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는 군대만의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기 마련이다. 자연계에 포식자와 피식자로 구성된 먹이사슬이 있듯이, 군인들 사이에서도 짬밥이나 계급에 따라 먹이사슬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소대장이나 부소대장들은 늑대나 코요테와 같은 야생의 맹수들이었고, 중대장은 그들 위에 군림하는 호랑이나 사자였다. 반면 행보관은 하늘을 유유히 날다가 불시에 급습해 먹이를 채가는 독수리에 가까웠다. 물론 나 같은 병사들은 기껏해야 먹이사슬의 최하단에 위치하는 풀떼기나 닭 쯤 되었을 것이다. 제 아무리 이등병에서 병장으로, 포켓몬에서나 볼 수 있는 기적의 진화를 달성해봤자 풀에서 닭이 된 정도일 뿐이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동물은 개나 고양이지만, 철책선에 올라가면서 군대 생태계에 새로운 친구들이 등장했다. 멧돼지와 고라니, 독수리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철책선에 올라가서 처음 본 독수리는 말 그대로 문화컬처였다. 취사장 문짝만한 녀석이 하늘을 날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녀석들은 고작 손바닥만한 팅커벨보다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고, 그렇게 곧 잊혀져 갔다.
동물들 중에서 의외로 가장 짜증을 유발하는 동물은 고라니였다. 철책선에서 직접 고라니를 보기 전까지 내가 고라니에 대해 갖고 있던 감상은 '그, 그...... 사슴 짝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끔 뉴스에서 겨울에 먹을 것이 없어 인가까지 내려온 고라니를 마을 사람이나 군인 아저씨가 보살펴 주는 훈훈한 일화의 소재였을 뿐이었다. 그냥 귀엽네, 하고 그 뉴스를 무심히 넘겼던 당시의 나는 얼마나 멍청했던가...... 현실의 고라니는 악마였다.
고라니의 악마성은 그 울음소리에 있었다. 녀석들은 시시때때로 울부짖었는데, 검수지옥을 지나는 죄인들이 내는 비명소리보다 더 찢어지는 소리였다. 단언컨대 지금껏 들어온 어떤 소리보다도 인간의 공포감을 불러 일으키는 효과적인 청각 테러였던 것이다. 야간 경계근무 중에 그 소리를 들으면 등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야간 근무자들은 고라니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교양인은 입에 담아선 안 될 말들을 내뱉고는 했다. 물론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고라니 울음소리에 빡친 후임이 장전된 K2로 고라니를 조준하는 것을 말려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날 밤 근무 철수 후 고라니 울음소리에 잠 못 이루며 내가 후임을 말린 것은 과연 잘한 일인가에 대한 회의감을 느껴야만 했다.
고라니보다도 더 현실적인 공포는 멧돼지였다. 주로 철책선 안쪽에서 보이는 고라니와 달리 멧돼지는 철책선 안팎에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멧돼지는 군부대 생태계의 지상동물 중 가장 강력한 녀석들이었다. 그러나 녀석들은 군부대에 특별한 해를 끼치진 않았고, 그저 짬통 근처에 모여들어 짬만 먹고 돌아가는 예의바른 손님들이기도 했다. 물론 새끼들을 데리고 다니는 녀석들에게 접근하는 건 위험했다. 실제로 비와 안개로 시계가 제한된 상황에서 물탱크를 확인하러 갔던 고참이 새끼를 데리고 있던 멧돼지에게 접근했다가 큰 봉변을 당할 뻔 했다. 당황해서 손에 들고 있던 자동우산이 활짝 펴지자 멧돼지가 도망갔다고 했는데 당시에는 '뻥까지 마십쇼'라고 (속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후일 스펀지에서 '자동우산으로 멧돼지를 물리칠 수 있다는 데 사실인가요?' '네, 사실입니다'라는 얘기를 듣고 크게 놀라기도 했다.
이렇게 얌전했던 멧돼지들이었지만, 단 한 번 문제가 생긴 적이 있었다. 문제는 짬이었다. 페바에서는 짬통을 치워 가시는 짬 아저씨가 있었지만 철책선에서의 짬 처리는 주로 취사병들이 뒷산에 구멍을 파고 묻는 식으로 해결이 되었다. 그리고 짬이 버려지면 그 주위에 멧돼지, 짬타이거, 까마귀 등등의 동물친구들이 씐나는 파티!!를 벌이는 것이다. 그런데 여름이 가까워지고 위생문제가 대두되자 연대에서는 배차를 낼테니 짬통을 내리라는 공문을 발송해 왔다. 당연히 우리는 상급부대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고, 첫 며칠 동안 별 일 없이 짬은 트럭에 실려 내려갔다.
그러나 며칠 뒤, 옆 소초의 취사장을 멧돼지가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지금까지 누리던 짬의 권리를 박탈 당한 멧돼지가 무력시위를 감행한 것이다. 처음부터 교섭의 여지는 없었다. 나무로 된 취사장 문은 멧돼지의 돌격에 떨어져 나갔고, 취사장에 있던 취사병들은 내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취사장 내에 짬을 감추고 주지 않는다'는 멧돼지의 오해는 스스로 행한 철저한 탐색으로 불식되었고, 멧돼지는 멋쩍게 곧 돌아갔다. 취사장에는 부서진 문짝과 기껏 청소한 바닥에 남은 멧돼지 발자국이 남았을 뿐이었다. 호이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안다는 말이 이보다 적절한 사례는 또 찾기 힘들 것이다. 망할 멧돼지 놈들...... 그러나 그들이 언제 다시 인베이더로 변신할 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고, 무언가의 대책이 필요했다.
결국 행보관은 멧돼지들과 하루에 한 끼분의 짬을 제공하는 신사협정을 맺었고, 이 신사협정이 체결된 후로 멧돼지의 습격은 사라졌다. 상급부대의 요구와 동물 친구들에 대한 배려가 조화된 이 조치로 인해 소초원들은 한동안 행보관을 황희 정승 보듯 우러러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