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메모리스
written by 라케
art by 투컬러톤
남성은 조용히 하늘을 우러렀다. 지독히도 푸르른 창공은 그 사이에 휘몰아치는 햇빛을 세어 보냈고, 그 강렬한 빛에 남자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햇빛이 보낸 잔상이 눈꺼풀에 남아 남성의 사색을 괴롭히지만, 남자는 그 또한 즐거이 받아들인다. 그의 눈은 노색이 가득 끼어 그 연륜을 말해주었고 바람은 노래하며 잔디와의 협주에 의해 세상에 가득한 행복의 음악을 연주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세상이 자신에게 들려주는 노래를 가득 자신의 안에 담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속은 곧 휘몰아치는 폭풍 같은 노래, 치솟아 오르는 불꽃같은 노래, 휘감아 도는 강같은 노래가 한데 뒤섞여 웅장한 협주곡이며 조용한 민요를 연주했다.
그 노래에 심취하며 남자는 발굽을 들어올린,
“이름 모를 아저씨!”
그의 마음속에서 연주되던 음악이 순식간에 혼선을 일으켜 불협화음이 되어버렸고, 그는 깜짝 놀라 그대로 넘어져버렸다.
“...... 많이 놀라셨어요?”
“내 이름은 호이다.”
“에이! 전혀 재미없잖아요! 호이가 뭐에요, 안 그래요?”
자신이 평생을 고수해왔던 이름을 겨우 자신의 반에 반 정도 살았을 어린아이가 순식간에 부정하는 모습이었기에 호이는 약간 기분이 묘해졌다. 그것은 나쁘다고 표현하기에는 애매모호한 미묘한 색체를 띈 느낌이었고, 그랬기에 호이는 그냥 입에 물고 있던 펜대를 굴렸다.
“꼬마야, 너 이름이 뭐냐.”
“시리토요!”
“그러냐.”
“네! 히히,”
시리토라고 스스로를 칭한 어린 포니는 해실거리는 미소를 지어보였고, 호이도 약간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가 특별히 기분이 좋아보이진 않았다.
“집에 가라.”
보통의 어른들이 아이를 쫓아 보낼 때 하는 일반적인 말을 호이는 내뱉었고, 시리토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여기가 좋은 걸요?”
오, 셀레스티아시여. 하는 말이 절로 호이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듯 했다.
“꼬마야. 여긴 위험하다.”
그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호이가 앉아있는 곳은 절벽 주위였고, 조금만 발굽을 헛디디면 그대로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곳이었다. 그리고 모든 아이가 그렇듯 시리토에게도 재미는 위험과 비례했다.
“재미있겠는 걸 뭘!”
“꼬마야, 집에 가라.”
“꼬마 아니고, 시리토. 계속 꼬마로 부를 거면 뭐하러 이름은 물어본 건데요?”
시리토는 이보다 더 부당한 일이 어디있겠느냐며 비난하듯 호이를 노려보았고, 호이는 그에 눈을 피했다.
“그래, ......시리토. 집에 가라.”
“싫은데요?”
호이는 입에 물린 팬대를 씹어먹을 뻔했고, 그 덕에 혀가 아려왔다. 물론 그걸 시리토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아저씨, 왜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세요?”
“...... 골치가 아파서.”
“에이, 골치가 왜 아파요. 머리가 아픈 거지.”
“집에 가라.”
이제 그의 말투는 거의 애원조에 가까워졌지만 시리토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처음엔 어린아이라 다른 사람에 대해 그리 신경 안쓴다고 생각했던 호이도 점점 그녀의 성격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시리토는 반짝이는 눈으로 호이를 올려다봤다.
“아저씨, 아저씨. 여기가 집이에요?”
“뭐?”
“늘 여기에만 계시잖아요. 여기 사세요?”
호이는 그런 시리토의 말에 잠시 절벽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그는 늘 이 시간만 되면 이 절벽을 찾는다. 그리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호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기서는 포니가 살지 못한다.”
“왜요?”
“집을 짓기에는 위험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보기가 좋잖아요?”
이 꼬마가 진정 경치를 논하는 것인가. 싶기도 했지만, 호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경치야 좋지.”
“근데 왜요?”
“지반이 약해 기둥이 잘 세워지지 않는다. 또, 폭우라도 내리면 집이 쓸어내려가버리지.”
“지반이 뭔데요?”
“음, 땅을 생각하면 편하겠군.”
“땅이요?”
“그래. 땅이 적당히 강해야 기둥이 세워지고 그래야 집을 지을 수 있다.”
“그러면 기둥을 안 놓으면 되잖아요!”
마치 대단한 걸 알아낸 것 마냥 시리토는 함박미소를 지었고, 그에 호이는 잠시 머리를 붙잡았다. 과연, 기둥을 놓지 않으면 된다니. 확실히 대단한 발상이었다. 물론 기둥이 없는 집이 세워질리 만무했지만.
하지만 호이는 그런 걸 시리토에게 설명하고픈 마음 따윈 추호도 없었다.
“시리토.”
“우와, 네, 네!”
이름을 불린 것이 기분이 좋은 듯 시리토는 금방 미소를 지었고, 호이는 전혀 그런 것에 여념하지 않았다.
“집에 가라.”
“아저씨. 여태까지 한 말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게 그 말이에요. 알아요?”
“안다.”
“....피, 재미없어요.”
시리토는 살짝 몸을 틀었고, 그에 호이도 약간 마음이 트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시리토가 다시 호이쪽으로 몸을 틀었을 때 호이는 울고픈 마음이 살짝 들었는 듯 했었다.
“그래도,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그런 그녀의 말에 호이는 자신이 맥없이 추락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저씨 여기서 안 살면 어디서 살아요?”
협박하고, 부탁하고, 강권하고, 심지어 애걸까지 해봤지만 시리토는 자신이 여기에 앉아 꼭 호이와 이야기 하겠다는 자신의 생각을 결코 굽히지 않았고, 호이는 그런 시리토의 생각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은 수용보다는 강제적 침입에 의한 불가항적 행동으로 해석되어야 할 테지만, 그 곳의 두 포니 중 한 포니는 전혀 그곳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고, 나머지 한 포니는 그런 자신의 상황에 대해 거대한 한탄을 늘어놓고 싶었다. 전자는 후자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저기, 숲속의 오두막에서 산다.”
“그렇군요! 숲에는 뭐가 살아요?”
이미 그녀의 질문에 반항하기 보단 그저 대답하는 게 낫다는 것을 깨우친 호이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버섯.”
“...버섯이요?”
“그래, 버섯. 겨울이든 여름이든 피기 때문에 먹는 데는 지장이 없지. 고마운 생물이다.”
그 말에 이어서 호이는 계속해서 버섯의 장점과 효율에 대해 설명했다. 대충 영양가와 그 맛에 대한 칭찬이었고, 그 출처와 생태, 그것에 대한 감사였다. 그리고 그런 호이의 설명이 계속 될수록 시리토의 얼굴은 굳어만 갔다.
호이의 말이 버섯은 최고의 식물이며 우리는 그 생물에게 감사해야 한다, 라는 거의 클라이막스에 가까운 지점에 이르렀을 때 즈음, 시리토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사실 시리토가 호이의 말을 끝까지 들어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임이 분명했다.)
“아저씨!”
“응?”
“전 어린애에요.”
“알고 있다.”
“아니요. 모르고 계세요. 전 어린애에요. 여자애고. 그리고 보통 버섯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아요. 보통 숲에 사는 걸 물었을 때 제가 듣기를 바랐던 건 숲에 사는 동물들이라던가, 얘쁜 꽃에 관한 이야기라고요. 버섯같은게 아니라!”
이런 단순한 것도 모르냐는 것처럼 시리토는 호이를 힐난했고, 호이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의 실책을 매꿔보기로 해보았다.
“숲에는 이리나 늑대같은 맹수들이 있는데......”
시리토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그래.”
“저는 늑대같은 거에도 관심 없어요.”
“...... 그러냐?”
“네.”
질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시리토를 보고 호이는 인정했다. 시리토는 확실히 자신의 이야기를 지루해 하고 있었다. 본성이라고 하면 본성이라고 할만한 것이 자신의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호이는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본성이었을까. 그는 알고 있었다. 그건 이야기꾼의 본성이었다.
“그럼 들어보거라.”
“뭘요, 뭘요?”
“늑대의 이야기란다.”
시리토는 금세 얼굴을 찌푸렸지만 호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는 입을 열었고 그의 눈빛은 알 수 없는 반짝임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그 빛이 무엇일까, 시리토는 생각했지만 갑작스레 시작하는 호이의 말에 그 궁금증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옛날, 이라고 하기엔 뭣한 옛날에, 작은 늑대 하나가 살고 있었다. 그 늑대의 이름은 울프. 세상에 불만이 많은 늑대였지.”
“늑대 이름이 울프라니, 뭐에요 그게.”
시리토는 실없는 웃음을 흘렸고 호이도 따라 미소를 지어주었다.
“울프는 포니를 잡아먹는 늑대였어. 사실, 모든 늑대들은 포니를 잡아먹었지.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너가 배고플 때 풀을 뜯어먹는 것처럼 그들은 배고플 때 포니를 잡아먹는 것 뿐이었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
하지만 국가에게는 그게 결코 자연스러운 일일 수는 없었던 거다. 그래서 그 당시 이퀘스트리아를 다스리고 있었던, 물론 지금도 다스리고 계신 셀레스티아 공주께서는 그 이름도 찬란한 위대한 유니콘, ‘현명한 클로버’를 늑대들이 살고 있는 설원에 보냈다.
충성스러운 클로버는 공주의 말을 따랐고 설원에 도착했다. 클로버는 현명했지만 전능하지는 않았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지. 거기 살고 있던 수많은 늑대들을 그녀는 물리칠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차라리 거기 사는 모든 포니들을 이주시킬 생각으로 설원의 방방곡곡을 뛰어다녔다.
정말 차디찬 설원이었고 차가운 바람이었지. 클로버는 온몸이 얼어붙는 추위에서 벌벌 떨며 포니들에게 이퀘스트리아에 대해 설명했다. 그 때의 이퀘스트리아는 신생국가였고 잘 알려지지 않았었거든. 열심히 클로버는 설명했고 포니들은 이퀘스트리아로 가겠다는 의지들을 가지기 시작했다. 잘 굴러가고 있는 도중이었지.”
“잠깐만요, 잠깐만요.”
“왜?”
“늑대 이야기라면서요? 늑대는 도대체 언제 나오는데요?”
“듣다보면 나오겠지, 라는 느긋한 생각으로 들어라.”
시리토는 입술을 비죽였고 호이는 웃었다. 호이는 계속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시간은 호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기웃기웃 서쪽으로 기어갔고 낮은 황혼을 낳았다. 시계는 이야기라는 초침과 청자라는 분침과 함께 하얀 공판을 걸어갔다. 조그마한 시간은 화살이 되어 그들의 사이에 박히고 호이는 불연 듯 시간을 깨달았다.
“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
그에 시리토도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이 취해 불그스름한 얼굴로 미소짓고 있었다.
“그렇네요?”
“이젠 정말로 집에 가야할 시간일 것 같은데.”
호이는 다기들을 추스렸고 시리토도 호이의 말에 긍정했다. 집에 돌아가야할 시간이었다. 그녀가 착한 아이든 나쁜 아이든 간에. -엄마라면 돌아온 아이를 혼낼 시간이니까.
“그럼 오늘은 돌아갈게요.”
내일도 오겠단 뜻을 품은 말을 들으며 호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가라.”
시리토는 군말없이 뒤돌아 마을로 가버렸고 호이는 알 수 없는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의 희작질은 단지 그것이 청자가 한명밖에 없는 외로운 극장이었다 할지라도 즐거운 것이었다.
기억속에 남아있던 이야기들을 건드리며 한숨을 내쉬던 호이는 언덕을 넘어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내일도 이야기 들려주세요!”
호이는 미소했다.
알 수 없는 만남에서 시작해 시리토는 매일매일 빠짐없이 호이의 집을 찾아왔다. 어느날은 열매를 줍느라 늦었다고 했고 어느날은 늦잠을 자서 늦었다고 했지만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시리토는 호이를 찾아왔다.
매일매일 시리토가 찾아올 때마다 호이는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떨 땐 포니의 이야기였지만 용의 이야기라던가 신비로운 동물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기도 했었다. 주제도 다양했기에 가끔 시리토가 싫어하는 내용도 있기 마련이었지만 시리토는 어떤 이야기에도 울고 웃어주었고 호이도 썩 괜찮은 이야기 꾼이었다.
오늘도 시리토가 올 시간이 되었고 호이는 늘 그랬듯이 한명의 어린 청자를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 조용히 물을 끓였고 단 차의 향기는 그의 오두막을 가득 채웠다. 약간은 차가운 바람이 문틈 사이로 세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호이는 자신의 기억을 뒤적거렸다.
순식간에 수많은 이야기 거리들이 자신에게 쏟아져 내렸다. 몇몇 슬픈 이야기와, 우스운 이야기, 실제로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 환상속의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잔잔한 이야기, 아련한 이야기, 온갖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연회를 열었고 원무를 추며 호이의 머릿속에서 뛰어다녔다.
호이의 머리는 거대한 도서관이나 마찬가지였고 수만의 음유시인이 들끓는 곳이었다. 이야기거리를 찾는 것 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시리토가 호이의 오두막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호이의 머릿속에선 다섯 개의 이야기들이 금방이라도 호이의 입 밖으로 뛰쳐나올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왔구나.”
“왔어요!”
시리토는 늘 그렇듯 함박미소를 띈 얼굴로 호이를 바라봤고 호이는 그 얼굴에 저도 모르게 기쁜 미소를 띄었다. 조용히 호이는 찻잔을 내밀었고 시리토는 가볍게 그 찻잔을 받아들였다.
“오늘은 향기가 좋네요!”
“언제는 안 좋았던 것처럼 이야기 하는군.”
“음, 솔직히 늘 좋은 맛은 아니었잖아요.”
한번도 자신의 차가 맛없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기에 호이는 내심 충격받았지만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감정을 숨겼고, 그런 호이의 시도는 처참히 실패했다.
“호이아저씨. 충격 받으신 거 아니까 그렇게 얼굴 찌푸리지 마요. 더 이상해 보여.”
“...... 그럴 땐 모르는 척 하는 게 예의라고 배운적은 없는거냐?”
“못된 아이라서.”
그러며 시리토는 정말 악동처럼 찡그린 미소를 지어보였고 호이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리토는 이렇게 늘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아이였다. 무엇이라고 특별히 말할 건 없었지만 분명 시리토에게는 그런 재능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아이에게 큐티마크가 있었던가?
“아저씨.”
“으, 응? 왜.”
“아, 다섯 번을 불렀는데 이제사 말해주시네요. 오늘은 말이죠, 아저씨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 이야기? 매일 들려주던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란 말인가?”
“아뇨, 그런 말이 아니라요.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려달란 얘기에요. 아저씨가 주인공인 이야기 말예요.”
호이는 잠시 눈을 끔뻑거렸고 입술을 달싹였으며 발굽을 떨고 서야 시리토가 하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 어떻게 보면 그저 이해하기 싫었던 걸지도 모르는 것이다. 커다란 한숨이 호이의 입에서 세어나왔다.
“왜.”
약간은 쉰소리였지만 시리토는 알아채지 못한 듯 재잘거렸다.
“그냥, 듣고 싶으니까요!”
시리토는 늘 그런 식이었다. 그냥, 혹은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시리토가 움직이는 이유의 전부였으며 아마도 뭇 아이들의 움직이는 이유일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제 그의 하나뿐인 청자는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호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
“들려주고 싶지 않다.”
“네?”
“들려주고 싶지 않다. 들었으면서 다시 묻는다는 건 그 대답의 이유나 번복을 바라는 거겠지만 그렇게 할 생각도 없다.”
“조르면요?”
“안 돼.”
“부탁해도?”
“안 돼.”
“협박은요?”
조르기, 부탁 다음엔 협박. 꽤 빠른 협상의 진행이 아닌가. 호이는 실소를 터뜨렸지만 그것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안 돼.”
“아, 제발요.”
“안된다면 안되는 거야.”
시리토는 온갖 아양과 애교, 강권, 부탁 등등 그녀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실천했고 끝없이 밀려오는 호이의 거절을 들어야만 했다. 그쯤 되면 제풀에 지쳐 포기할 만도 했건만 시리토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아마도 제 스스로 정한 무언가의 룰이 아닐까, 호이는 막연히 생각했지만 물론 알 수는 없다.
“안된다면...”
“안되는 거야. 그 말을 우리 엄마한테만 해도 백번은 들었을거에요.”
“근데 왜 그러는데?”
“계속 똑같은 말 시킬 거예요? 그냥이라니까.”
“그냥 취미로 사람을 미치게 만들수도 있나보지?”
“제가 그런 악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거에요? 물론 아저씨를 골리는 일이 재미있긴 하지만 말이죠.”
“너...”
“농담이에요, 농담. 근데 아저씨가 이야기 안들려주시면 많이 실망스러울 것 같은데.”
“그럼 실망해라. 네가 뭘 하든 내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은 없다.”
“됐어요, 됐어. 안 들으면 되지. 까짓것.”
시리토는 보여주기라도 하듯 입술을 비죽 내밀었고 호이는 외면했다.
“그래. 그러면 오늘은......”
시간이 이야기와 함께 흘러갔다. 그의 이야기는 금방 초와 분을 헤집어 놓았다. 그런 이야기였다.
어떤 영웅의 이야기였다. 하늘신의 저주를 받고 태어난 영웅은 온갖가지의 고통과 비극을 맛보지만 결국은 인생의 승리자가 되어 아름다운 배필을 얻고 행복한 말년을 맞이한다. 허나 그가 죽은 뒤 하늘신은 그를 증오하며 저승에서 그의 영혼에게 끝없는 고통을 주었고 영웅은 하루에 수십 번을 불에 타 죽는다.
어떤 아가씨의 이야기였다. 마을에서 태어난 그녀는 행복하게 그 마을에서 자랐다. 하지만 어느 날 운명적인 만남으로 한 남자를 만난다. 시골에서밖에 살지못한 그녀는 도회지에서 온 남자에게 반했다고 생각하며 그 남자에게 구애를 하지만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한 남자는 늘 같이 지내왔던 소꿉친구라는 것을 깨닫고 도회지 청년과의 결혼식 전날 소꿉친구와 야반도주를 했다. 허나 자존심이 셌던 도회지의 청년은 고작 시골의 아가씨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해 결국 아가씨와 그녀의 소꿉친구를 찾아내어 처참히 살해한다.
어떤 드래곤의 이야기였다. 보석과 재물을 탐하는 자신들의 종족에 대해 드래곤은 크게 부끄러워했다. 드래곤은 한탄하며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도중 어느 공주와 만나게 된다. 오늘 막 궁전에서 탈출한 그녀는 드래곤을 보고 자신을 태워달라고 부탁한다. 어이없는 부탁이라고 생각한 드래곤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만 계속되는 공주의 부탁 끝에 드래곤은 공주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먹는다. 드래곤은 비행했고 공주는 좋아했다. 공주는 높이, 높이를 외쳤고 드래곤도 좋아하는 공주의 말에 행복하여 하늘로 날았다. 그리고 구름을 뚫는 순간 공주는 강력한 햇빛에 눈이 멀어 버려 추락하고 비행에 도취되어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드래곤은 크게 탄식하며 낙사했다.
낙사한 드래곤의 이야기를 끝으로 호이는 눈을 시계로 돌렸다.
오늘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 취해 너무도 나불거렸다고 호이는 생각했다. 입만 열면 이런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 예기치 못한 것을 집어넣고 그에 대한 듣는 자의 반응을 보는 것이 호이는 즐거웠기에 도저히 시리토를 향한 희작질을 멈출수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의 시리토의 반응은 달랐다.
그녀는 화내고 있었다.
“더 이상 아저씨의 이야기는 듣지 않을거에요.”
정말 예기치 못한 전개였다.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