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이십대를 보내면서
이십대 내 인생의 가장 큰 사건을 생각해보면
바로 사랑이다.
청춘의 황금기, 인생의 빛나는 그날을 2년이란 시간이 넘도록 함께 달려왔던 사람이 있었다.
그사람은 지금 내겐 추억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만큼 너무나 퇴색되고 변질된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그당시 내겐 목숨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늘 '그'라고 불렀었다.
그는 내가 그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고,
그 역시 나를 '그녀'라 불렀다.
남들이 보기엔 유치하고 뻔한 연애 이야기겠지만 내게는 힘든순간 버틸 수 있는 마지막 지푸라기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랑했던 그와 내가 헤어진건 지금 생각해보면 간단히 말해
서로 더이상 사랑하지 않아서였지만
그 당시엔 난 굉장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그 사람 생각만해도 마음이 옥죄어 눈물이 흐르곤 했었다.
그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이제는 기억을 더듬어보려해도 잘 기억나지 않는 11살로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반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키가 작았고, 그는 키가 컸기에 우리가 짝꿍이 된 일은 한번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그당시 이성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는 매일 다른 여자아이들을 바꿔가며 실뜨기를 하던 전형적인 바람둥이였다.
난 그 모습이 너무 보기싫었고, 나쁜남자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나의 최초의 질투였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날 체육시간.
같은반 남자아이가 던진 돌에 맞아 내 눈가가 찢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얼굴도 피투성이였고 흘러내린 피때문에 체육복도 엉망이었다.
당시 우리학교 체육복은 파란색이었고 내 피는 빨간색이었기에
보라색이 나와야정상인데 왜 이토록 새빨갈까, 선생님의 학력위조를 의심하며
양호실로 향하는 순간.. 그아이가 내 옆에 있었다.
하지만 난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봤자 내일은 3분단 넷째줄 단발머리 기지배랑 실뜨기할게 뻔했기 때문이다.
난 나쁜남자는 싫다구. 꼬마양반. 후훗.
양호실에서 임시로 치료를 하고 교실로 돌아왔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난 진정들하라는 눈빛을 보내며 자리로 돌아왔고 그제야 책상에 놓여있는 쪽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지.
그간 꾸준히 받아온 행운의 편지인가.
나는 떨렸다.
꼬물꼬물 펼친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있었다.
"나 때문에 미안해. 많이 아팠지? 내가 사과할게. 영준이가."
바로 내게 돌을 던진 아이의 편지였다.
이상했다.
분명 영준이는 내 옆 분단에 앉아 바로 옆자리였고, 아까 양호실에도 같이갔다가 지금막 같이 돌아왔는데 이 편지는 대체 뭐란말인가.
내가 영준이에게 이거뭐야?라고 묻는 순간
그 사람이 내 어깨뒤로 불쑥 나타나 말했다.
"사실 그거 내가 쓴거야. 내 친구대신 사과할게."
이런 오지라퍼가...
난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래봤자 낼 모레는 2분단 여섯째줄에 앉은 체르니 30번 치는 기지배랑 오르간 치고 놀꺼면서.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그사람과 나는 늘 서로의 주위를 맴돌았던 것 같다.
생각보다 빠르게 유년시절이 흘렀고, 우리는 금세 성인이 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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