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는 누구였을까?
어떻게 성장을 하여서, 어떻게 변호사가 되었고, 어떤 가정을 이루고, 무엇에 헌신한 사람이었을까?
인권변론사를 준비하던 도중 알게 된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변호사의 삶에 느낀 바가 있어서 같이 보았으면 합니다.
1. 어린 시절
이태영은 1914년 평안북도 운산 태생이다. 탄광을 운영하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첫돌을 겨우 넘겼을 때 사고로 별세하였다. 어머니는 남편과의 사별 이후 친정으로 돌아가 막일을 하면서 어려운 집안 살림을 혼자서 꾸렸다.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아들딸을 평등하게 가르쳐서 이태영은 이화여전(현재 이화여자대학교)을 졸업할 수 있었다.
2. 결혼과 가족
1) 동반자 정일형 : 이화여전시절부터 좋은 혼사 자리도 많이 들어왔으나 분주한 교회일과 학교일 속에서
정일형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남편 정일형은 광복 후 정치에 나서 자유당 독재를 물리친
4·19혁명 후 장면 내각의 외무부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5·16군사정변 후에는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회복운동에 앞장서는 투혼을 보였다. 8선 의원을 끝으로 의원자격을 박탈당한 그의 의원직을 아들 정대철이 이었다. 정대철 역시 5선 의원을 지냈다.
결혼 당시 정일형은 7년간의 미국공부를 마치고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사회학 교수로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평양에서 개척교회를 일구었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공장근로자를 위해 그것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산다는 동네에 창고교회를 열었던 것이다. 이때 태영은 남편 정일형 박사를 만났다. 시어머니 ‘한은총’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시어머니도 태영의 어머니처럼 23세에 남편을 잃고 외아들 정일형과 유복녀 정신형을 데리고 극심한 고생을 한 인물이었다. 강인하게 살아오신 똑똑한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는 혹독했다고 한다. 일본경찰에 수시로 불려다니며 감옥을 드나들었던 남편으로 인해 태영 자신도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하는 등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첫째 아이를 3개월만에 잃고 남편의 쉴틈없는 수감생활과 그 뒷바라지, 교회일에만 전념하시던 시어머니로 인해 모든 집안일 해내기도 벅찬 하루하루를 해나갔다.
2) 끔찍했던 일제 말기 : 특히 일제 말기 7년간은 태영의 생애에서 가장 지독한 나날이었다. 남편이 신학교에서 강의도중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질 것이다"는 말을 한 것 때문에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연금되었다. 이태영은 생계와 남편옥바라지를 위해 이불 장사를 했다. 누비조합을 찾아가서 염색까지 배워 직접 길거리에 나가 누비이불을 팔았다.
대학까지 나와서 한낮 누비이불 장사를 해야 한다는게 부끄러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둘째딸을 업은 채 머리에는 이불보따리를 이고 손에는 큰딸의 손을 잡고 장사를 하러 길바닥을 헤메고 다니다가 혼담이 오갔던 옛 고향사람을 마주치기도 하고, 태영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 수근거리기도 하였다. 이화여전시절 교수는 태영을 보자 대뜸, “이제 공부는 다 글렀군.”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때 가위의 날이 잘 들지 않아 "날이 잘 드는 가위 하나만 있었으면…"하는 것이 이태영의 소원이었다. 해방 이후 이태영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정일형은 외무부장관 업무차 외국에 갈 때마다 가위를 하나씩 사서 이태영에게 "어려운 때를 잊지 말고 살자"라는 말과 함께 선물했다고 한다.
3. 여성최초의 서울법대 입학, 여성최초의 사시 합격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고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제하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태영부부에게 이만큼 기쁜 일이 없었다. 곧 정일형은 태영에게 편지를 보내어 “서울 거리를 걸어도 뒤에 아무도 따라 다니는 사람이 없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소. 아무도 나를 가둘 사람이 없어 훨훨 날아다니고 있소. 여보, 이제 보따리를 바꿔 맵시다. 기다리던 그 세월이 바로 지금 왔으니 평생 소원이던 법률공부를 하시오."하였다.
서울법대를 합격하기는 했으나, 이화여대의 강사로도 등록이 되어 있던 상태였다. 이화여대의 교수직과 서울법대의 학생,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오랜 고민 끝에 이화여대에 사표를 내러가니 김활란 총장은 버럭 화를 내며 끝내 사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몰래 비서실에 슬그머니 사표와 편지를 놓고 서울대학에 입학수속을 마쳤다.
1946년 봄 서울대 법과 대학은 술렁거렸다. 개교 이래 첫 여학생이 입학했기 때문이다. 설렘도 잠시, 알고 보니 네 자녀를 둔 32세의 가정주부였다. 여학생과 함께 수업을 듣길 바랬던 법대생들이야 실망이 컸겠지만 그녀의 만학 열정은 사회적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이태영은 가방을 두 개 들고 다닐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여 1949년 8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52년 전쟁 중 부산에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4. 판사 임용 좌절과 여성으로서 부딪힌 한계
하지만 남편 정일형이 야당 국회의원이라는 이유와 이승만의 여성관 때문에 판사 임용이 되지 않고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었다. 강인했던 그녀도 평생토록 지우지 못한 마음의 상처가 있었다. 바로 여성 차별이었다.
당시 판사 임명권자인 이승만은 김병로 대법원장이 요청한 판사 임용 후보 중 이태영을 제외시켰다.
"여성은 아직 이르니 가당치 않다"는 게 이승만이 밝힌 거부 이유였다. "20대의 새파란 청년들이 모두 판사 임명을 받는 터에 38세나 된 네 아이의 엄마요, 세상 풍파를 다 겪은 첫 여자 고시 합격자에게 감히 어떻게 여자이기 때문에 시기상조라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이태영은 1952년 여성 최초의 사법고시에 합격하고도 판사가 되지 못한 설움을 이렇게 회고록에 썼다.
이태영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느낀 불평등, 불합리한 가족법 조항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러한 가족법개정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가지고 김병로 대법원장을 찾아갔다. 하지만 김병로 대법원장은 굳은 얼굴로“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 법의 일자 일획도 못 고칩니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였다. 그리고는 태영에게 “법조계의 초년생이면서 벌써부터 건방지게 법을 고치려고 나서다니 어디서 배운 버릇이냐?” , “조그만 것이 법률 줄이나 배웠다고 벌써 휘젓고 다니느냐? 1천 5백만 여성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다 좋다고 잘 살고 있는데 어째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
존경하는 법조계 어른으로부터 폭언에 가까운 호통을 들은 이태영은 혼절할 만큼 상심하여 동행한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 대법원장실을 나왔다고 한다. 훗날 이태영은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1950년대에는 여성 차별의 벽이 그만큼 높았다.
5. 법조인으로서의 활동
1) 여성운동에 헌신 : 이태영은 법정에 갈 때 언제나 한복소복을 입고 갔는데, 이는 법조계에서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자, 이태영의 표현대로 "법과 인습에 눌려 우는" 여성들이 찾아와서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이를 계기로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현재 가정법률상담소)를 열었다. 이후 30여년간 "법조계 초년생이 뭘 안다고 법을 고치려 하느냐",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킨다"는 법조계의 비난과 싸워가며 가족법 개정 및 호주제 폐지를 위해 힘썼다.
2) 민주화 운동에 공헌 : 군사독재정권시절에는 야당 국회의원인 남편과 함께 민주회복국민선언, 3.1민주구국선언에 참가하면서 수많은 민주화 유공자들을 변호하기도 하였다.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재판 당시 증인으로 출석하여 김대중의 결백을 주장하였다. 당시 군 검사관이 증언을 제지하자 이태영은 그의 면전에 대고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란 말이오! 자식들한테 부끄럽지도 않소?!"라고 호통을 치며 인상을 찌푸렸고, 방청석에서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서도 200여명의 변호인단으로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 김대중 이희호와의 인연
김대중 전 대통령도 '평생 은혜'라고 표현했지만, 김대중-이희호 부부와 정일형-이태영 부부의 인연은 각별하다.
김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혼사도 김정례 전 보사부장관이 중신을 서, 두 사람이 모두 이태영 여사에게 자문해 성사된 것이다. 두 사람을 잘 아는 이 여사가 양쪽 모두의 '보증'을 선 것이다. 또 김 전 대통령은 '민주당 신파'로 정치에 입문해 정일형 박사를 '정치적 대부'로 모시고 정치를 배웠다.
6. 말년
그러나 그토록 당당했던 이여사도 치매가 오면서 96년부터 상태가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했다. 병환중에도 남편 정일형과 함께 마련한 서대문구 봉원동 집을 떠나기 싫어해 전문 간병인 두명이 그림자처럼 붙어서 간호를 했고 며느리와 세 딸들이 당번을 정해 이여사를 간호해왔다. 이태영 여사는 며느리를 보고도“결혼은 했느냐”“남편은 누구냐”며 묻기도 했고, 1년 후에는 아들 정대철마저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정대철이 봉원동 집에 처음 들어설 때 “대철이구나” 했다가도 곧 몰라보고 “우리 오빠랑 많이 닮았는데 누구시우?” 하며 묻곤 했다.
98년 12월 대통령선거 직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당선소식을 제일 먼저 이태영 여사에게 알리기 위해 찾아갔지만, 알아보지 못해 이희호 여사가 무척 가슴 아파했다*.
“나는 길이 없는 데로 다녔다. 내가 간 길은 누구도 가본 적이 없어. 나는 그 길을 만들어 걸었다. 그런만큼 험한 길이기도 했다. 여자로 태어나서 그것도 아이가 넷 딸린 주부의 몸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변호사가 되고, ‘법률구조’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 법을 몰라 고통을 받던 여자들을 껴안고 울어야 했으며 한국 가정법률상담소를 세운 것 등등… 내가 걸어온 길은 가시밭길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가야만 했던 길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보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이는 동아일보와 여성동아
http://www.donga.com/docs/magazine/woman_donga/9901/wd990100150.html 에 나오는 내용이지만 다소 의문이 있다. 검색으로 알 수 있는 이태영 여사 사망일은 98년 12월 17일인데 비해, 15대 대통령선거일은 12월 18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