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28살이고, 올 6월에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입니다.
예비신랑과는 1년 반을 사귀었고, 저보다 나이가 3살이 많습니다.
결혼준비에 돌입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기에 아직 예신, 예랑이라는 표현이 다소 어색하네요..
예비신랑은 컴퓨터를 전공했고, 지금 게임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래머 라고 불러야되는지, 개발자라고 불러야되는지... 그냥 통칭 프로그래머라고 부릅니다.
IT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나신 분들은 아실거예요. 출퇴근이 대중없습니다.
바쁠 때는 회사에서 밤새기도 일쑤지만 그래도 저에게 최선을 다해 노력해주는 게 참 고맙습니다
저도 사회생활 하는 사람이기 떄문에 직업상 바쁜 문제로는 한번도 뭐라 한 적 없구요.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축구를 하고, 좋아하는 게임을 하는 것 역시 이해했습니다.
저도 게임에 대해 아주 문외한은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이 하는 게임을 같이 하기도 했구요.
아무튼 그렇게 저희는 별 문제없이 만남을 지속했고, 나이가 있으니 상견례를 하게 되었고,
얼마전부터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날짜를 빨리 잡게되어 좀 급하게요.
그런데 이 사람이 어디서 프로포즈를 꼭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나봅니다.
여자 입장에서 당연히 좋고 고마운 일이죠. 평생에 한 번 뿐인 프로포즈니까요.
거창한 거 바란 것도 아닙니다. 물로 여자 마음이야 끝도 없지만 ☞☜
그런데 ... 지지난 주 왠일로 야근을 하지 않아 평일에 저녁을 함께 먹게 되었습니다.
밥집에서 밥을 시켰는데.. 갑자기 제 손을 잡더니 이렇게 말하네요.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내가 이제부터 너한테 프로포즈를 할거야. 나는 니가 너무 좋고 어쩌구 저쩌구.."
김이 펄펄 날리는 낙지덮밥이랑 제육덮밥을 앞에 두고 장미꽃 한 송이도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더라구요.
나중에 자기 혼자 신났는지, 자기네 회사 팀장님한테 들은 얘기라며, 꼭 프로포즈를 해야 한다더라.
이러면 프로포즈 한거지? 라며 앞에서 말하는데 숟가락으로 마빡을 한 대 치고 싶었습니다.
받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안 받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결국 하루이틀 지나서 오빠 솔직히 나 쪼끔 김이 샜는데.. 아무리 그래도 평생에 한 번 하는 프로포즈인데
똑같은 말 한마디라도 좀 분위기 좋은 곳에서 해주면 안되는 거였냐, 꼭 덮밥집에서 해야하는 얘기였냐, 카페에서라도 했으면 좋지 않았겠냐...
그래도 본인은 프로포즈라고 한건데 함부로 말하면 기분 상할까봐 좋게 좋게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며칠 전, 저에게 써프라이즈로 두 번째 프로포즈를 해주었습니다.
사이버 세상에서요. 게임 같이 한다고 했잖아요..
간만에 게임 좀 같이 하자고 해서 알았다고 하고 접속했더니 공지창이 뜨대요
제 아이디와 예랑이 아이디가 뜨면서.. 무슨 파티가 열린다고 어느 맵;; 으로 오라고....
화려하네요.
화려합디다.
정말로.
얼마나 게임머니를 쓰고 현찰아이템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으리으리하게 꾸며놓고..
(그 게임에 캐릭터끼리 결혼을 할 수 있는 그런 제도;; 가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아이템들이 있어요..)
본인 회사의 모든 동료 프로그래머(그 게임을 열심히들 하는...) 들과
게임 상에서 알게 된 다른 유저들(저는 모르는....) 이 정말 바글바글하게 모여있고
그렇게 수십, 수백의 사람이 아닌 캐릭터들 앞에서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저보다 다들 게임을 많이 하시는 분들이니 아주 뭐 저는 듣도 보도 못한 아이템들을 쓰시는지
각종 이벤트 효과들로 제 노트북 모니터는 막 번쩍번쩍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각종 현실세계에서 찾아보기도 힘든 각 직업의 고수;;;;들께서 막 자신들의 기술을 써가며 화면을 더 번쩍번쩍하게 만들어주시고...
막 아이템 선물도 보내주시고... 게임머니 선물도 보내주시고...
저 부자됐어요.
30분도 안되는 시간동안 제가 벌어들인 돈이 얼만줄 아세요?
무려 7천만이 넘습니다. 장난아니죠???
현실에서는 700원만큼도 안되는 빌어처먹을 거죠.
감사하다고.. 와 신난다 감사해요..... 라며.
그렇게 전설의 용사들 앞에서 약혼을 했습니다.
여기에 글 쓰시는 분들처럼 저도 담담하게 제 이야기 쓰고 싶었는데
두 번쨰 프로포즈에서는 정말 감정이 좀 자제가 안 됐네요.
저 정말 너무 속상합니다.
본인이 일하는 회사와 본인이 만나는 사람들이 아무래도 IT와 게임업계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쪽에서는 다소 쇼킹하면서도 엄청나게 획기적이고 신선한 프로포즈를 했다고 자랑인가봅니다.
저는 어디서 말도 못하겠는데요.
제 주변에 요트를 빌려 프로포즈 받은 사람도 있고,
여자친구 발을 씻겨주는 이벤트를 벌인 사람도 있어요.
저도 손발이 오글거리는 거 싫어하고 쓸데없이 과장된 것도 싫어해서 저런건 저도 싫지만
그저 조용한 차 안에서 조용히 내 손 붙잡고 야경 바라보며 결혼해줘, 라고 말하는 거.
그거 하나 바라는 게 이렇게나 그릇된 욕심인가요.
창피하고 속상하고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이걸 31살 먹은 남자가 하는 짓이라고 누가 믿기나 하겠습니까. 저도 돌겠습니다.
그런데 '콜라 자판기를 혼수로 요구한 예랑님' 이야기를 보고 ..... 위안이라도 얻어볼까 하고...
써봅니다...
저 정말 환장하겠습니다.......
nate 판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