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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니 핑크 :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Keiner liebt mich/Nobody loves me 1994년작
사랑하는 법 혹은 살아가는 법 배우기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 삶에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할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사랑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라는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은 병적이다. 아니 어쩌면 이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일지도 모른다. 때로 우리는 "나만 혼자이다.", "외롭다"라는 생각에 자꾸 갇히면서 사랑에 성공하지 못하면 마치 인생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사랑에 대한 노래와 영화, 담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솔로, 심지어 모태솔로는 마치 죄와 같이 여겨진다.
우리의 평범한 여주인공 파니 핑크도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아간다. 영화는 파니 핑크가 공개 구혼을 위해 스스로를 어필하는 영상을 촬영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녀의 표정은 불안함으로 가득차있다. 이내 "못 하겠어요. 저 자신을 이렇게 팔 순 없어요."라며 살아가는데 남자가 꼭 필요한건 아니지 않냐며 자조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서른에 가까운 나이에 이미 몇 번의 사랑에 실패한 그녀는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죽음. 오히려 죽음이 그녀의 관심사이다. 죽음은 무엇일까. 그녀의 귀걸이부터 목걸이와 모든 악세사리는 해골이나 십자가로 가득하다. 옷은 언제나 검은색이다. 마치 장례식에 가야 할 것만 같이 그녀는 자신을 꽁꽁 싸맨다. 변변찮은 3류 소설 작가인 그녀의 어머니는 파니에게 "너는 왜 연애에 관심이 없냐, 삶을 낭비하지 말라"며 핀잔을 준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언제나 마치 20살에 연애를 하지 않고, 30살 즈음에 결혼감을 찾지 못하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 때와 시간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때론 사랑은 마치 이루어내야만 하는 과제처럼 우리 마음을 압박한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들을수록 파니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죽음으로 다가간다. 자살하는 방법을 배우고 자신의 관을 스스로 짜기도 한다.
사랑에 실패하고 나면 대개 자존감 내지 자신감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를 쉽게 잘 극복해내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반대로 자기 부정의 고리 속으로 끝없이 빠져드는 사람도 있다. 예컨데 파니와 같이 "나는 사랑받을만하지 않아. 누가 나 같은걸 사랑하겠어."하고 되뇌이는 것이다. 이 영화의 원제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Keiner liebt mich"는 파니의 자조적인 탄식이다. 그러던 와중에 파니는 아파트 엘레베이터에서 오르페오라는 괴상한 남자를 만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남자는 점을 봐주는 사람이라며 자신을 소개한다. 에르페오는 대낮에는 길거리에서 점을 봐주고, 밤에는 게이바에서 노래를 부르며 근근히 살아간다. 삶의 의미를 찾아 헤메던 파니는 어느 날 알 수 없는 기분에 이끌려 오르페오의 집에 찾아가 점을 봐달라고 한다. 그는 파니가 조만간 한 남자를 만나게 될텐데, 그 남자가 마지막이니 꼭 잡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오르페오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의 오르페우스를 연상시킨다. 오르페우스는 영원한 일편단심의 사랑을 상징한다. 오르페오는 게이바에서 만난 한 남자와 사랑을 했다. 그러나 오르페오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게되자 그 남자는 오르페오를 떠나버렸다. 사랑에 버림받은 그는 괴로워하다 결국 병이 심해져 앓아 눕는다. 백인 사회에서 동성애자에 흑인에 가난하기까지 한 그의 삶은 기구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런 그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외로워하는 파니를 나무란다. 너는 사랑받지 못하는게 아니라 너 자신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거라며. Keiner liebt mich. 사랑하지 못하는 것, 아니 정확히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의식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기에 느끼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면 남을 사랑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막연히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짠 하고 나타나 줄 것을 기대한다. 그러니까 흔히 꿈꾸는 사랑은 사랑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랑받는 것이다. 파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기 자신이 별로 사랑스럽지 않다고 되뇌이면서도 그래도 그런 자신을 사랑해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운명의 상대라는 것이 등장하자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은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녀에게 사랑은 "나를 사랑해 줄 아무개"만 있으면 되는 것으로만 여겨졌다. 키가 클 필요도 없고 잘 생길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런 환상은 그 사람이 나를 위한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산산조각난다. 사실 이 세상 어디에도 나를 위한 백마 탄 왕자님은 없다. 오르페오가 묘사한 것과 똑같은 남자를 발견하자 파니는 그를 자신의 운명의 상대라고 여기고 순식간에 그에게 자신을 내던진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혼자 꿈을 꾸고 있었단 것을 알게 되자 파니는 절망에 빠진다.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니 어쩌면 더 나빠졌는지도 모른다.
▲ 파니핑크 中 Non, je ne regrette rien에 맞춰 춤추는 파니와 오르페오
얼마간의 들뜬 기분에서 다시 죽음으로 침착하는 삶으로 돌아간 파니는 서른번 째 생일을 맞이한다. 직장에서 생일 축하를 해준다며 꽃가루를 뿌려대지만 파니에겐 자신의 사랑을 방해한 직장 동료가 저주스러울 뿐이다. 혼자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 찾아간 식당에서는 시키는 메뉴마다 족족 재료가 없다고하여 결국 파니는 샌드위치를 먹고 집으로 돌아간다. 되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생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아르페오가 자신을 위해 케익과 함께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해 놓았다. 둘은 에디트 피아프의 "아니, 난 아무것도 후회 안해 Non, je ne regrette rien"에 맞춰 춤을 춘다. 게이인 아르페오와 파니의 우정은 오히려 이 영화에 나온 어떤 사랑보다도 더 아름다워보인다. 아르페오는 파니에게 자기 자신을,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사실 외로움을 느낄 때 사람들은 그 외로움에 빠져 자기 스스로를 더욱 외롭게 하는 경향이 있다. 파니에게 아프리카 전통 리듬에 맞춰 옷을 다 벗어제끼고 미친듯이 몸을 흔들게 한 오르페오는 그야말로 사랑과 음악의 신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만의 이상형을 가지고 있다. 그건 외모가 될 수도 있고, 지성이 될 수도 있으며 재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형과 사랑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건 이상형이 너무나 현실세계에 있을 법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렇다기보다 그러한 외적, 내적 조건들은 사랑과는 거의 관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아주 관련이 없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사랑은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서 온다. 영화 초반에 파니의 어머니는 자신의 소설을 폄훼하는 평론가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던 중 옆 자리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자신의 소설을 좋게 읽었다고 얘기하자 방금까지 화를 냈던 사람이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살가워진다. 파니가 끝없이 죽음에 집착하는 것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 실존에 의미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이란, 서로의 가치와 의미를 오롯이 발견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가능하다. 이는 물론 자기 자신 스스로에 대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의 가치를 발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꽃>과 일맥상통한다. 비로소 내가 의미있어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된다.
우리의 여주인공 파니 핑크는 여러 명의 남자를 거쳐왔지만 그러한 사람을 만나지도, 또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오르페오를 통해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갔고, 그 둘은 성적 정체성을 초월해 서로를 오롯이 이해하고 사랑했다. 어쩌면 사랑과 우정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파니 핑크가 변화하는 모습에는 에리히 프롬이나 실존주의에서 얘기하는 '존재론적 물음에 조응하는 실천적 사랑'이라는 것이 잘 녹아있는 듯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그리고 사랑은 사랑받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처음부터 백마 탄 왕자님이란 것은 없다는 것. 차라리 서로를 서로에게 기울여가며 "우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겁내지마, 과거는 뒤에 있는 너의 모습이고, 미래는 앞에 있는 너의 모습이야...
과거와 미래는 항상 너와 함께 하는거야..그것이 가끔 널 유혹할거야..
잠시 앉아 쉬라고, 휴식을 취하라고..네가 원하는 그 무언가를 약속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그 말 듣지마..계속 앞만 보고 걸어가...그리고 시계는 차지마...항상 몇 시인지만 알리려고 하니깐..그 보다는 "지금"이라는 시간만 가져..알겠지?"
그 순간 파니에게는 여지껏 용기내지 못하고 지켜보기만 했던 한 남자가 다가왔다. 새로운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오르페오는 오르페우스가 별자리가 되었듯 저 밤하늘로 사라진다.
출처 : 블로그 영화/문학/사회 이야기와 삶 http://blog.naver.com/adsl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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