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걸스 정도면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할 자격이 있다.
자격이라 말했지만 당시의 원더걸스는 그 이상의 폭발하는 에너지 같은 것이 있었고 사람들은 거기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운명은 기구하게도 마치 이전에 얻었던 인기의 반작용처럼 미국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매체에선 금의환향하는 것처럼 포장되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곧 누구나 알게 되었다.
당시 무릎팍 도사에서 조나스 브라더스를 10대들의 비틀스라고 칭하던 박진영이 새삼 애처롭게 느껴진다.
조나스 브라더스를 추켜세운다고 원더걸스의 격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원더걸스는 미국 활동 당시에 조나스 브라더스란 가수의 전미 투어의 오프닝 게스트를 선 적이 있다)
비틀스라..
썩어도 준치라고, 과거의 위상이 있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어느정도의 입지는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소녀시대가 저만치 앞서가 있고 선미를 잃었다는 것이 조금 뼈아프긴 하지만.
원더걸스의 컴백에 대한 쏟아지는 관심 속에 혜림이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원더걸스에게도 좋은 기회가 왔다.
정규 2집 Wonder World가 상당히 괜찮았던 것이다.
그동안 원더걸스의 노래는 복고나 후크송에 너무 집착한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그래도 노래가 좋았기 때문에 어느정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다음에도 같은 패턴을 반복하기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고, 이를 의식한 것인지 Wonder World는 완전히 새무장한 앨범이었다.
이 앨범으로 비로소 원더걸스는 복고와 후쿠송의 틀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간의 아쉬움을 떨쳐버리고 음악적으로 고양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이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랙. 새무장과 탈피란 말이 가장 어울리는)
거짓말처럼 원더걸스는 선예의 결혼으로 다시 한번 와해된다.
기약 없는 활동과 불투명해진 앞날에 맴버들은 개인활동으로 공백기를 메워야 했고 결국 소희와 선예는 그룹을 탈퇴한다.
(이런 빈정 어린 시선도 감내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 그런데 선미가 다시 돌어올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아이돌 그룹에게 맴버의 탈퇴와 영입은 팬덤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사실 선예로 인해서 이미 많은 타격을 입음).
현아를 포함하면 이로써 세번째인데 다른 그룹이었다면 진작에 엎어졌을 테지만 원더걸스는 다시 의기투합한다.
원더걸스가 다시 뭉친다고 해도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음악을 할 것인가다.
주목 받기 쉬운 위치이지만 그 시선이 머물지 못하면 반대로 잊혀지기 쉬운 위치기도 했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원더걸스는 밴드를 선택한다.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난데없이 밴드라니. aoa처럼 컨셉만 차용할 수도 있는 것이고
진중하게 밴드 사운드를 탐구할 수도 있는 것인데 원더걸스는 후자를 택했다.
어찌 됐던 험난한 길이 아닐 수 없다. 본래 밴드하면 자부심도 배타심도 강한 음악 아니던가.
(밴드하면 일반적으로 락을 떠올리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원더걸스의 음악은 락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게 발매한 앨범은 대중들에겐 딱히 좋은 평가도, 야박한 평가도 받지 않았다.
그저 원더걸스의 새 노래이기 때문에 쉽게 주목 받을 수 있었고 노래도 적잖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말그대로 적당한 수준에서 소비되었다.
평단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이 앨범을 상당히 좋게 봐주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동안의 원더걸스의 복고라는 색채는 장점이기도, 어떻게 풀어야할지 고민하게 되는 숙제와 같은 것이었는데
이 앨범은 그것을 아주 영리하게 풀어냈다.
원더걸스는 역설적으로 과거의 레트로팝을 오마주로써 복고에 기인하지만 전작들과는 다른 새로운 출발점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과거와 미래를 봉합하는 새로운 지점인 것이다. 이럴 때 앨범 타이틀 REBOOT는 절묘하다.
자신들의 한계점과 비판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보란듯이 이겨내는 모습은 정말이지 멋지지 않은가?
그래서 이 앨범은 익숙하면서도 새롭고 영민하다.
이 앨범은 2016 한국대중은악상 최우수 팝-음반 부문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전작과의 연속성을 거부하고 시리즈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새롭게 만드는 것’이라는 뜻으로 통용되는 앨범 명 [REBOOT]에
‘복고’라는 그룹 고유의 개성마저 담보했으니, 성공적인 부활에 볼드체까지 적용해도 부족함이 없다.
– 선정위원 이종민
사실 이 앨범이 대중성이 살짝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음악성은 담보한다고 자신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싱글과 Why So Lonely가 공개되었을 때 나는 확신했다.
원더걸스는 걸그룹 역사의 산 증인이고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처럼 아이돌로써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원더걸스는 돌연 해체하고 만다.
언젠가 우연히 강타가 군대 가기 전 마지막 방송으로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한 걸 들은 적이 있다. 10년은 족히 된 이야기 같다.
자신은 아이돌 1세대로서 모종의 책임감 같은 것이 있다고 했다. 아이돌이란 부정적인 시선을 이겨내고 걸출한 음악인으로 거듭나서
대중들과 후배들에게도 인정 받는 좋은 선례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구체적으로 저스틴 팀버레이크를 지목하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본다면 강타의 그런 바람은 안타깝게도 딱히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렇다.
나는 이걸 원더걸스에게서 느꼈다.
날 때부터 금수저처럼 모든 걸 다 가진 사람도 있고 자신의 손으로 성공을 일궈내는 사람도 있다.
파란만장한 그룹 원더걸스의 역사는 성장 그 자체라 생각한다.
전성기를 지나 미국진출 실패,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얼마 못가 위기를 맞이하고 4명이 된 원더걸스는 또 다시 일어선다.
아이돌에게 성장이란 대단히 중요한 키워드다.
아이돌은 나이도 어리고, 음악적으로도 미숙한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시간은 지나 아이돌도 나이를 먹고 가요시장도 변화한다.
이때 성장을 하지 못하는 아이돌은 마치 탈피를 하지 못한 갑각류처럼 생명을 잃게 된다. 그래서 아이돌은 수명이 짧다고 한다.
원더걸스는 몇번 거짓말처럼 위기를 맞이했고 또 거짓말처럼 그 위기를 극복했다.
위기 극복의 근간은 단연 음악적인 성장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아이돌이 범람하고, 다시 많은 아이돌이 기억에서 사라지는 이때
원더걸스 같은 가수가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으면 좋겠다,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작은 소속사의 장삿속이었다 한들 많은 아이돌들이 본인의 음악적 가치관을 함양해서 좋은 가수로 성장하길 바랬다.
그리고 원더걸스는 앞으로 어떤 음악을 들려줄까하는 행복한 기대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더이상 더이상 원더걸스는 없다.
또다시 거짓말처럼 일어나길 기대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
물론 음악활동을 계속 이어나가는 맴버도 있겠지만 그것이 원더걸스가 아니기 때문에 아련하다.
혜림도 이제는 너무 잘 어울리는데...
모르는 사람들에게 원더걸스는 텔미, 노바디로 기억될 테고, 남을 씹길 좋아하는 사람은 한물 간 가수 취급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더걸스는 데뷔 이래 꾸준히 좋은 음악을 해온 그룹이고 부단히 성장해왔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