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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스케치를 해두려고 합니다.
자세하게 쓰지는 못할 것 같구요, 지금 느끼는 것만 써야 될 것 같습니다.
전에 썼던 글에서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개념들이 있다고 했었죠.
그것을 언급하지 못했고, 지금 이 글에서도 언급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쓰다 보면 너무 길어지게 되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하게 대충 스케치만 해두려 합니다.
- 이는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을 기저영역으로 깔고 접근하는 방식이다. (망각을 최소화)
인간의 언어는 시점을 깔고 간다.
(오브제-관계-Construal) 이게 하나의 묶음이다.
언제나 생략되는 동사는 다음과 같다. (동사라고 썼긴 했지만 동사로만 보기힘든)
(보다)
(듣다)
(느꼈다)
(생각했다)
(하다)
(가정하다)
이는 제각각 '관찰자/체험자/참여자/가정해보는 자'가 시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생략되어 있다.
Fascination 이란 단어가 있다고 해보자.
이 단어 하나에도 시점이 전제되어 있다. 또한 몸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을 고려할 때, 이 단어가 해석되는 방식은 '누군가의 발화'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이 문장을 발화하는 사람은 적어도 다음의 상황을 가정한다.
1.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관찰자)
2.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있다. (관찰자->체험자)
3.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있다. (관찰자->체험자)
4.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다가 가정도 해보고 있다. (관찰자->체험자=가정해보는 자)
이를 관계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오브제에 관계를 개입시켰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오브제에 끼여있는 특성을 찾아서 관계로 엮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를 '관찰자' 시점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즉 '오브제와 그'가 관계를 갖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 문장이 실제로 기술되는 상황을 기술해보면 다음과 같다.
오브제가 있다.
그가 있다.
오브제를 그가 보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그'에게서 관찰된다. 그는 관찰됨과 동시에 어떤 체험을 갖게 된다.
그것은 역전현상을 거친다. 즉 그가 체험을 가졌기 때문에 오브제가 인지되며 오브제가 인지되었기 때문에 오브제가 거기 있다고 여긴다.
즉, 존재와 인식이 번갈아진다.
가령 내가 사과를 봤다고 하자.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과가 빨갛다."
이는 역전현상을 거친다.
즉 '사과가 실제로 빨간색 성질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그것을 내 인식에서 그렇게 느꼈기 때문일 수 있다.'
이 두 과정이 역전을 이룬다. 내 입장에서 생각하면 내가 느낀 것이지만,
내가 느낀 것을 투영해서 존재가 앞에 있다고 가정해본다면, 그 존재가 그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대강 이런식으로 역전이 일어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법이 어떻게 설정되냐는 것이다.
오브제
인지자
이렇게 나눠진다는 게 관건이다.
따라서 언제나 이렇게 기술이 된다.
1. 그 오브제는 이런 성질을 갖고 있다.
2. 그 오브제는 내게 이렇게 다가와서 보여지고 느껴진다. (또는 생각되고 가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를 Fascination이란 단어에 적용시켜보자.
이는 형용사라고 불리는 것으로 오브제 자체는 아니다. 즉, 오브제에 결합된 성질이다. 그렇든 아니든 간에,
현실의 모델을 적용시키면, 언제나 오브제가 시작점이다.
따라서,
1. 오브제가 있다.
2. 인지자가 있다.
3. 오브제를 인지자가 보거나, 인지자가 오브제를 보고 있다.
(간단한 어순이지만, 여기에는 초점의 순서가 다르다. 금방 느낄 수 있다.)
이 오브제에 성질로서 결합된 것이 형용사다.
따라서 Fascination는 어떤 오브제에 걸려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건 뭔가? 넋이 나갈 정도의 매력같은 것이다.
가령 엄청난 식스팩과 근육, 또는 엄청난 S라인으로 Attraction수준을 넘어버려서 넋이 나가버리게 만드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는 말은 이미 그 '오브제'를 전제하고 간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기엔 '시점'도 전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인지자가 오브제에 걸려있는 그 성질을 보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고로 관찰자이면서 체험자인 인지자가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이 단어가 하나가 나왔든 두 개가 나왔든, 이는 생략되어 단어만 나타난 것이고,
이를 실제로 우리가 현실에서 받아들이는 방식은 상황 자체로서만 가능하다. (현실은 단어처럼 조각나 있지 않다.)
즉 생략된 것을 모조리 다 모은 채로 상황과 문장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상황
1. 오브제가 있다.
2. 인지자가 있다.
3. 오브제를 인지자가 보거나, 인지자가 오브제를 보고 있다.
문장
1. 오브제 여부 (어떤 것을 어떤 사람이 ~)
2. 인지자 여부 (시점 여부 = 관찰자 또는 체험자)
3. 오브제-인지자 (오브제를 인지자가 보고 있다. 또는 오브제가 보였다.)
실제로 이해되는 방식
1. 오브제에 성질이 걸려 있다. (예 = 남자가 있고 남자의 배에 식스팩이 있다.)
2. 인지자가 오브제를 보고 있다. (예 = 인지자가 관찰자 시점에서 위의 남자-식스팩에 시선을 두고 있다.)
이 때 이제 인지자는 "Fascination"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반드시 이 상황에서)
왜냐하면 이 때 인지자는 실제로 아무 상황에 대한 인지 없이 말하는 게 아니라, 딱 그 식스팩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오브제를 배경으로 깔고, 그 오브제에다 자신이 '시선'을 둔 곳에 대해서만 그 느낌을 언급한 셈이다.
그래서 다른 '오브제내의 부위에 눈이 가는 게 아니라, 식스팩에만 눈이 가게 되고, 그에 대한 응답을 Fascination라고 하는 것이다.'
(다른 부위에 눈이 안갔다는 게 핵심이다. 즉 그 부분은 제외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로도 반영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인지자가 Fascination라고만 말했다면, 실제로 상당히 좁게 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지금까지 했던 말 모두가 다 '생략'되어있거나 배경화되어있는 것들이다.
즉 인간은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위의 것들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문장에는 대체로 다음의 것이 명시되지 않는다.
당신이 오브제를 인지하고 있는지 아닌지,
당신이 어떤 시점에서 어떤 시선을 두고 있는지,
그런것들이 명시되지 않는다. (그냥 초점이 잡힌 곳만 보는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 간다.)
하지만 그래서 당신이 놓치는 것은 Fascination라는 단어가 실제로 어떤 배경에서 나타나는 것이냐는 점이다.
즉 이 말은 '오브제에 대해 인지자가 시선을 두어서, 무엇을 봤을 때에만 나온다.' 라는 얘기다.
이 얘기를 배경으로 깔고 있었냐 아니냐에 따라 인지자의 인식에 차이가 생긴다.
다시 말해, 내가 어떤 발화를 실제로 어떤 배경을 깔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냐 없냐에 따라, 문장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Fascination이라는 말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그는 왜 했는가? 뭘 봤는가? 뭘 체험했는가? 그러면 오브제는 뭐였는가? 그는 이런 것들을 깔고 가는 것이다.
근데 이것이 모두 초점이 가는 게 아니라, 어떤 부분에만 유독 초점이 잡혔기 때문에, 그 부분만 초점을 두고 반응한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부분은 어떻게 되는가? 실제로 그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다만 초점이 잡히지 않은 거란 소리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언어상에서 이는 반영되지 않는 특이한 현상을 보인다. 즉 다 언급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이것은 오브제로 볼 때 없는 게 아니다. 바로 그게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더 문제는 이런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러면서 이 문장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 그가 뭘 생각하겠냐는 것이다.
그는 자칫하면 비어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게 바로 망각된 것을 기저로 깔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떤 상황이 비어있고 시점 자체도 느껴지지 않는 특이한 형태를 떠올릴 수 있다.
이게 영어 공부를 하면서 자주 발생하는 경우다.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이 왜 회화를 못하는가? 단순하다. 시점에 대한 고려가 없었으니까.
뜻만 알았지. 어떤 시점에서 얘기하는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Fascination 라는 단어는 '오브제를 관찰하다가' 그런 특성을 발견할 때나 쓰는 말이다. 적어도 어떤 오브제가 Fascination하다면 말이다.
그럴 때 그가 이 시점을 모르고 있다면 어떨까? 그는 이 상황정보가 없다. 그러니 이 순간에 이 단어를 떠올리지 못할 확률이 높다.
왜? 그는 관찰자 시점에서 오브제를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속성으로만 본다면 그렇게 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우려할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생각해볼 문제다. 어떤 기호가 있다면 그 기호가 거기 왜 생겼겠는가? 누가 새겨넣었기 때문이다.
이 행위자 및 시점에 대한 인식이 늘 전제되야 한다. 역으로 물어보자. 이를 망각하는 것이 좋은가? 유익한가?
당신은 이 행위자 및 시점을 생각함으로써 당신의 눈 앞에 있는 기호가 어떤 발생으로 생겼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추측될 것이다.
바로 그 기호를 새겨 넣은 사람이 말이다. 그 때 당신은 그 사람의 몸을 보게 된다. (독해가 심리적으로 가게 된다는 소리입니다.)
따라서 이런 결론이 가능하다.
1. 인간의 모든 발화는 오브제에 대한 인지자의 시선이 닿은 것이거나, 오브제에 기반한 인지자의 체험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언제나 '나는 오브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라거나, '나는 이것을 이 시점에서 보고 느끼고 있다'라거나, 등을 깔고 있다.
당신이 이를 자각하던 안하던
이것은 분명히 깔려 있는 것이다. 왜? 당신 몸이 있다는 사실, 당신 내부가 아닌 외부와 접촉해 있다는 사실이 그 이유다.
따라서 문법에는 언제나 다음이 생략되어 있다.
(오브제에 대해 ~)
- 누군가가 반드시 관계 맺고 있다. (이를 전제하고 간다.)
- 그 누군가는 시점을 갖는다.
- 나는 감각하고 있다.
- 나는 느끼고 있다.
- 나는 생각하고 있다.
- 나는 내가 감각하고 느끼고 생각한 게, 그 오브제에도 달려있다고 투영한다.
따라서 당신이 "아 정말 꼴볼견이다" 라는 문장을 봤다면, 당신은 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1. 누군가가 발화한 것이다.
2. 누군가가 무엇을 접촉한 것이다.
3. 그 누군가의 관찰이자 체험인 것이다. 이는 곧 투영되어 그것이 그렇다는 식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얘기다.
쉽게 말해,
당신은 '체험된 것'을 말할 수 밖에 없거나, 또한 그것에 기반하여 '그것이 그런 성질을 가졌다'라고 주장할 수 밖에 없다.
즉, 내가 "이 사과는 달콤하다"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내가 오브제를 체험한 것에 대해서 썼거나, 그것에 기반하여, 그 오브제가 그런 성질을 가졌다고 본 것이다.
즉, 내가 사과를 체험한 것(달콤함을 느낀 것)에 대해서 썼거나, 그것에 기반하여, 그 사과가 그런 성질(달콤함)을 가졌다고 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법에서 주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당신의 몸의 상태를 표현할 단위
- 감각
- 느낌 (또는 감정)
- 생각
- 가정
2. 1번을 투영해서 붙여버릴 때 쓰는 것
가령 '있음'이라는 단어.
3. 시점에 대한 전제를 자각하게 만드는 용어
"나는 관찰하는 상태에 있다."
"나는 체험하는 상태에 있다"
"나는 참여하는 상태에 있다"
"나는 가정해보는 상태에 있다"
만일 이렇게 암묵적으로 전제되어있는 (또는 배경화되어서 자각되기 힘든) 것을
모조리 살려낸 다음 하나의 문법을 만들게 된다면,
대략 다음의 모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제된 것들이 대개 몸에 (인지되는) 해당되므로)
내가 감각/느낌/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끝말로 나타내는 문장이 나온다.
- 이 경우 "있다"라는 말 자체는 투영된 것임을 전제한다. 헌데 꿩이냐 알이냐 식의 논쟁은 피하도록 한다. 어차피 상관이 없다.
왜? 있었으니까 내가 느꼈을 것이고, 느꼈으니까 내가 있을거라고 투영하는 것이다. 그러니 역전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 언제나 '오브제'를 염두에 둔다. 그러니 느꼈다면 어째서 느꼈는지를 늘 자각하게 한다.
가령 "아 오늘 너무 행복했어"라고 말했다면, 이 사람은 체험된 것만을 얘기한 것이다. 그러면 그 상태는 왜 가능했겠는가? 그 배경을 명시해야 한다
이 문법의 특징은 사기치지 말자는 것이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냥 인지자가 체험한 것에 대해 '출처'를 물어본 것에 불과하다.
'어디서 느낀 것이지? 아 저거 때문인가?' 이런 식이다.
우리가 말을 하는 것은 체험했거나, 관찰한 것에 대해서, 또는 상황에 개입하기 위해서다. 언제나 이를 염두에 둔다.
전자 때문에 문법의 틀이 잡힌다. (생략되어서 명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몸의 상태가 개입되었음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Fascination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넋이 나갈 정도의 매력'이라는 뜻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는 번역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어떤 오브제에서 어떤 곳에 접촉했기에 인지자가 그렇게 체험하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이게 현실에서 사람들이 느낌을 받아내는 실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망각되면 안된다. 그래서 언어는 사실상 언제나 현실을 기반에 깐다.
따라서 오브제가 추상적인 형태는 존재하지 않음으로,
당연히 이는 '현실'에서의 구체성을 깔아서 접근한다.
그러니 뭐가 됐건 Fascination가 가능한 구체적 오브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폭죽이 터지는 것이 오브제가 된다거나 하여, 인지자가 그것을 보고 체험하고 그것에 대해서 느낌을 받은 것을 전제로 하여
Fascination라는 반응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이 단어는 이 상황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사전의 문제점은 이를 고려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인간의 이해가 유추에 있다는 것도 문제지만, 의지가 기저에 깔린다는 것도 문제다.
사전의 기저에는 '기록한다'라는 의지가 깔려 있기 때문에 닥치는데로 기록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유를 모르겠으나 상황에 대한 고려가 사라져 있다. 이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너무 지나치게 추상적인데 초점을 줬기 때문인데, 마치 그래야만 공통적이라고 착각한듯 하다.
추상이 이해될려면 구체를 제시해서 '스스로 도출하게' 해야 하는데 (나는 그렇다고 보는데) 사전 편찬자 혼자 자뽁해서 추상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별로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전을 편찬하려 했기 때문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식으로 추상을 이해할 순 없다고 본다.
관계적 지식을 이해하는 것이든 다른 것이든 간에, 이해를 하려면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대로 이해해야 한다.
즉, 오브제가 없으면 이해 자체가 불가능하다.)
상황이 필요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 상황에 대해 인지자가 관찰하고 있는지 체험하고 있는지를 구별해야 하는 것도 거기에 있다.
관찰자의 시점은 물리적 기술이 특징이다. 반면 체험자의 시점은 몸의 상태에 대해서 기록하는 것이 특징이다.
가령 사람을 보고서 저 사람이 키가 어떻고 형태가 어떻고 하는 것은 물리적 기술에 가까우나, 그래서 내가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를 기술하는 것은 체험자의 시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렇게 구별할 필요는 없으나 (따지고 보면 체험자의 시점에서 물리적 형태를 그렸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차피 몸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런 구별을 굳이 하는 이유는 오브제에 더 비중을 두느냐? 아니면 오브제에서 비롯된 자신의 몸에 더 비중을 두느냐 정도이므로, 인지자가 편의대로 분류하면 된다.)
상황정보가 핵심이다.
상황정보에 대해서 시점이 개입된 것이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의미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여기에 어떤 것이 배경화되어있는지를 보는 게 중요하므로, 그것을 기술한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은 사람이 있다면, 여러가지 요지가 안잡힐 수 있다. (스케치 때문. 언젠가 이를 풀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나는 다음이 요지라고 생각해본다.
1. 문법에 여러가지 정해진 틀이 있지만, 그것은 다 특정한 것만 취급하는 것 같고,
실제로는 '오브제-감각/느낌/생각/가정'이 가장 기본적이라고 본다. (이게 망각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한 것을 언급하거나 지시하거나 제시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몸의 한계)
나 역시 마찬가지,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뭔가? 이 글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내가 생략하고 있긴 하나,
나는 주로 오브제와 체험이 결합된 (언어가 발생하는 과정) 것에 대하여 염두에 두면서 쓰고 있다.
즉, 오브제로 치면 '언어'이고 그것에 대해서 '체험'부분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내 몸 상태를 보면서 맞춰보고 있습니다. 언어가 나오는 과정)
나는 단지 몸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내 몸 상태를 기술하고 있다. (생각 과정을)
이는 문장이 보통 하나의 동사를 가지고 있다는 둥의 형태로 끝난다 해서, 한번에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이게 오류입니다.)
이미 몸 자체로, 몸의 기능이 깔리기 때문에 동사 이런 거는 전부 문장을 쓰기 위한 규칙에 해당되는 것이고,
몸으로만 본다면, 우리는 동시에 수십가지 동사를 동시에 쓰고 있는 식이다.
즉, 이를 다시 제시해보자.
나는 지금 음악을 들으면서 모니터를 보고 있고 필을 받으면서 손가락도 움직이면서 생각도 하고 있고, 쓴 것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한다.
지금 내가 동사를 몇 개 썼을까? 7개 정도를 썼다. 나는 그냥 가만히 컴퓨터를 하는데도 동사 7개를 하고 있다. 이게 과연 적절한 말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수만가지의 몸의 가능성을 깔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 문장으로 나타낼 때 몇 개가 초점 잡히는 것이다.
이를 현실의 영역에서 보자.
인간이 있다고 할 때, 이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동사는 무수하게 많다. (달리다. 씻다. 먹다. 자다. 한바퀴 돌다 등등)
하지만 끝까지 파고들면 결국 동사는 한정된 분류가 잡힌다. (현실을 보자)
다음을 예상해볼 수 있다.
1. 본다
2. 듣는다
3. 만진다.
4. 잡는다.
5. 던진다.
6. 찢는다.
7. 맡는다.
8. 맛본다.
9. 생각한다.
10. 하다
잘 생각해보자.
당신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거나, 세모꼴을 보거나' 뭘 보던간에 당신은 본다.
그러니까 당신은 '본다'는 언제나 전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싸이 노래를 듣던, 이하이 노래를 듣던, 마룬5를 듣던, 당신은 듣는 것이다. 듣는 것은 언제나 전제된다.
끝까지 소급을 해야한다면 결국 이런 지점이 나온다.
결국 문법으로서 위상을 부여받아야하는 것은 이런 지점이다.
지각동사로 분류하는 게 아니라, 이것 자체가 1,2,3,4,5형식 같은 위상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소리다.
(싹 바꿔야 한다. 4형식은 기껏해야 '손'에 해당되는 동사의 일부에 해당한다. 즉 소유하거나 주거나, 하는 것은 손을 전제한다.)
당신은 4형식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손'을 전제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될 것이다.
내가 너에게 선물을 준다.
이것은 참여자의 시점에서 쓴 것이다.
즉, '내가 너에게 선물을 (손을 거쳐) 전달하는 것이다.
(오브제-인지자 관계맺는 것을 생각해보라.)
즉 몸과 관련된 기능들이 문법에 있어서 가장 1,2,3,4,5 정도로 고려되어야할 부분이 되는 셈이다.
이를 기본으로 깔고 '모형'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이상한 근거에 기저를 둔) 모형이 되고 만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 좀 파악되기 힘든 상태로 잡힌 틀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시죠.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한 문법이 더 와닿지 않는지.)
그래서 만일 현실이 실제로 인식되는 방식을 염두에 둔 문법을 낸다면, 다음이 문제될 것이다. (순서는 상관없음)
1. 몸의 기능 (및 시점) 그리고 투영 (이것도 몸의 기능)
2. 상황-오브제
여기까지 썼구요.
이 내용을 다시 더 세부적으로 상세하게 (쓰다가 또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것 같습니다.)
좀 더 명료하게 생각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이 글의 기본적 입장은 단순합니다. (라고 썼지만, 위처럼 다시 표현하면 단순하게 저는 생각합니다 겠죠.)
1. 몸의 기능이 문법의 핵이다.
그러므로 이를 중심으로 한 문법을 다시 세워야 한다.
설령 그것이 '언어'로 나타내는데 무리가 될 순 있어도, (제가 지금 단순합니다 라고만 썼던 것처럼, 이런 생략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틀에 대해서 자각할 수 있어야 하며, 최소한 왜 생략되게 되는지를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2. 상황-오브제, 시점은 언제나 전제된다.
3. 체험되거나 체험이 투영되어 오브제가 인식되거나 (인식이냐 있음이냐)
4. 언제나 상황정보다.
설령 체험적 기술만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기술의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개 '자극받았던 것'을 언급하게 된다.
그러면 오브제가 나온다.
예)
갑 = "아 쩐다."
을 = "뭐가?"
갑 = "아 그런 게 있어."
을 = "뭐가?? 왜?? 느꼈으면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갑 = "아 원빈 말이야."
이런 식이라는 거죠.
일단 여기까지만 써두려고 합니다.
스케치다 보니 설명이 되어있지 않거나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부분에 대해선 어쩔 수 없이 지나갔습니다.
실험적으로 쓴 글입니다. 다른 글도 써보고 싶은데, 잠깐 이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네요.
한가지 언급만 하고 끝맺으려 합니다.
제가 시점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시점을 갖고 계십니까?
관찰자이시겠죠?
그래서 제 글을 관찰하고 계시겠죠?
그러면 이 글은 누구 글이겠습니까? 제 글이겠죠. 그러니까 제 시점이겠죠.
이렇게 생각하면
여러분과 저 사이에 벽이 생깁니다.
즉 제가 타자라는 것이 자각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해하신 것은 다 '체험자의 시점'에서 여러분이 스스로 감각/느낌/상상/생각'을 한 것입니다.
왜?
시점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의 시점을.
결국 이해란 것은 자기가 인지한만큼의 결과를 기저에 깔아두고, 사상시키는 과정이 되버립니다.
사람마다 이해력에 차이가 나는 이유가 여기있죠. 이 기저영역은 이미지 형태로 되어있는데 사람마다 형태의 값이 다를 겁니다.
하지만 이미지가 어떻든 기저에 깔리면 그것이 사상을 하기 시작하죠. 그러니까 이해가 저마다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뭔가 이해가 안되었거나 했다면
그만큼 인지가 안된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재료가 없었거나, 여러분이 인지에 대해서 잘 몰라서도 그렇게 됩니다.
하지만 이 글이 스케치이다 보니, 재료가 부족했을 것입니다.
만일 뭔가 좀 부족하단 느낌이 들으셨다면,
여러분이 상상에 쓸 만한 재료가 없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만일 제가 상상할 수 있을 정도의 재료를 많이 제공했다라면, 저는 이렇게까지 얘기하진 않았을 것이지만,
제가 생각해도 이 글은 상상할 여지가 많이 없을 것이고 (재료가 많이 제공되지 않았을 것이고) 제 위주로 저를 위해서 쓴 것이기 때문에,
스케치 형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이 글을 읽었지만, 갈피를 못잡았다 그러면,
재료가 부족했거나
아니면 여러분이 인지를 덜 시도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는 이를 밝혔으니 재료 부족으로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쓰게 됨으로써,
이 글이 나타내는 바가 전제하는 게 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몸'에 적합된 접근을 쓰지 않으면 이해는 고사하고 언어 자체에도 혼란을 겪게 됩니다.
현재의 문법의 형태가 그런 것이죠. 1,2,3,4,5형식은 파기 되어야 합니다.
차라리 '몸'에 해당한 개념들을 메인으로 내세운 것을 주로 하되, 그것이 어떻게 투영되어 1,2,3,4,5의 형태가 되는지를 기술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현재의 '문법'이라는 결함적 틀에 의해서, 매 순간순간 마다, 촉발상태가 반복될 것이고, 그것이 의식에 강력하게 고착화될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과 언어 범주를 보는 방식이 늘 괴리를 틀어서 혼란만 빚어질 뿐이죠. (성가신 일이라는 겁니다.)
무의식적인 세뇌가 될 것입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 라고 하면 코끼리가 생각나죠. 왜 그럴까요? 이유는 단순하죠.
'코끼리'를 생각하지마! 라고 하는 순간, 이미 '코끼리'가 촉발되었으니까요. (잘 생각해보세요. 외국인은 이 문장을 들어도 뭔 소린지 모를겁니다.)
인간이 스스로 의문을 가지면서 개선을 못하고 좌절하게 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솔직히 1,2,3,4,5 가 어떤 배경으로 만들어진 모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기존 문법의 문제는 문법 틀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매번 촉발시키게 됨으로써 고착화가 된 것이고, 그것이 긍정적 느낌과 결합되어 있으면, 이것을 벗어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문법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도 여전히 그 문법에 촉발되고 있으므로,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하다가도 간섭받게 되는 것이죠.
차라리 생각을 말아야 하는데, 역시나 촉발이 되어버리죠.
다행히 이런 부분에 별로 관심 자체를 안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예 기존의 뿌리 자체가 없을테니, 촉발될 것도 없을 겁니다. (외국인처럼요)
그리고 결정적인 문제는 기존의 틀이 심하게 고착화된 사람은 그것 자체가 '기저영역'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강하게 기저 영역이 되어버리면, 어떤 경우를 만나도, 그 기저가 '현재의 상황'을 사상시키는데 있죠.
그래서 계속 기존의 모델이 현재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건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유추가 되고 있다의 문제입니다. (유추의 특징)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유추라는 단어를 '기저영역이 목표영역을 사상한다'라는 뜻으로 사용할 뿐,
그것의 관계가 유사한가? 그런 문제는 다루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하느냐? 제 생각엔 이게 인간의 사고방식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건축 은유도 그런 식이죠.
그게 맞는지 아닌지의 여부를 떠나서
건축과정이 기저영역에 깔리면, 그렇게 사상이 되는 것이죠. '세웠다, 허물었다. 붕괴되었다' 등등
그러면 왜 유추를 언급하는가?
제가 지금 접근하는 방식도 유추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 (몸) 을 기저로 깔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모든 현상이 '사상'되느냐?
아마 이 기저를 까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다르게 '사상'된다고 봅니다.
저의 경우 언어를 그렇게 보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는 이미지가 주가 됩니다.
진짜 현실을 염두에 두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 현실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전부 오브제. 이미지. 변화. 이런 식이죠.
저는 그것을 기저로 깔고 언어에 사상시켜서 해석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해 방식이 좀 다른 것이죠.
(기저에 뭐를 까느냐가 그 사람의 방식을 결정한다고 봅니다. 이는 상상력의 영역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도 어느 부분은 좀 고쳐야 될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 일단은 올려놓겠습니다.
제가 어떤 문제에 눈을 두는지, 그런 것들을 보시면 재밌을것이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다시 한번 상기해드리겠습니다.
이건 제 글이며, 제 시점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보고 계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시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뭔가를 느꼈거나 이해를 했다면, 그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게 여러분의 상상이고 이미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기저에 깔려서 제 글에 사상된거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이해에요 그게.)
이 제 언급에 대해서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제 글이 너무 설명이 덜 되어 있다는 점이 걸리는 군요.
빠른 시일 내에 이 개념들에 대해서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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