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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게시글은 1.무서운 이야기 (범죄와 유령)/2.흥미로운 이야기 (어두운 진실과 음모론) / 3.미스테리 이야기 (말 그대로 기괴한 사건들)
을 다룹니다.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27185
<미스테리 이야기 1화. 우랄산맥의 1959년>
러시아의 동부와 서부를 가르며 유럽부분과 아시아 부분을 갈라주는 산맥
우랄 산맥
1959년 1월 27일 소련의 우랄 주립기술대학 공학부의
탐험대장 이고르 댜틀러브(Igor Dyatlov)를 포함한 남자 8명 여자 2명으로 구성된 탐사대가 오로트렌 산을 오르기 위해 출발한다.
이들은 모두 베테랑들이였고 뛰어난 스키 실력또한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탐사대의 목적은 1월28일 베이스 캠프인 비즈하이에서 출발하여 우랄산맥을 거쳐 목표인 오로트렌 산을등정한후
2월 12일 다시 복귀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하루 전에 탐사대 일원인 유리 유딘(yuri yudin)이 쓰러졌고
결국 유리 유딘은 베이스캠프에 혼자 남게 되었고 9명이서 오로트렌 산을 등정하러 떠나게 되었다.
탐사대가 베이스캠프를 떠나고 계속 우랄 산맥에는 폭설이 내렸다.
걱정된 유리 유딘은 5일후 2월2일 밤에 무전기로 탐사대의 안부를 물어보기 위해 탐사대장 이고르와 연락을 시도했고
다행이 모두 잘 있다는 답을 들을수 있었다.
이고르는 특이 사항은 없으며 기상 악화로 잠시 이동 경로를 벗어나
콜랏 샤흘산에 임시 숙소를 차렸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유리 유딘은 다시 무전 연락을 시도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걱정이 되었지만 유리 유딘은 2월 12일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그리고 2월12일 탐사대가 예정대로 돌아오지 않자
유리 유딘은 탐사대의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가족들의 실종 신고로 실종 수사가 시작되었다.
첫번째 사진과 세번째 사진은 탐사대가 있었던 텐트인데 모두 갈기 갈기 찢기고 쓰러진걸 확일 할수있다.
두번째 사진은 탐사대가 버려두고 간 스키 장비다.
결국 20일날 구조대가 급파되어 마지막 연락이 연결된 샤흘산을 중심으로
수색을 시작하였지만 워낙 날씨가 좋지 않아 수색작업에 애를 먹었다.
결국 7일 후 임시 캠프를 발견했으나 임시캠프의 상태는 위 사진과 같이
처참했다.
형태는 마치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한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의문점이 발생한다.
구조대는 텐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5구의 시신을 찾았는데
옷도 모두 제대로 입지 않은 상태였고
하나같이 겁에 질린 모습이였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을 봤길래 장비들을 모조리 다 버려두고
도망치려 했던 것일까?
베테랑들인 만큼 장비가 없으면 저체온증으로 쉽게 죽는다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었을게 분명하다.
상황이 그만큼 긴박했다는것을 방증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의문점이 시신에서 또다시 나오게 된다.
처음에 발견된 5구 시신외에 2달후에 4구가 추가로 발견됬는데
이들의 시신은 끔찍하게 손상되어 있는 상태였다.
4명중 3명의 시신의 사인의 크나큰 물리적 충격이였는데
첫번째 사람은 머리가 으깨져있었고
두번째 사람은 가슴뼈가 완전히 으스러져 있었고
세번째 사람은 다른곳은 멀쩡한채 혀가 깔끔하게 완전히 제거되어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을 찾았던 곳 주위의 전나무가
새까맣게 타 재가 되있었는데
우랄 산맥은 영하 30도로서 불을 피우는게 불가능하다.
번개? 있을리가 없다.
저위의 사진이 시신이 발견된 장소이다.
이 9구의 시신의 공통점
1.피부들이 모두 오렌지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2.머리가 모두 새하얗게 변색되어 있었다.
3.그들이 입고 있던 옷에서 상당한 양의 방사능이 검출됬다.
탐사대가 이동한 경로의 사진.
이후 이 사건은 군사 기밀에 부쳐졌으며
3년간 이 샤흘산의 출입을 통제 시켰다.
이사건을 정리하면
1.산속에 9명 이외의 사람이 출입한 기록은 없다 (소련 당국은 출입을 통제 했다고 한다. 구조기능을 활성하기 위해)
2. 무언가에 쫒긴 표정을 하고 있었으며 5명은 저체온증으로 4명은 물리적 충격에 의해 죽었다.
그리고 4명중 2명이 받은 물리적 충격은 시속 60키로로 자동차에게 받은 충격과 동일하다고 한다.
3.텐트가 안에서 바깥으로 찢겨져 있었다.
4.피부가 오렌지 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5.옷과 머리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특히 텐트의 경우 방사능이 5~7배 정도 더 심했다고 한다)
이후....
언론도 뚜렷한 소련 정부의 강압적인 태도로 인해서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으며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감으로 인해서 기억속에서 점차 잊혀져갔다
그러던 8년 후인 1967년 탐사대 사건을 바탕으로 저널리스트인 유리 야로보이의 소설인
"Of the highest rank of complexity"를 펴내면서 다시 논란이 되기 시작했고 많은 주장이 생겨났다
<주장 정리>
1. 첫번째 주장
미국의 칼럼니스트인 마크 모르포드가 사건 당시 탐험대는 독초 때문에 환각 상태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캠프 주변엔 많은 독초가 존재했으며 그 독초들의 독이 눈으로 스며들었고 그것을 알지 못한
대원들이 그 눈을 취사용으로 사용하면서 모두 환각에 빠져 텐트밖에서 저체온증으로 사망해다는것이다.
하지만 당시 극심한 추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불을 피운 흔적이 존재했으며 나중에 발견된 대원들이
추위로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먼저 죽은 사람들의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독초로 인해 환각
상태라면 그런 이성적인 행동은 하지 못한다는 반론으로 주장은 무시당했다
2. 두번째 주장
탐사대의 사망 원인이 그 당시 콜랏 샤흘산의 토착민인 만시 원주민의 공격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만시인 (mansi) 옛이름 보굴인
한티만시 자지구에 거죽하는 민족으로 일부는 튜멘주와 러시아밖에 거주하며 만시어를 사용)
하지만 텐트 주변은 만시 원주인의 공격은 커녕 접근한 흔적조차 발견되자 않았으며 당시 검시관인
보리스 보즈라즈데니의 문서 기록에 따르면 교통사고의 충돌만큼 큰 물리적인 충격적을 받은걸로
기록되는데 만시 원주민의 공격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무시되었다
3. 세번째 주장
미국의 과학 분석가인 브라이언 더닝은 탐사대는 사망 원인은 눈사태라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눈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텐트를 안에서 찢고 도주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주장도 터무니없었다
산탐색의 전문가들 답게 텐트가 있던 지형은 완만한 지형으로 눈사태의 위험도 없었으며
눈사태가 발생했다면 그 위급한 상황에 불을 피웠는지 설명조차 할 수 없었어
그리고 실제 사고 당시에도 눈사태는 발생하지 않았기에 마찬가지 주장은 무시되어버렸다
그러던 와중!
그렇게 사람들에게 궁금증과 많은 논란을 계속 주는 중에
2008년 2월 12일에 탐사대의 유일한 생존자인 유리 유딘씨가 기자 회견을 열고 놀라운 사실을 공개했다
그건 탐사대의 죽음은 바로 군사 무기 때문이라는것이다
그 증거로 유리 유딘은 당시 수사를 맡았던 수사관의 기록 문서에 따르면
1959년 2월 2일 콜랏 샤흘산에서 소련 정부가 비밀리에 몇가지 군사 무시를 실험한 기록을 알게 되었으며
그 증거로 탐사대원의 피부가 오렌지 색으로 착색된 점과 그리고 의복에서 발견된 방사능 흔적 및
전나무가 불에 탄 흔적이라고 했다
유리 유딘은 이것을 증거로 러시아 정부에 재수사를 요청했지만
러시아 측에서는 유리 유딘의 모든 요청을 묵인해버렸다
9명의 추모 묘비.
그리고 이 사건 49주기 추모일이 열리던 날...
유리 유딘은 기자 회견에서 말했다.
만일 내가 신에게 질문할 기회가 단 한번이라도 주어진다면 그날밤 내 친구들에게 무슨일이 생긴것인지 묻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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