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신문 칼럼
방기중 전 연세대 교수가 1996년 발표한 연구논문 ‘일제말기 대동사업체 경제자립운동의 이념’의 결론을 소개했다. ‘이종만이 자신의 전 재산과 기업을 바쳐 세운 대동기업체의 이념과 경영철학은 식민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모색하던 진보적 민족주의 계열이 도달한 사상적 모색의 한 전형이자 실천이었다.’
그건 과장이 아니었다. 북지위문금을 내기 두 달 전 이종만은 영평금광 매각 대금 155만원 중 50만원(지금 화폐가치로는 500억원)을 자작농 육성과 이상적 농촌 건설을 위한 대동농촌사 설립에 쾌척했다. 이밖에 10여만원은 영평금광 광부와 직원 1000여명에게 나눠주고, 인근 마을 빈민구제금으로 1만원을 희사했으며, 광부의 아이들이 다니는 영평학원에 2000원, 왕장공립보통학교에 1000원을 각각 전했다. 그가 인수인계식을 끝내고 떠날 때 왕장역에는 “1천여명의 광부와 그 가족들, 인근 주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의 덕행을 찬양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고향인 울산에도, 대현면 교육사업비로 10만원, 빈민구제금으로 1만원 등을 희사했으니 그가 노동자 농민 교육사업으로 환원한 금액은 80여만원에 이르렀다. 9월엔 자신의 땅 157만평도 내놓았다.
1000원의 황금위문금을 낸 1938년, 그는 조선의 전문 기능인을 양성하기 위한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하고(6월), 대동광업주식회사, 대동광산조합, 대동출판사 등을 세웠다. 노동자-자본가, 지주-경작자의 협력에 의한 집단경영, 균등분배의 정신을 구현할 대동사업체의 뼈대였다. 그의 소유인 장진광산 280구, 초산 140구, 자성 300구 등 1천구가 넘는 광구를 기반으로 설립한 대동광업주식회사가 돈줄이었다. 위창 오세창 선생이 이 회사 현판 글씨를 써준 것은 이런 취지 때문이었다.
대동공전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폐교의 위기에 몰린 민족교육의 산실 숭실전문학교를 인수하려다 실패하자 대신 세운 것이었다. 설립자금만 120만원이 들었고, 사재 30만원까지 털어 넣은 이 학교는 지금 북한 김책공업대학교의 전신이다. 그가 당시 설립하거나 지원한 민족학교는 울산의 농업학교 등 11곳에 이르렀다. 그가 일제에 낸 돈은 일종의 보험금이었고, 조선 노동자 농민 민족교육에 헌납한 금액에 비하면 ‘팥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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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hani.co.kr/arti/opinion/column/756962.html#cb#csidx1ef167d7ca7eb3bad8e8221f35e48f4 한줄요약
일제패망기미는 전혀 보이지않던 1930년대부터 사회주의이념실현을 위한 사업에 자기전재산 다 투자함. 그 때문에 해방후 자진월북한 이후에도 김일성등 북한수뇌부에게 진정성을 인정받고 자본가로는 유일하게 애국열사릉에 안장된걸로 보임.다카키 마사오니 꺼삐딴 리니 이런 이야기가 돌던데 자기 소신은 확고한 사람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