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정기
이정기는 신라가 삼국전쟁에서 승리하고 한반도를 통합한 뒤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고구려 출신으로 당에서 관직을 지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당 문헌에 따르면 이정기가 자신의 지역에서 징수한 세금을 당나라 중앙정부에 내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지방관리가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하나의 독립된 형태의 국가를 다스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정기 번진세력의 중심지역인 중국 청주시는 당나라의 번성했던 도시 중 하나다. 청주시지의 기록에 의하면 이정기의 군대는 병력 10만명에 달했고 그 주위의 번진세력이 그를 몹시 두려워 했다고 한다.
당시 이정기의 통치면적은 신라의 영토보다 넓었다. 인구수 또한 540만명에 달해 중국내의 번진세력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이었다. 청주를 중심으로 한 이정기의 관할지역은 주변 15개주에 달했다. 더욱이 그가 다스린 영토는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관리를 위임받은 땅이 아니다. 이정기가 군사력으로 전투를 통해 확보한 영토인 것이다.
이정기가 절도사가 된 것이 765년. 668년에 고구려가 패망한지 1백여년이 흐른 후이다. 이미 1백여년 전에 망해버린 나라의 후손이 어떻게 이렇게 강력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을까.
8세기 당나라 최대의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은 절도사가 된 뒤 그 세력을 키워 755년 대대적인 당나라 공격에 나선다. 그때 이정기의 나이 23세. 당나라 평로군의 군인이었다.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안록산의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은 평로군은 이정기의 지휘 아래 발해만을 건너 등주로 향한다. 그때 그의 군사 중 대부분은 고구려 유민이었다.
안록산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사력을 장악한 이정기는 평로치청절도사의 자리에 오른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막강한 군사력을 거느리게 된 이정기가 반기를 들고 일어날 것을 우려해 절도사 이외에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의 작위를 내린다. 이것은 당나라 조정이 바다를 통해 이루어지는 발해, 신라와의 외교업무를 이정기에게 맡겼다는 뜻이다. 이후 20여년간 발해와 신라의 사신단이 활발하게 중국을 오고 갔는데 이 업무를 모두 이정기가 관장한 것이다. 이정기의 세력은 이제 중원 대륙을 벗어나 발해와 신라, 일본에까지 이르렀다. 8세기 후반 동아시아 국제 무역의 중심은 이정기였던 것이다.
이정기의 독립왕국은 국제교역뿐 아니라 자체생산력으로도 큰 부를 획득했다. 이정기가 다스리던 산동성 일대는 곡물생산량이 당나라 전체 생산량의 10%이상을 차지하는 중국내 가장 비옥한 영토였다. 더욱이 중국 동쪽 해안가를 따라 거대한 염전이 조성돼있었다. 당시 소금은 황금에 비유될 정도로 귀한 특산물이었다. 따라서 당나라 전체 소금생산의 절반이상을 차지한 이정기는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아가게 된다.
그의 점령지역 중 밀주 체주에선 소금이 생산되고 해주와 연주 기주 등지엔 철과 동이 풍부했다. 체주 복주등에서는 당나라 전체 생산량의 30%가 넘는 비단이 생산됐다. 당나라의 주요물산을 이정기가 장악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당나라의 대외관계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먼저 신라가 당나라에 보내는 공식사절의 수가 줄어들었다. 양국간의 특별한 마찰이 없었다는 점을 놓고보면 이건 분명 이정기가 당의 외교관계를 차단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이정기가 서서히 당나라 조정에 맞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정기는 당나라 수도인 장안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운주로 근거지를 옮기고 대대적인 전쟁준비를 시작한다.
그는 왜 수도를 옮겼을까. 운주는 당나라 수도와는 직선거리로 아주 가깝다. 이정기의 목표는 당나라 수도였던 것이다.
이정기가 운주로 근거지를 옮기자 당황한 당나라 조정은 성을 쌓고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이정기는 10만 대군을 모아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정기는 성덕절도사 임명과정에 개입해 이유악을 절도사에 임명하라고 당나라에 요구한다. 이것은 당나라 황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전군에 용교와 와구를 반드시 사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이 곳은 지금 수백년에 걸친 토사의 유립으로 강이 사라져버렸지만, 대운하가 개통된 이후 중국 남부의 식량을 북부에 제공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역이었다.
이정기의 군대는 강을 따라 남하해 먼저 서주의 운하를 공격했다. 빠르게 서주를 장악한 이정기의 군대는 그 여세를 몰아 용교 부근에 집결해 들어갔다. 용교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이정기의 군대와 이를 막으려는 당나라 군사들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정기의 군대는 당나라 군사들을 격퇴시키고 장안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물길, 즉 서주와 용교의 운하를 점령한다. 그리고 당나라 장안과 낙양은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식량과 물자가 공급되지 않는 경제 대공황 상태가 벌어진 것이다. 물가는 뛰었고, 당나라 조정은 식량을 구하려는 백성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당나라 최대의 위기였다.
이렇게 운하를 손에 넣은 이정기에겐 대대적인 장안 공격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막바지 전투가 한창이던 여름, 뜻밖의 일이 발생한다. 이정기가 갑자기 병사한 것이다. 병명은 악성종양. 이정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정기왕국은 중국내 물산이 풍부한 경제의 핵심지역을 모두 손에 넣었고, 운하를 장악함으로써 중국 경제를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더욱이 바다를 통해 발해와 신라, 멀리 일본까지, 외교와 무역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8세기말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력적인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819년. 헌종의 대대적인 침공을 막아내지 못한 이정기의 왕국은 55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마감하고 만다. 중원대륙을 호령했던 이정기. 그는 패망한 나라의 이름을 150년간 연장시킨 마지막 고구려인이었다.
2. 백정기
4월29일은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의거'를 일으킨 날이다. 매년 이날이 되면 윤봉길의 `거룩한 뜻'을 기리는 행사가 다채롭게 진행된다. 난 윤의사를 기리면서도 백정기란 인물을 빼놓지 않고 되새긴다. 백정기가 누구인가. 아마 몇년전 개봉됐던 영화 `아나키스트'의 상징인물이라고 얘기하면 쉽게 이해가되는 인물이다. 항일 운동사에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저격수, 바로 그가 백정기열사이다.
그런 그가 `윤봉길 의거'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백정기와 윤봉길은 그날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일본군을 노리고 일을 준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소속이 달랐다. 엇갈린 두사람의 운명을 재구성해보자.
1930년대 상하이에는 여러 갈래의 독립운동 세력이 활동했다. 대표적인 것이 김구가 이끄는 임정과 한인애국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화암이 이끄는 남화한인연맹이었다. 말하자면 윤봉길과 백정기는 두 단체에서 뽑은 1932년 4월29일의 대표선수였던 것이다. 일본군이 거행한 `천장절 겸 전승축하대회'는 무슨 행사인가. 1931년 7월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대륙침략의 야수를 드러낸 일본은 그해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결국 다음해 2월 상하이 사변을 자행한다. 상하이사변은 대륙침략을 중국 본토의 심장부에서부터 본격화하려는 일제의 계획으로 현지를 근거로 하는 장치중(張治中) 근위부대와 공산당 19로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하지만 끝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사기가 오른 일본군은 일본왕의 생일을 맞아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행사는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정화암은 자신의 책에서 `이 조국 "오만무쌍한 일본의 기를 꺽어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고 우리의 민족정기를 보여주겠다는 우리의 결심은 대단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 때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라면 어느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윤봉길과 동시에 거사 준비에 착수한 백정기는 프로선수 답게 철저하게 준비해나간다. 한방에 행사장을 쑥밭으로 만들 폭탄을 준비하고, 행사의 식순도 완전히 파악했고, 행사장 지리도 눈을 감아도 알 정도가 됐다. 그리고 행사장에 마음놓고 들어갈 출입증도 잘 아는 중국인 동지가 구하기로 돼있었다.
백정기는 윤봉길보다 `빠른 거사'를 기획했다. 윤봉길은 그날 오전 11시 이후로 거사시점을 잡았다. 이는 행사장에 나올 외교관이나 일본군과 무관한 귀빈들이 퇴장한 뒤 일본군만이 모인 시점에 폭탄을 터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백정기는 이보다 빠른 시간을 택했다. 일본인 이외의 다른 외국인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미안하지만 조국을 강탈당한 조선민족의 기개를 보여주는 마당에 그런 것까지 고려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경쟁단체보다 먼저 일을 성사시키자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백정기에게 문제가 생겼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거사 당일날 행사장 주변에서 출입증을 가져온다던 중국인동지를 기다렸으나 끝내 중국인은 오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이 지나가고 말았다. "절호의 기회를 날리는구나"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훙커우 공원을 뒤흔든 폭파소리가 들렸다. "아, 나 대신 다른 조선인이 일을 성공했구나. 틀림없이 임정측 한인애국단원이 했을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백정기는 서둘러 몸을 숨겼다.
윤봉길은 거사 후에 도망가려 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현장에서 체포됐다. 하지만 당시 상하이 상황을 잘아는 일본군은 `이번 일은 반드시 백정기가 관련됐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백정기를 잡으려 백방으로 추격했다. 그 정도로 이 방면에서 백정기는 그야말로 프로였다. 임정의 김구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들 기나긴 피난길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상하이를 근거로 하는 남화연맹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된다.
정화암의 회고 등으로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윤봉길은 당시 백정기 만큼 치밀하지 못했던 것같다. 백정기가 출입증을 구하려고 애를 쓰고 있을 때 김구와 윤봉길은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과 물통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들어가서 거사하고, 못들어가면 행사장 근처에서 폭탄을 터뜨리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단순한 계획을 짰다고 한다. 어떤 일이든 이번 행사를 작살내면 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던 측은 거사에 결국 성공한 것이다. 반면에 완벽한 계획을 추진했던 백정기는 행사장에 입장도 못하고 후일을 기약한 것이다. `전쟁끝에 치르는 중요한 행사, 그것고 천황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이니 얼마나 경비가 철저할 것인가'를 지레 짐작한 백정기와 정화암은 너무 복잡했기 때문에 일을 성공하지 못했다. `역사는 단순한 자가 일을 낸다'는게 무슨 말이겠는가.
만일 백정기에게 어찌됐든 출입증이 주어졌다면 그날 폭탄투척은 그가 먼저 했을 것이다. 그러면 매년 4월29일은 `윤봉길 의거 기념일'이 아닌 `백정기 의거 기념일'이 됐지 않았을까. 역사는 `거사를 성공한' 윤봉길만을 기억하는 것인가. 백정기는 그의 활약상에 비해 너무나 잊혀진 존재가 돼버렸다. 한때 중국 국민당의 거두인 장제스 마저 암살대상에 넣었던 프로 저격수 백정기, 그는 매년 4월29일 지하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백범선생은 광복후 윤봉길과 이봉창(두분 다 한인애국단원임) 과 함께 백정기 열사의 유해를 조국으로 봉환했다. 3의사의 유해는 지금 효창공원에 모셔져있다. 경쟁단체의 행동요원인 백정기 열사를 모셔온 김구 선생의 `폭넓은 사랑'을 느낄 수있는 대목이다.
얼마전 베스트에 올라온 이회영의 자료를 봤습니다. 그런데 이회영과 함께 아나키스트 활동을 한 백정기 의사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자료를 찾아 올려봤습니다. 바로 아래 사진이 구파 백정기 의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