도 안 먹히는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했던 그녀들처럼...
그녀 역시 독서를 하고 있었다.
"저.. XXX씨죠?"
라고 조심스럽게 경상도 발음이 아주 약간 섞인 서울 식민지 발음으로 물어보았을때, 그녀의 표정은... 사실 지금은 기억 안난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하는 건...
그녀의 광할한 이마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결혼" 이라는 단어가 쓰여있었다는 것~~
...
사실 나의 첫눈에는 그녀가 뭔가 아쉬운 것이 있었다.
얼굴도 단아하고 이쁘장한데.. 뭔가 아쉬움...
그런데 나의 눈에는 그녀 이마에 분명히 각인된 "결혼"이라는 단어....
"아.. 이 여자하고 만나면 무조건 결혼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말하면, 그냥 연애하고 헤어질 그런 인연은 아니구나 싶은거였다.
그게 싫었다...
난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질 않았으니까...
하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이런 저런 얘기를 시작했다.
---
사실 이 자리는 누나가 만들어준 자리였다.
남동생의 결혼식이 끝나고 뒷풀이로 누나집에 모여 술을 마실 때, 장가도 못간 동생보다 못한 형에 대한 탄식이 이어지는 것을 보다 못한 누나가 근무지 졸업앨범을 들고왔다.
"내 니 여자 소개 시켜주꾸마... 여기서 한번 골라봐라."
"내가 뭐 아나.. 뭐 괜찮은 사람 있으면 누나가 해주고.."
누나가 앨범을 휘적휘적 넘기더니.. 한 사람을 찍으며 말했다.
"얘.. 괜찮다.. 얘 어떠노?"
가만히 들여다보니 동그란 얼굴에 이목구비도 오목조목 하고... 일단은 괜찮다... 그런데 딱 보는 순간 느낌이 왔다.
"에이... 괜찮긴 한데.. 키가 디게 작아 보인다."
그러자 누나가 눈을 피하며 말을 흐린다.
"아이다.. 그렇게 안 작다~"
"뭐 알았다.. 한번 해주라.. 만나보지 뭐.."
그렇게 우리의 소개팅이 성사된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누나가 평소 괜찮다고 찍어놓은 후배를 여나저나 때를 노리다가 이때다 싶어 나를 소개시켜 준 것이었다.
뭐.. 사실 누나한테도 큰 모험이었을 것이다.
만약 친동생이 개망나니로 찍히면 같은 직장에서 그녀한테도 어색해지니까...
그래서 보호막을 하나 친 모양이다...
아는 친척 동생이라고~~~~~
젠장... 친동생을 아는 친척이라고 뻥치며 소개팅을 성사시켰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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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물어봤다.
"저.. 정부장이랑 제가 무슨 사이인줄 아시죠?"
"네.. 친척 동생분이시라고..."
"음...."
"......"
"사실 친동생이에요..."
친동생이라는 말을 하자마자 안그래도 동그랗던 그녀의 눈이 더더욱 동그래졌다.
지금까지 같이 살면서 늘 나한테 놀라긴 하지만... 그때가 아마 가장 놀랐을 것이다.
나중에 와서 들었지만... 그때 친동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도망치고 싶었다고...
사실 누나가 학교에서 그리 부드러운 사람은 아니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라 후배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정겨운 사람은 아니기에...
무서운 부장선생님 친동생이라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음...
하지만 특유의 떠벌이 정신으로 즐거운 자리를 이어나갔고..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청주로 내려갔다.
밤 12시가 되어 청주에 도착하니.. 여전히 술친구들이 당구장에 모여 있다가 물어봤다..
"소개팅 잘했냐?"
"에이.. 모르겠다.. 다 좋은데.. 애가 키가 마이 작네..."
"얼마길래?"
"몰라.. 한 150초반 같은데..."
"푸하하하"
친구들이 웃을 법도 한 게.. 내 키가 186cm.. 몸무게는 110kg... 거대 고목나무에 매미 붙은 비쥬얼이 상상되었을 테니까...
...
다음날.. 다시 구리로 올라갔다. 구리 롯X 시네마에서 영화를 보고 나서.... 점심을 먹은 뒤...
그냥... 정처없이 차를 몰았다.
아는데도 없고 분위기 맞출 줄도 몰라.. 그저 길 나오는데로 가다보니 어느새 춘천 가는 길이었다.
"뭐.. 갈만한 데 있어요?"
"아뇨.. 없어요."
"그럼 그냥 가봅시다."
그렇게 춘천까지 가서, 분위기 없게 춘천닭갈비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소주 한잔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운전해야하는지라 사이다와 함께 먹는 닭갈비는 정말 체할정도로 밋밋했다.
그렇게 다시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 주고 청주로 내려갔다.
..
그 뒤로 끝이었다. 연락도 안하고.. 그저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날...
누나한테 전화가 왔다.
"야.. 니 어째 됐노?"
"뭘?"
"전에 소개팅한거..."
"아따 마.. 그걸 왜 신경쓰노?"
"아니.. 그게 아니라.. 어찌 된건지 궁금해서......"
"됐다마.. 내 알아서 할테니 신경꺼라~"
"아니 그게 아니고.. 뭐 잘된건지 안된건지는 알아야 내가 OO샘 대하기가 편하지......"
"알았다. 알았다. 내 알아서 연락해볼께. 걱정마라~~"
그렇게 억지스럽게 연락이라도 한번 더 해야 하나 싶었다.
..
사실 그녀가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녀의 키가 작아서 나와 너무 대조되는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이었다.
그러던 며칠 후, 아버지의 수술 때문에 강릉의 병원에서 모였을 때 엄마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신다..
"야.. 니 전에 아가씨 만났다는데 어째 됐노?"
"아.. 왜??"
"마.. 그 아가씨 맘에 안 들더나?"
"아이네... 뭐 애는 괜찮은거 같은데.. 키가 마이 작아서.."
"야야.. 니는 그런 소리 하면 안된데이... 키 뜯어 먹고 사나~~ 아가 괜찮으면 잘 해봐라~~"
옆에서 작은 누나도 끼어든다.
"야.. 이놈아.. 니가 뭐 잘났다고 키 타령하고 지랄이노.. 사진보니 괜찮던데 잘 해보지 뭐 팅기고 지랄이긴 지랄이노.."
"알았다.. 알았다... 내 알아서 할께~~~"
...
그렇게 다시 강릉에서 출발을 하며 연락을 했다.
아마 처음 만난 후, 두 달은 지났을 터였다.
"안녕하세요. 저 아시죠? 이번에 서울가는길인데.. 시간 되면 볼 수 있을까요?"
"네.. 좋아요.."
"그럼 6시에 그쪽으로 갈께요."
그렇게 약속을 잡았으나, 영동고속도로의 막힘이 사람 의지대로 되는가... 차가 밀리는 바람에 약속시간을 도저히 맞출 수 없었다.
"저.. 죄송한데 차가 막혀서 시간내로 못 갈거 같아요. 오늘은 못 볼거 같네요."
그러자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인가..
"아.. 안그래도 피곤한 터였는데.. 잘 됐네요. 그럼 다음에 봐요~"
그렇게 답이 왔다.
후후후.. 귀엽기는...
하지만 잘못은 내가 했고, 약속도 못지키는 실례를 범했으니 다음에 좋은데로 놀러가기로 설레발을 쳤고, 그녀는 거기에 흔쾌히 응했다.
..
사실 누나한테 들은 얘기로는 그녀는 나를 마음에 들어했다.
지금와서 와이프한테 그 얘기를 하면 "뭔 개소리야?"라고 육성으로 욕을 하긴 하지만...
그때는 분명히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처가집은 장인어른, 장모님 모두 작다. 우리집은 누나들도 모두 170이 넘고, 나와 남동생 모두 186인지라... 키가 큰 집안이다.
그녀는 그저 덩치 큰 놈이 이상형이었던지라.. 마침 그 나이에 그 시기에 그 날짜에 나를 만나게 된 것 뿐이었다. 뭐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고...
..
이후 그녀와 데이트를 몇 번 더하면서...
내가 그녀에게 씌운 깍지를 벗게 되었다.
그 깍지는 "너무 키가 작아서..."라는 깍지...
내가 뭔가 마음에 걸리는 단 한가지... 키가 작아서... 라는 그 이유를 벗어버리고 나니...
그녀의 모든 것이 좋았고,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
가장 좋은 이유는... 그녀의 집은 의정부, 나의 집은 청주. 주말데이트... 평일에 볼 수 없으니.. 평일에 내가 뭔 짓을 하고 다니던지 그녀는 몰랐으니까..
이후 결혼하고도 7개월을 주말부부로 살았으니, 3대가 덕을 쌓아도 제대로 쌓았나보다.
평소 친구들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는 나였으니, 술을 아예 못하는 그녀 입장에서는 그런 모습이 싫기도 한데, 내 실체를 그때까지는 몰랐으니까... ㅋㅋㅋ
...
나이도 나이였고, 결혼을 전제로 하는 만남이긴 했지만 내가 그녀와 결혼을 무조건 해야겠다라고 마음 먹은 계기가 있었다.
나의 남동생이 먼저 결혼 했듯, 그녀 역시 여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다.
나와 만나는 시점 이전에 이미 처제의 결혼날짜가 잡혀 있었고, 처제의 결혼날 처음으로 장인어른을 뵈었다.
정식으로 인사한것도 아니고, 그냥 차를 몰고 가서 아버님, 어머님을 식장까지 데려다 주는 역할이었는데...
아침에 그녀의 집앞으로 갔을때, 말은 들었지만 처음으로 나를 보는 아버님이 약간의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질문하신다..
"음.. 자네는 누군가?"
"아! 예... 저는 XXX 입니다."
미친~~ 군대도 아니고 바짝 긴장해서 관등성명이나 대고 있고...
약간은 어색하게 두분과 와이프를 태우고 식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축의금받기로 한 와이프의 외삼촌이 늦는 바람에.... 축의금 받을 사람이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눈치를 보던 내가
"아버님, 제가 돈 받을까요?"
그러자 마땅히 대안도 없었던터라...
"어..어.. 그래.. 자네가 좀 해주게~"
그렇게 신부측 자리에서 축의금을 받고 있는데, 우르르 몰려오는 일가친척들..
듣도보도 못한 놈이 부조금을 받고 있으니, 어르신들이 자네는 누군가하고 계속 물어보신다.
그럴때마다 아버님이..
"아.. 우리 큰 애 남자~"
그렇게 난 자연스럽게 이미 큰 사위처럼 되어버렸고, 친척들 사이에는 그렇게 굳어져 버렸다.
...
딸만 셋인 집의 장녀인 그녀.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다섯 가족인 그 집안의 분위기.
매우 화목!!
그 중에서도 결혼하고나서 한번도 떨어져본적이 없다던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돈독한 사이~~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처음 뵙고, 그 두분의 다정함을 보고 나서..
난 숨도 쉬지 않고 그녀와 결혼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이런 부부 밑에서 자란 자식이라면, 더이상 볼 것도 없고 잴 것도 없고 무조건 잡아야 한다!
그녀가 좋은것도 좋은거였지만.. 그녀의 집안 분위기는 더더욱 나무랄데가 없었다.
나는 옛말에 "결혼을 하려면 집안을 봐야한다"라는 것을 그때까지는 그저 상대방 집안의 돈같은 재산을 말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 집안의 분위기...
나의 판단은 정확했고, 덕분에 우리 부부는 아직까지는 큰 불화 없이 잘 살고 있다.
우리집에서는 며느리를 아들 구제해준 은인이라 생각하고, 처가집에서는 사위를 백년 손님으로 대해주시니 집안 분란은 전혀 없다.
...
뭐... 처음에 그 고운 입에서 욕하는 걸 귀엽다고 웃어주다보니 지금은 쌍욕으로 큰 발전을 한 마누라긴 하지만...
내가 늘 바짝 엎드려서 살고 있으니...... 아직까지는 매우 행복하다.... ㅋㅋㅋㅋ
...
간단히 쓰려다가 보니.. 글이 길어져서 읽을 사람이 있나 모르겠지만......
뭐.. 결론적으로...
결혼을 맘 먹은 계기는..
장인장모님의 다정한 모습!!
이것이 핵심이다. ㅎㅎㅎㅎㅎ
끄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