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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한지 15년쯤 된거 같은데, 기억나는대로 재미있었던 이야기들을 해볼까 합니다.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틀리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라며,
100% 실화를 바탕으로 글을 엮어가기 위해 반말체를 사용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1993년 봄.
집안 어른들이 거의 해병대 출신으로,
"해병이 아닌 자, 제삿상에서 절하지 말라." 라는 한마디에 해병대에 지원을 하기위해 부산병무청으로 갔다.
시력 미달로 당당하게 탈락하고, 현역병으로 입소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94년 봄. '94년 4월 13일자. 춘천 102보 입소하셈'이라는 영장을 받고서
남은 한달간 온세상의 술은 몽땅 다 빨아주리라는 각오로 대학친구,고교친구,여자친구,사회친구들과
계속 술자리를 갖다가 불의의 사고로 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정확하게는 오른쪽 팔꿈치가 부러지면서,
그해의 입대는 또 물건너 갔다.
-불의의 사고는 대단한건 아니고 길 가다 미끄러졌는데, 뭔 낙법을 할거라고...암튼 그리됐다.
96년 여름. '96년 9월 17일자. 의정부 306보충대. 마지막임!!'이라는 영장받고 입소했다.
이미 나이는 23살이었고, 친구들은 거의 제대를 앞둔 시점.
난 일일이 찾아댕기며, 입소할때 배웅했건만, 내가 갈때는 서울에서 전경으로 복무중이던
주 모상경뿐이었다.(이 친구없었으면, 찾아가지도 못했을거다. 306보충대....)
-여자친구도 있었지만, 이미 딴넘에게 시집간지 오래되었으므로 기억에서 삭제.
입대전에 친구들에게 많은 것을 듣고 배워놨으므로, (PX에서 총기와 탄약을 사야된다는 그런 개소리는 제외)
긴장 반, 설레임 반으로 입소대에서 뭐 이것저것 신체검사 등등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웃고 넘길 일이지만,
입소대에서 군의관이 한 한마디.
"자네, 면제는 되는데, 의가사 제대는 안되네."
팔꿈치 이야기였다.
"알고 왔습니다."
사실, 면제가 될 사유인지는 몰랐다.
-남자는 그래도 군대를 갔다 와야지? 라는 당시 여자친구(지금은 부도수표가 된...)의 아버지의 한마디에
어떻게든 군대는 현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똥찌그리한 트럭이 오면 후방. 삐까뻔쩍한 버스 오면 (님 줘때쓰요) 전방.
친구들의 말이었다. 근데, 3일째날 입소대 연병장에 나가보니 트럭은 2대뿐. 나머지는 전부 관광버스였다.
그것도 당시에는 최신형 창문이 열리지 않는 관광버스. 개성까지 끌고 갈 생각인가?
아무튼, 버스를 탔다.
1시간 남짓 달렸는데, 잠도 오지 않고, 경기도 북부지역은 처음 보는 터라 긴장도 많이 되었다.
달릴때는 몰랐는데, 그날 좋다는 관광버스는 전부 그 부대로 와 있었다.
연천의 열쇠 모 사단의 신병교육대대(이하 ‘신교대’)가 여름 장마때 떠내려가서 위탁교육을 하고 있었다.
태풍 모 사단, 비룡 모 사단, 불무리 모 사단 등지로 신병들을 보내 교육 후 부대로 복귀시키는 방식.
#. 중대선임을 하면 퇴소식날 휴가 보내준다.
그렇다고 들어서, “목소리 큰놈 앞으로 나와.”라는 말에 후다닥 나갔다.
그런 정보를 알고 있는 놈이 10여명 되는거 같았다. 일단, 타고난 성량으로 중대선임은 되었으나,
외모 때문에(젠장~) 사열식 선임에선 제외되었다. 대놓고, 뚱뚱해서 보기 싫다고 했다.
사고만 치지 않으면, 휴가증은 확보가 된 상황이었으니 그러려니 했다.
군악대 선임하사가 입소식이 끝났는데도 가지 않고 남아서는
“악기 다루거나, 악보 볼 줄 아는 사람 거수!”했다. 손을 들었다.
“악보 볼줄 알고 피아노 한 6년 쳤습니다.” 일단, 모르는 인간들에겐 큰 소리 치는게 장땡이다.
“음.......”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선임하사는 사라졌다.
(당시, 이 선임하사는 중사 11호봉이었는데, 후일 글쓴이와는 연적관계가 된다. 썅~)
아무튼, 남들 다 아는 전투식량 비빔밥을 첫끼니로 때우고 내무실로 고고씽했다.
이번 병력은 총 4개소대 198명으로, 8중대에 배속되었다.
내무실에 들어가자마자 6주간 친하게 지내야 될 인간들인지라 서로 학연 지연 따지기 시작했다.
울산출신이 70%, 청주출신이 30%인 특이한 구성이었다. 이제 출신학교를 따지기 시작했다.
마침, 울산 U고 출신이 나를 포함 2명. 방어진 H고 출신이 1명이었다.
U고출신이라는 녀석이 나한테 먼저 말을 꺼냈다.
“넌 몇회냐?”
“그러는 넌?”
나이로는 꿀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녀석의 눈을 쳐다봤더니,
‘이자식이 선배한테 감히 반말을 지껄...쳐맞.....봐야 정신을 차릴...?’하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37회다.”
맞을까봐 얼른 대답해줬다. 그때의 그 똥씹은 표정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38회.....입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선배님.”
그 후배덕분에 내무실 생활은 참 편하고 윤택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198명중에 U고 동문이 17명이었는데, 하필이면 가장 고참인 나와 같은 내무실이 되었고,
다른 내무실에 배치된 15명은 전부 39기였다. 지 운이 그거밖에 안되는 거겠지만.......
훈련소와는 달리 신교대는 상당히 널널했다.
낮 기온이 30도를 넘어가면 땡볕에서 훈련을 하지 못하게 한 사단장의 지시도 있었고,
여름의 물난리로 인해서 수해복구가 덜 되어, 대민지원이나 복구작업에 지원도 나갔다.
5~6주차가 될 무렵에는 조교들과도 허물없이 친구처럼 지냈다.
병장들은 엇비슷한 나이였고, 신교대를 벗어나서 자대로 배치되면 ‘아저씨’가 되는 특성상.
아무튼, 6주간의 훈련이 끝나고 4박5일짜리 휴가를 갔다.
꿀같은 휴가를 5일 내내 몸살만 끙끙 앓다가 신교대로 복귀했다.(가장 원통한 휴가였다)
6주동안 바짝 긴장하고 있다 해방되니 몸이 그대로 퍼져버려서 몸살이 난것이었다.
원래는 조교로 차출 1순위였는데, 자대를 ‘사단본부’로 배치받는 바람에 조교는 물건너갔다.
조교.....엄청 편해보였는데........아무튼 물건너 갔다.
휴가자가 총 열댓명 정도였는데, 나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모두 예하대라서 일찌감치 떠났고,
가까운 사단본부에선 아직 인솔자가 오지 않아 나만 덩그라니 내무실에 남아있었다.
내무실에는 논산에서 후반기교육을 받고 올라온 신병들이 있었다. 7월 군번들....
그 중에 한 친구가 알고보니 U고 2년 후배였다. 논산에서 못 피워봤을 담배 몇까치 주면서,
“건강하게 군생활 잘 하고, 인연되면 밖에서 보자.”라며 다독거려줬는데.....
그날 저녁, 나는 군악대로 끌려갔고,
그 후배 녀석은 3일뒤 사단본부로 배치되어 왔다. (젠장~)
차라리 몰랐으면 덜 피곤했을텐데, 괜히 아는척해서 군생활이 꼬이기 시작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 내용이 길면 안본다는 이야기에, 나름 줄이고 짧게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재미가 없어져버리네요.
이등병~병장 까지는.....욕 안하신다면 올리도록 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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