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시골에서 자라 태생이 촌놈이었던 나는 중학교때 읍내에서 극장에 처음가봤고,
고등학교때가 되서야 짝퉁 나이키 에어맥스를 사려는 친구를 따라서 서울에 처음가봤을 정도로 세상에 무지했다.
시골 아이의 사랑이라는 것은 초등학교때 좋아하던 여자애가 나를 버리고 빵집 아들인 윤철이랑 놀았던 것이참 서러웠다는 그 정도의 감정일 뿐인지라,
제대로된 연애한번 못해보고 남고를 졸업한 나에게 대학이라는 곳은 무궁무진한 연애의 기회가 도사린 천국일줄 알았다.
고등학교때 그래도 무협지를 열심히 판 까닭인지 언어영역 점수가 내 수능점수를 하드캐리해서 겨우겨우 대학엔 가게 되었지만,
그렇게 들어간 대학은 시트콤과는 너무도 달랐다.
난 대학이 지성의 무대이자, 이시대를 이끌어갈 엘리트를 키우는 상아탑이라고 알고있었는데,
1학년때부터 내가 배운 것은 라이타와 숟가락으로 병을 따는 방법과, 담배연기로 도너츠만드는 방법, 369와 고백점프, 바보게임 뿐이었다.
1년을 술마시다 보내고 나서 처참한 숫자로 이루어진 성적표를 받고 보니 어느새 나는 선배가 되어 있었다.
남들은 장학금도 받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학과내에서 여자친구도 사귀었는데, 난 도대체 뭘 한걸까?
자괴감이 엄습할만도 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본투 불효자인 나는 그저 아무생각없이 자취방에서 굴러다니는 낙엽이 되어있었다.
어느날 자취방에서 열심히 디아블로를 때려잡고 있던 나에게 친구가 98학번 신입생 대면식(OT전에 자체적으로 하는 환영회)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1학년때 선배들에게 하도 밥을 얻어먹었던지라, 이제 내가 밥을 사야된다는 생각에 신입생이 썩 반갑지는 않았지만,
혹시 예쁜후배와의 썸이라는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애가 있을까 싶어서 친구를 따라서 학교로 갔다.
한무리의 선배들과 합류해서 신입생 환영회를 하는 강의실로 들어가자, 학생회장 누나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었고,
우리는 모두 그 인사를 씹으면서 여자애들이 모여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아... 화사하다. 비록 가장자리에 신입생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대학에서 1년이상 숙성된 거무튀튀한 이상한 생명체들이 몇명 껴있긴 했지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풋풋한 신입생들을 보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그때 내 친구가 나를 툭툭치면서 말했다.
"야 쟤 교복입고 왔어. 이쁘게 생겼다. 그지?"
친구가 가리킨 곳에는 어리버리한 표정으로 아니 도대체 왜 나만 교복을 입고왔지? 하는 의문문을 입이 아닌 눈으로 뱉어내고 있는 여자애가 있었다.
양갈래로 머리를 땋은 그 아이는 확실히 하얗고 예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눈길이 닿은 곳은 그 갈래마리 옆에 앉아
넌 도대체 무슨 병신이길래 여기 교복을 입고왔냐? 하는 의문문을 입으로 내뱉고 있는 숏커트의 여자아이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 아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쌍커풀이 없는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해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난 이상하게도 그아이의 커트머리 사이로 드러난 그 뒷목을 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그때 알았다. 아 나한테 숏커트 페티쉬가 있었구나.....
그리고 그때 난 초등학교때 독일 베이커리 아들인 윤철이에게 가버린 내 첫사랑을 잊은 이후 두번째 사랑에 빠져버렸다.
사실 우리학과가 남녀비율이 딱 5:5라서 나름 상당히 재미있는 학과였지만,
그당시 1년동안 같이 술집에서 토하고, 구르던 여자동기들과 남자동기들은
어느새 수요일 오후 전투축구를 함께한 소대원들같은 끈끈한 전우애를 가지고 있었고,
학과내에서 사귀고있는 CC를 보는 우리 눈빛은 호모포비아의 눈빛과 다를 바 없었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 모두가 내가 1학년때 여자애들에게 장난만 쳐대는 상 또라이가 아니었나 오해를 하겠지만,
나름 대학교 1학년때 나에게도 연애의 징조가 아예 없었던건 아니었다.
나름 썸을 타던 여자애도 있었고, 호감이 있던 동기도 있었으며, 왠지 나에게만 잘해주는 듯한 선배누나도 있었다.
그러나 태생이 모태솔로인 나는 그 모든 기회를 걷어차 버리고 동기 여자애들과의 전우애를 택했다.
썸을 타던 여자애의 생일 날 폭탄주를 만들던 동기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그녀의 잔에 신고 있던 양말을 집어넣었고,
호감이 있던 동기의 옆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다가 그녀의 가방안에 그날의 안주를 약간 소화시켜 담아주기도 했으며,
나에게 잘해주던 선배누나가 나에게 사준 시집은 자취방에서 라면냄비의 받침으로 잘 사용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상또라이가 맞는 것 같다. ;;)
그랬다. 나는 남녀관계에는 영 젬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때려죽인 잡놈이었지만,
그렇게 연애의 기회들을 모조리 걷어차면서도 나는 여자친구가 생기길 아주 조금 바랬던 것 같았다.
신입생환영회때 보았던 그 애의 이름은 H라고 했다. 성은 평범했지만, 이름은 특이했다.
신입생주제에 성격도 좋아서 처음부터 나에게 선배가 아니라 오빠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녀는 활달했고, 빛나보였다.
신입생 환영회가 끝나고, 술자리를 가지고, 몇명이 화장실을 사용불능으로 만들고, 단골 호프집 사장님의 쌍욕을 몇번 듣고,
놀라는 신입생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범하게 웃던 과대표가 머리채를 잡고 끌려나갔다.
즐겁고, 당황스러웠던 술자리가 끝나고 나는 술에 얼큰히 취한채로 자취방에 누웠지만,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옆에서 할리데이비슨의 엔진소리를 코로 내고있는 친구 때문도 아니었고,
17세기 마녀의 항아리에서 날법한 약초냄새를 발에서 풍겨대는 친구 때문도 아니었다.
가끔 잠꼬대로 멘드레이크의 비명소리를 내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런건 매일같이 격던 일이라 내 숙면을 방해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나는 오로지 그녀의 뒷목덜미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후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을때까지 나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법이라지만,
그정도 시간으로 멀어지기엔 내 상사병이 조금 심각했던 듯 싶다.
삐삐번호라도 받아놓을걸... 하는 후회를 하고있던 중 드디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이 다가왔다. 우리는 청량리에서 모이기로 했었다.
나는 1년 365일 24시간 등댈곳만 너무 차지 않다면 어디서든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잠꾸러기였고,
심지어 고등학교때 1교시부터 자기 시작해서 야자시간에 깬적도 있을 정도였지만, 그날은 아침부터 정렬맨같은 칼기상을 했고,
새벽 6시부터 일어나서 씻고 옷을 입고 오티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미친1놈아 청량리에서 12시에 보기로 했어. 도대체 왜 새벽부터 지랄이냐."
"친구야 난 지금 어머니 뱃속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포근해 제발 내 태동을 방해하지 말아줄래?"
"아오 미친1놈아!! 새벽부터 왜 샤워를 하고 이지랄이야. 너때문에 나이아가라에서 떨어지는 꿈 꿨잖아."
"아 제발 내가 돈줄께 목욕탕으로 좀 꺼져주라."
새벽 6시부터 좁디좁은 옥탑방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있는 날 보면서 왜인지 모르게 자취방에서 자고있던 친구들은 정감가는 쌍욕들을 시전했다.
그러나 쌍욕들을 뒤로 한 채 여전히 기분좋은 콧노래를 부르는 것를 보며,
친구들은 이미 나를 정신병원으로 보내는 데에는 빠르게 합의하고, 누가 팔과 다리를 잡을 것인지를 의논하고 있었다.
다행히 나는 정신병원 대신 청량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친구들이 그때까지도 내 다리를 붙잡을 사람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학번 과대표가 둘둘말은 학과 깃발을 어깨에 걸치고 하품을 하고 있었고,
오로지 술로만 이루어진 오티 준비물들을 학생회장 누나가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H가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짧은 머리에 검정티를 입고 베이지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어느새 친해졌는지 환영회때 교복을 입고 왔던 K가 있었다. 안면이 있어서 인지 둘은 날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행복했다. 왜 행복한지 이유도 몰랐다.
기차를 타고 강촌까지 가는 길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를 보는 순간 느낀 행복감 때문에 나는 그냥 게속 그녀를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어차피 우리는 기차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하진 않는다.
거의 매일 같이 술에 쩌든 생활을 하는 대학교 초년생들은 대부분이 잠에 골아떨어져 있거나,
자고있지 않는 아이들은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과대표는 오티때 먹을 술을 다처먹는다면서 쌍욕을 시전하고 있었다.
그다지 낭만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지만, 그 기차여행은 정말 낭만적이었다.
강촌에 도착해서 우리는 민박집까지 걸어갔고, 집을 풀고,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했다.
선배들이 소개를 하고, 후배들이 소개를 하고, 학생회장 누나가 준비한 더럽게 재미없는 몇가지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과대표가 준비한 더럽지만 재미있는 게임을 하고나자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지금은 없어진 풍습이겠지만 그때는 사발식이라는 게 있었다. 나또한 신입생때 별거 아니네 하고 레몬소주 한사발을 들이키고는
민박집 옥상에서 다음날 아침까지 숙면을 취했던 기억이 있다.(다행히 입은 안돌아갔다.)
신입생들을 위해서 선배들은 소주와 사이다와 레몬소주 가루를 다라이에 열심히 섞고 있었고,
신입생들은 이 비현실적이고 야만적인 레몬소주 다라이를 보면서 군침을.... 아니 근심을 하고 있었다.
"00대학교 00학과 98학번!! 000입니다!!!"
오티에 참가한 신입생들이 한명씩 나와서 큰 소리로 자기소개를 하고, 레몬소주를 한사발씩 들이켰다.
물론 술을 못마시는 학생들을 위해서 가끔 선배들이 대신 마셔주기도 했다. 아, 물론 여학우들 대상이었다.
남자애들은 저 시커먼 남자선배들이 자기 흑기사를 해주지 않을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죽을 각오를 하고 레몬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어느새 K의 차례가 왔다. H는 그 뒤에 있었다. K가 꽤 이목을 끌었던지 남자선배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뒤에 서있는 H를 정신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소리조각 선배님이 마셔주시면..."
뭐지? 내이름이 들린 것 같은데?
그 아이를 쳐다보느라 잠시 정신을 잃고 있던 사이에 흑기사를 해주기 위해 우르르 몰려들었던 남자선배들중 K가 날 지목한 것이었다.
난 뭔가 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갸우둥한 뒤 흑기사를 거절하고 K에게 레몬소주를 두사발을 먹이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안마시면 더블샷......"
그리고 그때 나는 무협지에 나오는 그 현상을 피부로 느껴야했다. 수십명의 동기들이 살기를 내뿜으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같은 오징어가 감히 저렇게 풋풋한 신입생의 부탁을 거절하는 케이스는 절대적으로 0에 수렴하는 확율로만 존재해야 하는 터였다.
"아니.. 내가... 그게..."
난 당황했다. 이건 내가 생각한 스토리가 아니었다.
H가 흑기사를 부른다. -> 내가 손을 들고 나간다. -> 한번에 원샷을 하고 그녀의 간을 지킨다. -> 훗 목이 말랐는데 잘됬군. 꼬마아가씨. -> 뭐 대충 이런 스토리?
그런 내 시나리오가 송두리채 무너지고 있었다. 매일같이 술독에 빠져 살았지만 그다지 쎄다고 보기힘든 내 주량을 볼때
레몬소주 한사발이면 이미 나는 학교앞 파전집에서 파는 사이즈의 해물파전을 하나정도는 연성해야 될 것이 분명했다.
그 한번의 기회를 여기다 쓰라고? 왜죠? 흑기사는 거절하면 두배로 마시는거 아닌가요? 도대체 왜 내가 이걸 마셔야 하는거죠?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술이들어간다. 죽죽죽죽~~"
그러나 나는 그 살기를 이겨내고 내 의지를관철시키기엔 너무 약했다. 힘이 약했다.
LAPD가 투팍을 연행하듯 나는 질질 끌려나가서 결국 레몬소주를 원샷했고, 멘탈이 붕괴된 채로 곧 다가올 욕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H의 차례가 되었다.
"00대학교 00학과 98학번!! H!!! 인사드립니다!!"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는 씩씩했고, 당당했다. 여자임에도 우렁차게 자기소개를 하고 그대로 과대가 주는 사발을 받아들었다.
그녀가 술을 처음 마셔본 건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선배들의 환호성 속에서 레몬소주 한사발을 원샷하고 머리에 터는 그녀의 모습에선 빛이 났다.
그녀의 짧은 머리는 기분좋다는 듯이 웃고있는 그녀의 얼굴을 따라서 찰랑거렸고,
또다시 내 눈에 들어온 그녀의 귓바퀴는 나에게 그녀를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즐거웠다.
젊은 날 무엇이던 즐겁지 않으랴만 그때의 나는 즐거웠고,
그녀는 아름다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