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 피오렌티나의 영웅을 머릿속으로 떠오르면, 로베르토 바조와 가브리엘 바
티스투타가 떠오른다. 특히 바티스투타와 피오렌티나의 '관계' 는 마치 한 편
의 영화와도 같다. 바티스투타는 1991년 아르헨티나 명문 보카 주니어스에서
피오렌티나로 이적한 이후부터, 약 9년동안 오직 피오렌티나를 위해 뛰어왔
다. 피오렌티나가 2부 리그로 강등되어, 바티스투타 같은 스타 플레이어 정
도면 다른 명문 클럽으로 이적할 수 있었지만 바티스투타가 선택한 것은 바
로 피오렌티나 잔류였다. 그는 그렇게 1991년부터 2000년동안 피오렌티나의
흥망성쇠를 함께 해왔다.
하지만 피오렌티나는 바티스투타, 후이 코스타, 누누 고메스 등 막강한 공격
자원들과 이탈리아 국가대표 골키퍼로 각광받았던 프란체스코 톨도가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늘 우승권에서는 아쉽게도 인연이 없었다. 분명 실력있는
클럽이었지만 피오렌티나보다 더 강한 클럽들은 이탈리아 프로무대에서 널
리고 널렸다. 결국 바티스투타는 팀의 심각한 재정 문재와 리그 우승 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정
든 피오렌티나를 떠나 2000년 AS 로마로 이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오
렌티나 팬들은 바티스투타의 이적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빛나는 앞날을 희망할 뿐이었다.
이탈리아 프로축구 무대는 물론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도 단연 최고였던
'우승 청부업자' 파비오 카펠로 감독의 지휘 아래 00-01 시즌 거침없는 행보
를 기록하던 로마는 바티스투타의 영입으로 인해 더욱 더 탄탄한 공격진을
마련할 수 있었다. 피오렌티나에서 동상을 세워줄 정도로, 클럽을 상징했던
바티스투타는 로마에서 최고의 동료들과 함께 상승 무드를 타고 있었다. 그
런데 이탈리아 프로무대에서 로마와 피오렌티나는 어쩔 수 없이 여러번 만
나야하는 상황이었다. 새삼스럽게 느껴질지는 몰라도, 분명 바티스투타는
로마 소속으로서 피오렌티나 골문에 조준하고 슈팅을 때려야 마땅했다.
00-01 시즌 세리에 A AS 로마 vs 피오렌티나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확
한 데이터가 남아있지 않아 몇 라운드였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바
티스투타는 동료 선수들인 토티, 톰마시, 자구, 기고 등과 함께 피오렌티
나를 격침시켜야하는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피오렌티나 서포터들이
보는 앞에서 바티스투타는 피오렌티나 골문을 계속해서 두드리기 시작
했다. 하지만 바티스투타의 맹공을 피오렌티나 GK 톨도 (현재 인테르
밀란) 가 보이는 족족 다 막아내서, 말 그대로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후반전, 절대적으로 로마의 맹공에 물러서지 않았던 피오렌티나에게 헛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로마는 좌우 사이드와 중앙 등 가리지 않고 피오
렌티나 문전을 과감하게 저격하였다. 결국 브라질 출신의 로마 센터백
카를루스 자구 (Zago) 가 우루과이 출신의 로마 오른쪽 윙어 지안니
기고에게 크로스를 올려줬다. 기고는 그 크로스를 중앙에서 돌아들어
오는 바티스투타에게 헤딩으로 연결해줬고, 바티스투타는 돌아들어가
는 액션을 그대로 취하면서 강한 오른발 논스톱 슛을 때렸다. 결국 그
슛은 점프하면서 다이빙하던 톨도의 키를 넘겼고, 피오렌티나 골문을
시원하게 뒤흔들었다. 1-0.
카펠로 감독은 약간 지지부진하면서도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던 경기
가 바티스투타의 골로 한층 승기가 밝아지자,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코칭
스태프들과 기쁨을 나눴다. 하기사 로마 선수들은 얼마나 더 기뻤을까.
바티스투타의 동료들은 모두 바티스투타에게 달려가서 한번씩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골 세레모니를 해줬다. 하지만 바티스투타는 동료들에게
축하를 받으면서, 좋아하는 기색은커녕 얼굴을 푹 숙이고 두 손으로 이
마를 감쌌다. 그렇다. 9년동안 희노애락을 같이 했던 친정 클럽 피오렌
티나를 상대로 골을 넣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팀의 주장 프란체스코 토티는 바티스투타를 달래주기 위해 자신의 어
깨로 번쩍 들어올리기도 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바티스투타로 하여금 '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맨티시스
트' 라는 별칭을 붙게 만들어준 계기가 된 것이다. 아르헨티나 축구의
대표적인 스트라이커로써, 그리고 이렇게 피오렌티나의 끈끈한 애정
을 과시하면서 피오렌티나의 영원한 영웅으로 기억되었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그의 결승골로 인해서 로마는 피오렌티나를 1-0으로 이
겼는데, 바티스투타는 끝까지 피오렌티나 팬들에게 눈물을 지으면서
미안하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피오렌티나 서포터들은 이날 경기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박수와 갈채를 바티스투타에게 보냈다.
어느새 적팀의 대표 스트라이커가 되어버린 바티스투타에게 넓은 관
용과 아량의 품으로 감싸서 다듬어주었던 피오렌티나 서포터들, 그리
고 비록 결승골을 뽑았지만 들뜬 분위기로 포효하는 바티스투타 특유
의 골 세레모니가 작렬하기는커녕, 오히려 눈물을 지으면서 고개를 떨
구는 모습을 보였던 바티스투타. 이탈리아 프로축구 무대를 뛰어넘어,
축구판에서 벌어졌던 한 편의 각본 없는 영화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