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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가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2월8일 0시를 기해 긴급조치가 해제되자 사람들은 더디지만 이제야 민주화가 시작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느낌은 며칠 가지 않았다. 12월12일 저녁 한강 이남에서 강북으로 귀가하던 시민들은 계엄군이 당시 11개였던 한강 다리를 모두 차단하고 차량통행을 허락하지 않음에 따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착수에서 완료(이듬해 5월17일)까지 세계에서 가장 길었던 쿠데타라 불리는 12·12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날 저녁 계엄사의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이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김재규의 공범으로 의심된다고 연행한 것이다. 정승화는 김재규의 강력한 추천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된데다 김재규가 10·26사건 당일 궁정동 안가에 불러 두었기 때문에 김재규와 어떤 공모를 한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선제공격으로 결정타를 날린 것은 전두환이었다.
박정희는 자신과 고향이 같은 영남 출신들을 중용했다. 전두환은 5·16 직후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5·16 지지 시위를 조직하여 박정희의 눈에 든 이후 청와대 경비를 맡은 30대대장, 공수1여단장,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1사단장, 보안사령관 등을 지내며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다.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인 그가 10·26사건의 수사 책임자인 보안사령관이었다는 점은 향후의 사태 진전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10·26사건은 유신정권의 실제 권력서열 1위에서 4위에 해당하는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경호실장, 비서실장이 모인 자리에서 정보부장이 대통령과 경호실장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유신체제의 정점에 갑자기 엄청난 권력의 공백이 발생한 것이다. 이 공백기에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한 사람은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와 보안사령관으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이었다. 10·26사건은 법적으로 살인사건이었기에 수사책임자인 합동수사본부장의 권한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합동수사본부장의 상급자인 계엄사령관이 살인사건의 공모자로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정승화로서는 매우 억울한 일이었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김재규를 남산의 중앙정보부가 아닌 용산의 육군본부로 이동하게 함으로써 김재규의 의도를 좌절시킨 장본인이었다.
정승화가 의심을 받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정승화는 전두환에게 권력의 쏠림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보았다. 정승화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서 해임하여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좌천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보안사는 감청을 통해 이 계획을 알아버렸다. 늘 군부쿠데타를 경계해 온 박정희 체제에서 보안사는 막강한 기구였지만, 10·26사건 이후의 보안사는 어제의 보안사가 아니었다. 계엄령으로 보안사를 중심으로 합동수사본부가 편성되면서 보안사는 검찰과 경찰을 통제하게 되었다.
평상시 보안사를 견제할 수 있던 유일한 기관인 중앙정보부는 그 수장이 대통령을 살해함에 따라 완전히 역적기관으로 몰려 보안사에 장악되었다. 보안사의 실제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정승화는 쿠데타 방지가 주된 임무인 보안사가 군의 정보채널을 독점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니 계엄사령관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육군대장에서 졸지에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보안사에서 물고문까지 당했다. 대통령과 중앙정보부, 경호실, 비서실이 모두 무력화된 상태에서 합동수사본부 직제를 통해 검찰과 경찰을 장악하고 군사반란을 일으켜 계엄사령관까지 제압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최고의 실세로 떠올랐다.
“유신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박정희 한 사람이 없어지면 그대로 없어질 것”으로 보았던 김재규는 유신의 머리를 자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머리 잘린 유신이란 괴물에게 새로운 머리가 솟아났다. 박정희의 정치적 사생아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김재규를 베고 광주를 피로 물들였다. 박정희의 뒤를 이어 결국 이 나라를 13년간 통치한 전두환과 노태우는 각각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와 행정차장보를 지낸 박정희의 근위장교들이었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흔적을 지우고 새 시대를 표방했지만, 그것은 박정희 없는 박정희 시대였다.
김재규는 12월18일에 행한 1심 최후진술에서 민주화를 향한 정치 일정을 밟지 않는 최규하를 향해 “자유민주주의는 대문 앞에 와 있는데 문을 열지 않고 있다. 절대로 자유민주주의 때문에 혼란이 오지 않는다. 빨리 정권을 이양하여 혼란을 막아라”고 촉구했다. 김재규는 “빨리 민주회복을 하지 않으면 내년 3, 4월경 전국적으로 민주회복운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최규하는 무엇을 적극적으로 해서가 아니라 이 결정적인 시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전두환의 등장과 유신의 부활을 위한 카펫을 깔아 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가 이리 클 수는 없었다. 시중에는 전두환 고스톱이 등장하고 또 최규하 고스톱도 나왔다. 전두환 고스톱은 싹쓸이를 하면 피가 아니라 자기가 갖고 오고 싶은 것을 아무거나 한 장씩 가져오는 것이었다. 최규하 고스톱은 싹쓸이를 하면 자기 피를 상대방에게 한 장씩 주는 것이었다. 고스톱 판에서는 최규하 고스톱을 치면서 낄낄댈 수 있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했다.
법정의 김재규는 당당했다. 처음 인권변호사들은 아무리 독재자 박정희를 처단했다고 하지만, 민주인사를 탄압한 중앙정보부의 수장을 변호해야 하느냐며 김재규의 변호를 마뜩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재판이 진행되면서 변호사들은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에 대한 김재규의 진정성과 인품에 매료되었다.
김재규는 “대장부로 이 세상에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죽을 수 있는 명분을 발견”했다고 생각했기에 법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부하들만큼은 꼭 살리고 싶어했다. “혁명 이념에 완전히 동조한 사람이면 저세상에 데리고 가도 좋지만 아무것도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죽는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었다. 김재규는 옥중 수양록에서 “지금까지는 자신의 정당성 주장으로 죄책감 못 느꼈다”고 했지만, “이제 저 얼굴들 보니 죽고 싶다. 하루빨리”라고 썼다.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김재규는 박정희를 쏘았지만, 박정희의 명예만큼은 지켜주고 싶어했다. 그는 법정에서 박정희에게 여자 연예인을 불러다 주는 일을 담당했던 박선호가 윤창중이 한 짓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박정희의 여자 문제에 대해 진술하려 하자 뒤를 돌아보며 “야, 하지 마”라고 제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현역 군인으로 박흥주가 단심으로 사형을 선고받자 흔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80년 2월15일(음력 12월29일)자 수양록에서 “전원을 구제하는 방법이 대국민 여론에 달렸다고 하면 사실만은 공개해 주어야겠다”며 “물론 돌아가신 분의 명예를 생각하면 가슴은 아프다. 그러나 저 젊은 생명 여하히 하겠는가”라고 번민했다. 김재규도 박선호도 박정희의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최근 어떤 인기 여성 연예인이 일베들이 쓰는 방식으로 ‘민주화’를 부정적으로 사용하여 논란이 벌어졌다. 김재규의 거사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지만, 여성 연예인들이 저런 식으로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큼은 확실히 차단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의 구명을 호소하면서 우리의 민주화가 김재규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민주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그 여성 연예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또다른 10·26사건이 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이 1909년 10월26일이었다. 70년을 두고 두 개의 10·26사건이 있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군사독재가 왔는데,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이토의 제삿날과 군사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의 제삿날이 같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안중근도, 윤봉길도, 김재규도, 아니 저 멀리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인 <자객열전>의 형가도 장부 또는 장사를 노래했다.
분단과 전쟁과 학살을 거치면서 너무 얌전해진 탓인지 진보진영에는 대의를 위해 제 몸을 불태우고 제 피를 흘린 열사들은 일일이 이름을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넘치지만, 제 목숨을 바쳐 적의 피를 흘리게 한 의사는 단 한명도 없었다. 오른쪽 동네라고 사정이 다른 것은 아니다.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졌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는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김재규는 대가 끊겼던 한국 보수우익의 계보학에서 돌출한 마지막 대륙형 인간이었다.
김재규는 5·16과 유신이라는 박정희의 내란에 동행했으면서도 결국 이 내란을 종식시켰다. 김재규의 행동을 내란 목적 살인으로 몰고 간 것은 전두환의 내란이었다.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는 말로 국민들에 대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김재규가 사형당한 것은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한창이던 1980년 5월24일이었다. 김재규를 죽인 전두환은 광주시민들의 항쟁마저 짓밟고 생명이 다한 것 같았던 유신체제를 간판만 바꿔달아 신장개업했다. 전두환의 내란은 그렇게 완성되었고,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아직도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해보지 못했다. 대한민국이 박정희와 유신의 망령을 떨치고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게 될 때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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