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잉여시간이 남는 날이다. 나는 진모 허모 선생처럼 전업 논객이 아니라 한 편의 글을 공들여 쓸 수 없다. 그러니 잉여시간 남는 날 여러편을 우루루 쓰는 수 밖에. 그러니 꼼꼼하게 논지를 다듬고 하는 건 기대도 못한다. 오타나 안 나길 바랄뿐(그런데 많이 난다.)
요즘 나꼼수 대세론에 대해 논객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고, 그게 또 화제가 되고 있다. 사실 나는 "논객"이 대체 어떤 사람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논문 쓰는 사람은 아닐테고. 그렇다고 문학작품을 쓰는 사람도 아닐테고. 주장이 담긴 글을 직업적으로 쓰는 사람이라면 저널리스트, 칼럼니스트일텐데, 굳이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저 말을 쓰지 않고 "논객"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까닭이 뭘까? 논객들이 대체로 PD출신인 것을 보면 "우리말 사랑하기"의 민족정신의 발로도 아닐테고.
어쨌든 이 특별한 종류의 글쟁이들이 나꼼수를 까기 시작했다. 심지어 허지웅은 나꼼수에 대한 건전한 비판이 없는 현상을 개탄했다. 허지웅은 슬기롭게도 나꼼수 자체를 까는게 아니라 김어준을 다른 세사람과 분리해 내고, 김어준만 집중적으로 무책임한 선동꾼, 반지성주의자로 매도했다. 굳이 따지면 김어준을 매도한것이 아니라 유사 메시아 기질이 강한 김어준의 반지성주의적 위험을 지적하지 않은 지식인들을 매도했다. 반면 김규항은 주둥아리로만 주절대는 나꼼수따위가 뭐냐 우리끼리 낄낄거리는건 가치없다. 나가자 투쟁이다, 실천이다 라면서 어김없이 도덕적인 질타를 했다. 진중권이야 이미 널리 알려진 바 대로 나꼼수만 적당히 패는게 아니라 곽감을 검찰 이상으로 두드려 패다가 오히려 진보인사들에게 뭇매를 맞고 잠시 은퇴했다.
"논리가 통하지 않는 시대"를 개탄하거나 "반지성주의"를 개탄하는 것을 보면, 이들 논객들은 자신들이 "논객"이니만큼 "논"으로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대중들이 그들의 "논"에 열광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그들은 전문적인 "논"을 펴기에는 함량 미달이다. "논"이라고 하는 것이 약간의 논리와 말재주로 글 한편 이어붙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문"과 "에세이"를 어떻게 구별하는가를 보면 "논"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논문은 사용하는 개념들마다 의미를 명확히 규정하고 오개념 여부를 진단하고, 제시하는 인용이나 자료마다 그 타당성과 신뢰성을 따져가면서 쓰는 글이다. 이렇게 따지는 과정이 논 하는것이며, 논한 결과물이 논문이다. 그러니 "논객"이라 불리는 분들은 "논"하는 분들이 아니며, "논리"의 진영을 대변하지도 못한다. 굳이 따지자면 최장집, 김동춘, 김기원, 선대인 그리고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김용옥 이런 분들이 논객이다. 물론 그 전문성 범위 안에서만 논할수 있으며, 그 범위를 벗어나면 다만 일반인의 비평이나 감상에 불과하다. 예컨대 선대인은 경제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논객이지, 교육에 대해 뭐라고 주장을 할때는 논객이 아니다. 만약 교육에 대해서도 논객이 되고자 한다면 그 전에 충분한 소양이 있음을 누차에 걸쳐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논객이라 흔히 불려왔던 진중권, 허지웅 같은 분들은 전문분야 밖의 글을 주로 쓰거나 아니면 아예 전문성의 범위가 없다. 진중권이 쓴 칼럼, 포스팅, 트윗 단문들을 모집합으로 한 뒤 무작위로 100개만 표집한 뒤 표집된 글들을 주제별로 분류한다면 아마 "미학"에 대한 것이 가장 적을 것, 아니 거의 없을 것이다. 허지웅, 김규항 이런 분들은 아예 전공 미상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분들이 쓴 글들의 거의 대부부은 "논"한 것이 아니다. 아, 내가 쓰는 이 글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그냥 감상문이다. 하지만 내가 교육에 대해 말하고, 교육운동에 대해 말하고, 또 사회학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그때는 "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글들은 아마도 내가 썼던 곽노현 관련 글, BBK관련 글들보다 현저하게 인기가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 사용되고 있는 "논객"이라는 용어가 워낙 보편화되어 다른 용어로 굳이 바꿀 이유가 없다 치더라도 이들을 "논"하는 사람들로 한정지어서는 안된다. 논객은 논하는 사람을 넘어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들이다. 더군다나 정치분야는 전문적인 영역이 아니라 공공의 영역이기 때문에(행정과 정치는 다르다) "논"할 줄 아는 사람들만 정치에 대해 말을 하고 글을 쓸 수는 없고 그래서는 안된다. 사실 정치영역 논객에게 "논"의 요소는 결정적이지도 않다. 반지성주의니 논리가 통하지 않는 시대니 하고 한탄해도 정치라는 영역은 거의 예술에 가까운 영역이며 비전을 미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집단이 이기는 영역이다. "논"하는 정치가는 인기 없다. 마찬가지로 정치판에서 "논"하는 논객도 인기 없다.
그러니 흔히 논객이라고 불리며 대중들의 인기와 관심을 끌었던 분들이 대중들의 호응을 받고 심지어 팬덤까지 이룬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이들이 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진중권이 발터 벤야민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쓴 글에 관심 가질 사람이 몇명이나 되겠나? 그가 쓰거나 배출한 문장들은 "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기를 끌었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논"했으면 대중들은 하품을 하며 그들에게서 떠났을 것이다.
논하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을까? 그들이 김어준을 개그맨, 선동가라고 부르는 상황을 보면 또 역설이지만 그들은 개그를 하고 선동을 했다. 대중들이 그들에게 열광했던 까닭은 세상의 여러 현상 이면에 있는 진리를 진지하게 배우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대중들은 통쾌하고 즐거워서 그들에게 열광했다. 그들이 재수없는 수꼴, 꼰대들에게 말펀치를 날리고, 수꼴들이 그 말펀치 앞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쩔쩔 떠는 꼴을 보니 즐거웠을 뿐이다. 보수 엘리트들의 권위적인 언변 앞에서 찍 소리 못하면서 억울함에 치를 떨때, 그들을 통쾌한 언변으로 박살을 내어주니 통쾌했을 뿐이다. 무섭고 두렵던 엘리트들을 말 한 두마디로 희화화 해서 조롱해 주었기 때문에 열광했던 것이다. 그들은 키보드 워리어였으며, 키보드 개그맨들이었다.
나는 여기서 개그를 결코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몽테스키외가 말했듯이 조롱과 경멸이야말로 억압과 독재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무기이기 때문이다. 두렵고 억압적이던 대상을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면 어떤 독재정권도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이 사실은 같은 중화권이라도 대만 드라마와 중국 드라마의 기본 코드가 어떻게 다른가를 보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웃음이다. 그리고 우리의 논객들은 바로 웃음을 주었다. 진중권이나 여타 논객들이 수꼴을 공격하면 관전하는 대중들은 "송곳 작렬! 변희재 떡실신! 조갑제 혈압 상승!~" 이러면서 즐겼던 것이다. 대중들은 그들이 수꼴들에게 "빅엿"을 작렬하는 것을 즐겼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그토록 비판하는 나꼼수와 기능적 등가물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나꼼수가 그들보다 훨씬 진화된 형태라는 것 뿐이다. 어떤 식으로 진화했을까? 다들 주지하다시피 그들은 그들의 웃음을 유포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망을 찾아내었다. 신문사 칼럼을 얻으려고 기웃거리지 않아도 되고, 140자 트윗 글자 제한때문에 쪼잔해지지 않아도 되는 팟 캐스팅을 찾아 낸 것이다. 또 그들은 조롱하고 희화화 하는 것이 논객의 가장 큰 무기라는 점을 직감했다. 그리고 점잖게 지성인 흉내를 내면서 조롱할 것이 아니라 아주 대어 놓고 조롱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어느정도 문어의 필터링을 거치기 마련인 글보다는 생생한 육성이 대 놓고 조롱하기에는 보다 효과적이다.
촛불이 사그라들고, 우리나라가 민주국가라고 믿었던 보루들이 하나 둘 거의 중국 수준으로 망가져갈때, 그래서 담이 꺾이고 기가 사그라든 국민들에게 육덕진 목소리로 그 억압자들을 껄껄거리며 조롱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퍼져나갈때 거기에 열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열광할 뿐 아니라 "저 사람들 저러고도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멀쩡하다. 그리고 그들이 멀쩡한 만큼 2008년 이후 겁먹고 흩어진 대중들은 다시 용기를 되찾는 것이다. 메시아주의라고? 이런 의미에서라면 그들은 메시아 맞다. (나는 결코 부화뇌동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월드컵 기간 중에 축구국대에 열광하는 길거리 응원에서 파시즘을 우려하는 글을 썼다가 성지순례관광을 당한적도 있는 사람이다. 무비판적 메시아주의를 비판하는 진, 허 양씨가 월드컵 현상에 대해 대회 기간중에 균형잡힌 글을 쓴 적이 있던가?)
메시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나꼼수가 눈물나게 고마운 사람들 중 하나다. 고마운 이유는 둘이다. 하나는 싸움을 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논객들은 아직도 우리가 87년 체제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논리적이고 도덕적(!)으로 토론을 통해 반대 논리를 하나 둘 논파해 나가고 우리편을 하나 둘 설득해 내는 정도를 고집한다. (사실 정작 그들도 그렇게 해 오지 않았다.) 하지만 87년 체제는 이미 다 무너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는 그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상대는 87년의 성과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독재잔당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설복의 대상이 아니라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이다. 도덕이 아니라 전술이 요구되는 시기이며 순결성이 아니라 쪽수를 늘려야 되는 시기이다. 그런데 모두가 쫄아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때, 이렇게 대중들이 쫄아 있어서 손쉽게 노출된 대장들이 하나 둘 참수될때(곽노현의 참수는 치명적이다. 이게 치명적이지 않고, 곽노현을 쉽게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학교에, 교육에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쫄지마, 저 새끼들 졸라 허접이야!" 하고 대담하게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고맙겠는가? 설사 그 말이 거짓 선동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나중에 역풍을 맞게 될지라도 말이다. 나는 쫄아서 탄압 받느니 한번 화끈하게 게겨보고 역풍을 받는 쪽을 선호하겠다.
다른 하나는 제대로 빅엿을 먹여주기 때문이다. 기존의 논객들이 먹이는 빅엿은 주로 저들의 대장이 아니라 그들의 쉴드전담 똘마니들을 향해 작렬했다. 그리고 그 빅엿의 종류도 주로 말뒤집기, 말꼬리잡기, 논리로 뭉개버리기 등 주로 말과 관련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나꼼수팀은 국회속기록과 탐사보도자료들을 통해 아주 "구체적인 빅엿"을 "몸통도 아닌 머리"를 향해 연달아 먹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빅엿을 드신 분이 이렇다할 반격도 못하는 것이다. 아니, 저 논객님들은 이 순간 통쾌함과 즐거움이 아니라 "역풍이 오면 어쩌지?" 걱정부터 들었단 말인가? 아 참, 진중권은 17회 빼곤 안들었다고 했지? 하나를 들으면 23개을 아는 대 천재....
논객들은 예전에 다소 허접하게 봤던 김어준이 뜨는 것이 몹시 불안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은 나꼼수에 대해 그레이트 빅 착각을 하고 있다(듣지도 않고 까니 착각할 수 밖에 없지). 나꼼수는 김어준의 방송이 아니다. 나꼼수는 주장하지 않는다. 김어준도 주장하지 않는다. 이 방송을 자주 들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실제 이 방송을 주도하는 사람은 정봉주와 주진우다. 김어준이 하는 역할은 사실상 추임새다. 자칫 지루한 팩트 나열이 될 수 있는 프로를 맛깔스럽게 꾸며주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며, 스스로 그 한계를 넘어가지도 않는다. 가끔 그 개그스러움이 지나칠때가 있기는 하지만.
정봉주와 주진우는 우리 논객님들과는 다루는 정보의 양과 질이 다른 사람들이다.
"김어준이 바라본 곽노현의 눈 빛"때문에 곽노현을 옹호하는 프로를 제작했다고 생각하는 논객은 대체 이 프로를 몇편이나 들어봤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난 17편을 들으면서 "곽노현 눈빛 봤어요?"란 대사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런 대사가 없어도 곽노현에 대한 수사가 매우 정치적이고 무리하다는 점은 분명히 설득력있게 개진될 수 있었다. 법에 저촉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진중권이 듣고 화가 났다는 17회의 메시지도 곽노현 만만세라기 보다는 "화부터 내지 말고 좀 살펴보자"였다.
사실 곽노현 건과 관련해서 무책임한 선동을 한 측은 나꼼수 측이 아니라 아무런 사실관계도 밝혀진게 없는 상태에서 기자회견 끝나기가 무섭게 용수철처럼 "교육감 사퇴"를 요구한 진중권 쪽이다. 게다가 "선의로 2억을 지원해주는 친구가 있으면 그 좆이라도 빨겠다."라고 망발을 한 자가 김어준의 반지성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정말 개그의 진수다. 이런게 선동이 아니면 뭐가 선동인가?
나꼼수는 그런 감성을 자극하는 멘트, 선동적인 멘트의 힘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 프로를 듣는 사람들도 거기에 선동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정말 선동되었으면 벌써 폭동이 일어났어야 하지 않는가? 이 프로의 힘은 저격수 정봉주와 악마기자 주진우의 엄청난 고급 정보들이며, 이 정보들이 너무 지루하게 전달되지 않게 적절히 추임새를 넣어주는 김어준의 입담이 이루는 철저한 분업 시스템에 있다. 물론 김용민 PD의 기술력과 편집능력을 빼놓을 수도 없다. 나꼼수는 항상 이런 포맷으로 진행된다. 주진우가 뭔가를 캐 온다. 정봉주가 캐온 정보를 정치권의 동향과 연결지어 본다. 김어준이 멋대로 결론 내리고 껄껄거린다.
이 "멋대로 결론"은 핵심이 아니다. 이 프로의 핵심은 저격수와 악마의 폭로이며 김어준의 결론은 조롱이며 야유다. 즉 정치적으로는 폭로를, 그리고 대중에게는 야유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통상 과거에는 폭로는 곧바로 분노, 분노를 유발하는 선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나꼼수는 폭로에 이어 조롱을 선사한다. 이게 바로 인기의 비결이다. 상대방의 각종 명예훼손 송사에 시달리기 마련인 저격수와 폭로전문기자가 아직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은 그만큼 이들의 정보력이 뛰어나단 뜻이다. 팩트와 자료를 움켜쥐고 있으니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메시아주의를 경계하라 어쩌라 하는 소리도 개 풀뜯어먹는 소리다. 메시아주의가 위험한 것은 맞다. 메시아주의는 민중의 자발성을 몇몇 위대한 지도자의 전능함에 넘기고, 그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복종을 통해 행복을 보장받으려는 태도다. 그런데 나는 대중들이 나꼼수에 열광하는 모습은 보았지만, 나꼼수를 만능해결사로 여긴다는 징후는 찾지 못했다. 징후를 찾지 못했는데 미리 비판하라는 요구는 너무 앞서나간 요구다.
실제로 나꼼수는 어떤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미래를 예언하지도 않는다. 김어준이 문재인 대통령이라는 장미빛 환상을 말하긴 하지만, 그걸 중심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을 복음을 만들거나 하지도 않는다. 이건 다만 폭로 프로그램일 뿐이다. 이 사회의 지배세력이 이런 사람들이라고 폭로할 뿐이다. 폭로한 다음에는 분노를 하건 조롱을 하건 혹은 그 폭로의 진위여부를 더 꼼꼼히 살펴보건 간에 그건 들은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 물론 나꼼수 콘서트 같은 거 하면 엄청난 환호성과 거의 종교 부흥회같은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하겠지만, 그건 일종의 스타 팬덤이다. 나꼼수의 위상은 메시아라기 보다는 록스타에 더 가깝다.
어차피 가카를 혐오하는 사람들끼리 들으면서 낄낄거리는 프로가 실천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지적도 제대로 들어보지 않고 얻어들은 이야기가지고 쓴 전형적인 골방 논객의 말이다. 24편까지 다 들어보면 가카를 주로 다루기는 하지만 이 사회 지배층들의 꼼꼼함이 곳곳에서 폭로되고 있음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가카는 다른 지배층들이 은밀히 충족시키는 탐욕을 너무도 공공연하고 당당하고 기상천외하게 충족시키기 때문에 호연지기로 별도의 특별 칭송을 받고 있을 뿐이다. 가카의 꼼꼼함은 과연 경제인 답게 이 사회의 경제시스템의 빈틈을 절묘하게 이용한다. 그래서 가카의 꼼꼼함을 잘 따라다니다 보면 나중에 월가가 왜 문제인지, 금융자본주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다 생각해 낼 수 있게 된다. 주진우나 정봉주(특히 주진우)가 사회 지배층의 문제들을 폭넓게 폭로하다가 가카에게 충실하지 못한 불충죄로 김어준에게 지적당하는 장면이 얼마나 많은지 들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실천이라고?
곽노현 사건때 대중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질수 있었던 "이놈이나 저놈이나" 냉소주의를 뭉개고 박원순이 운신할 공간을 만들어준 것은 실천이 아닌가?(아 참 이건 나꼼수만의 공이 아니다. 내가 원조고 나꼼수가 뒷북이다 ㅋㅋ 증거자료 있다. 나는 8월28일에 이미 국면전환을 예고했고, 8월 29일에 민주당과 진보논객들의 몰락을 예고했었다.) 논객들은 생각해 봐야 한다. 곽노현이 자기 말 듣고 즉일로 사퇴했으면 과연 이 시장선거가 박빙이라도 되었을까? 김규항은 생각해 봐야 한다. 박원순이 어눌하게 대응하여 전세가 역전당하고, 그 대단하신 진보명망가 수십명이 모인 선대위가 갈팡질팡할때 누가 이 전세를 다시 해볼만하게 만들었는지? 이게 실천이 아니면 뭐가 실천인가?
그런데도 저런 소리들이 나오는 거 보면 이분들은 나꼼수를 듣지 않았거나, 듣더라도 "김어준 따위" 이런 선입관을 가지고 건성으로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분들은 나꼼수의 기본적인 성격도 오해하고 있으며, 이것이 얼마나 저 지배층들의 지배에 큰 균열을 낸 쾌거를 이루었는지도 모르고 있다.
결국 논객의 시대는 가지 않았다. 다만 새로운 종류의 논객이 등장했다. 새로운 논객은 머리 잘 돌아가는 사람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주무기를 가진 네명의 논객이 자신의 장점만을 가지고 달려드는 분업 시스템, 그리고 최신의 통신기술을 활용하는 산업혁명을 거친 시스템 논객이다. 구형이 신형에게 밀려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나는 구형논객이라 밀려난다"라고 해야 옳지 내가 밀려난다고 해서 모든 논객을 도매금으로 몰락시키는 처사는 지나치게 오만하다(음. 주어가 없다).
(지금 글은 교정을 본 글이다. 작성 1시간, 교정 30분). 나는 워드치는 속도와 글 쓰는 속도가 같다. 이런 유치한 깔대기를 대는 이유는 진중권의 은퇴글을 보고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라고 말한 오연호 사장 들으라고 하는 얘기다. 그럴 사람 많다. 이 땅의 글쓰는 사람들을 죄다 진중권 잣대로 환원해서 비교하는 오사장의 처사는 매우 오만하다. 논객이 뭐 용가리통뼈인가? 누구나 비전을 그려내고 폭로와 풍자를 하고 나름의 주장을 펼수 있으면 그게 논객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으면 뜨는거고 아니면 가라앉는거다.
물론 논객끼리 비판할 수도 있다. 그 비판전에는 당연히 관객이 붙는다. 그리고 키케로가 말했듯이 인민은 스스로 나라일을 맡아볼 만큼 현명하지는 못해도 더 현명한 사람을 찾아내는 일에는 누구보다도 유능하다. 그러니 청중을 빼앗긴 논객이 "반지성주의" "선동"을 탓하는것 만큼 추한 꼴도 없다. 만약 논문으로 승부보는 것이었으면 청중은 고려요인이 못된다. 하지만 그들이 논문 배틀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논객간의 혈투는 청중이 결정한다. 변희재, 조갑제 등이 저 논객들에게 논리와 학문적 근거에 승복했는가? 그들은 절대 승복 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희재 패, 조갑제 패라 부를 수 있는 것은 결국 청중들의 반응때문이었다. 청중의 열화같은 지지덕에 기세좋게 밀어붙였다가, 본인들이 그 입장이 되자 반지성주의를 탓하는 것은 이중잣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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