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무의식의 연결통로라고 들었던 것 같다.
" ...허억...헉...헉......... "
또다. 또 같은 꿈이다. 매일 반복되는 기분나쁜 꿈. 일주일 전부터 계속되고 있다.
스포츠 뉴스의 하이라이트 장면처럼 짧게 스쳐지나가지만 불쾌한 기분은 여운이 되어 하루종일 나를 내리누른다.
" ..으..으음.. 왜 그래... "
잠귀가 어두운 남자친구가 웬일로 잠에서 깨 나를 걱정했다.
" 나 때문에 잠 깼어? 미안해 오빠.. 다시 자. 나 물 좀 마시고 올게. "
침대에서 일어나 발을 딛고 일어나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 꿈 때문에 잠을 못 자서 그런가.. "
간간히 벽을 딛고 거실로 나와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냈다.
며칠 전에 바꾼 투 도어 냉장고를 보니 갑자기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오빠는 이 냉장고도 나를 위해서 선뜻 사 주었구나. 이제 더 잘해줘야지.
식탁 의자에 앉아 집 안 풍경을 천천히 둘렀다.
오빠 집은 언제봐도 넓다.
가끔은 누가 들어와 있어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에 오빠한테 너무 넓어서 무섭다는 행복한 투정도 부렸었다.
50인치 TV, 앤틱 스타일의 장식장과 쇼파, 콘솔... 모든 것이 내 스타일이다.
예전의 나는 만져볼 엄두도 나지 않는 고가의 것들이지만,
'부자' 애인을 차지한 내 능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니 점점 더 비싼 가구들이 눈에 들어와 오빠에게 조르게 된다.
오빠는 항상 ' 이제 마지막이야.. '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이런 비싼 물건들을 턱턱 사준다.
어디서 골랐는지 최고의 신랑감이다. 수명도 좀 짧으면 소원이 없을텐데.
..
하지만 이번에 냉장고를 살 때는 좀 달랐다.
정말로 화가 난 듯이 어금니를 깨물며 조용히 마지막이라고 말하곤,
그 후로 아직까지 화가 안 풀렸는지 자주 서재에 들어가 혼자 있으려 한다. 결국엔 나한테 질 거면서.
하루에 몇십번씩 전화할 정도로 날 사랑하면서 센 척 하긴. 바람이라도 필까봐 무서운가?
뭐 져 줄 수도 있지만 내가 잘못한 게 없지 않은가. 조금 있으면 이 집의 안주인이 되는데 그 정도는 사줘
야지.
이제 슬슬 프로포즈 할 때가 됐는데 언제 하려나. 결혼만 성공하면 정말 잘 해줘야지.
천애고아였던 내가 이런 완벽한 남자와 결혼하다니, 전생에 오랑캐를 무찔렀나보다.
아, 근데 정말 오빠를 어떻게 만나게 됐을까?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차 사고가 있었다. 오빠네 부모님과 함께 간 첫 여행이었다고 한다. 경기도 외곽지역의 한적한 도로였다.
사고로 오빠네 부모님은 즉사하셨고 나는 간신히 살아났지만 기억을 잃었다.
의사 선생님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일 거라고 했다. 가끔 충격이 너무 크면 그 사건 자체를 기억에서 지
운다고 했다.
근데 이상하게 나는 약 3개월간의 기억이 없다. 그 사이에 오빠를 만난 것 같은데....
feels like insomnia~ aaah~ feels like insomnia aaah~
뭐야. 벌써 아침이야? 내가 여기 몇 시간이나 앉아있던 거야. 아니... 잤나?
" ... 아 졸려..... 어? 선영아 너 설마 아까부터 거기 있었던 거야? 거기서 뭐해? "
저 놈의 의처증. 전화를 해도 문자를 해도 습관처럼 입에 다는 뭐하냐는 저 말.
" 나도 몰라.. 생각 좀 하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잠들었나봐. 아침 차려줄게. "
냉장고를 열어 호박과 감자, 그리고 양파를 조금 꺼냈다.
곁눈질로 바라본 오빠는 아직도 못 미더운지 내내 냉장고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은 후 오빠는 출근했고, 난 여느때처럼 거실에 앉아 티비를 켰지만 내 머릿속은 아직도 새벽에
한 생각들로 가득차 있었다.
기억해내려고 애써도 자꾸만 손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어슴푸레한 기억들.
고아원에서 겪은 잘못된 사춘기로 내 인생은 나락이었다. 발 붙이지 못하고 전전하다 도착한 곳은 인터넷
채팅.
그 곳에서 만난 초면의 사내들에게서 분출되는 더러운 씨앗들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친구라고는 같은 일을 하는 미현이 한 명 밖에 없는 내가 도대체 어떻게 오빠를 만났을까.
오빠는 인터넷 채팅에서 만났다고 했다. 나도 처음엔 그랬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내 돈줄이었지만 나는 채팅에서 만난 남자들을 증오했다. 침대에 섞여있으면서도 내 속에서는 ' 이 새끼
를 어떻게 죽일지 '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스폰해주겠다며 더럽게 굴던 어떤 회사의 사장,
부인이랑 이혼할테니 결혼하자던 대머리 아저씨.
쉴새없이 들어온 스폰요청에도 난 일관됐었다.
" 니 썩은 얼굴 다신 안 봐. "
그런 내가 '손님'과 사랑에 빠져? 말도 안 되는 소리. 게다가 결정적으로 오빠는 내가 인터넷으로 뭘 하고 다녔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제, 오빠가 내 과거를 알고 있는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멋진 남자가 내 과거를 알면 날 쓰레기처럼 버릴지도 모를테니.
' 오빠, 나랑 어떻게 만났어? '
' 아, 저번에도 얘기했잖아. 그냥 채팅하다 만났다니까. '
' 그럼.. 내가 오빠 만나기 전에도 뭐 하고 다녔는지 알겠네? '
당연한 소리였다. 오빠도 그런 식으로 만났을테니까.
' 미쳤냐? 채팅으로 만났는데 그 전까지 내가 어떻게 알아. 왜? 사람이라도 죽였냐? '
머리가 아팠다. 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나를 만나고 있는 거야. 대체 오빠는 어떻게 만났지?
그 때, 회오리치는 생각들로 켜 놓았던 티비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 우와! 제가 진짜 중세시대 기사였어요? 어쩐지 제가 꿈에서 자주 싸우더라구요! 테리우스처럼 말도 멋지게 타고.. 이것도 관계가 있는거죠? "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허여멀건한 사내가 침대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케이블채널에서 하는 유치한 최면술 코너였다.
" 예, 그것은 전생이라는 무의식의 부분이 꿈으로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에 기억되어 있던 장면을 데자뷰로 보는 것과 같죠.
꿈은 무의식과 의식을 이어주는 다리거든요. "
리모콘을 떨어트렸다. 반 쯤 감겨있던 내 눈이 커졌다. 꿈. 그래, 내 꿈이 잃어버린 기억과 연관이 있을거야.
오빠에게 꿈 얘기를 해봐야겠다.
딩동.
" 선영아, 나 왔어. "
땅거미가 지려는 기분 나쁜 하늘 뒤로 오빠가 보였다.
철컥
" 나 없는 동안 잘 있었어? 뭐하고 있었어? "
티비봤다 이자식아. 물어볼 게 그거밖에 없냐?
" 어서 와. 빨리왔네? 회사는 어때, 할만 해? "
오빠의 웃옷을 받으며 말했다. 3일 전부터 취직한 오빠는 일이 고된지 눈에 다크서클이 한가득이었다.
바짓단에 흙도 묻힌걸 보니 나한텐 사무직이라고 거짓말하고 막노동이라도 하나보다.
돈도 많으면서 뭐하러 막노동을 해? 몇 달 후면 태어날 아기한테 아빠노릇좀 하고 싶은가보네. 훗, 귀엽긴.
" 오빠, 나한테 숨기는 거 있구나? "
옷 갈아입는 오빠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웃었다.
" ....뭐, 뭐? 뭔소리하는거야!!! 지금 장난해?!!!!! 너 도대체 나 없는 동안 뭐하고 다녔길래 그딴 소릴 하는거야!!!!! "
오빠는 갈아입으려던 티를 바닥에 내리꽂으며 화를 냈다. 그런데... 표정이....... 눈치를 본다?
" 아, 그냥 해본 소리야~ 바짓단에 칠칠맞게 흙이나 묻히고 다녀서~ 화내지말구~ 밥차려줄게 배고프지? "
몸은 부엌에 있지만 온 신경은 온통 안방에 붙어있다. 사고가 난 지 6개월만에 극적으로 퇴원해 잠시 오빠 집에서 머무른다는게 동거가 돼 버렸다.
오빠 집에서 머무른 지 2개월 만에 아기가 생겨버렸고, 별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오빠도 암묵적으로 결혼하는 것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병원에서는 치료받느라, 오빠 집에선 신혼 기분 내느라 정신이 없어서 몰랐지만, 요즘 들어 오빠의 이상한 행동들이 거슬린다.
그러고 보니 아기를 가졌다는 소리에도 오빠는 이상했다. 일부러 냉장고를 산 후 얘기를 꺼냈었다.
' 오빠! 냉장고 너~무 좋다, 고마워~ 그런 의미에서 나도 선물 있는데~ '
' 뭔데? '
' 나 오빠 아기 가졌어~ 이제 4주 됐대. 그래서 아기에 대한 기념으로 일부러 냉장고 산거야. 오빠 이제 나 여왕처럼 모셔야 돼~ '
' ........ 이제 진짜 마지막이야... '
들릴듯 말듯 오빠가 중얼거렸었다. 이 때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몰랐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아기한테 하는 말이야, 냉장고에 하는 말이야....?
' ...뭐라구? '
' 아, 아니야. 아기 가진 거 진짜 축하해. '
.... 아기 가진 걸 축하한다고 하나? 보통 고맙다고 해야되는거 아냐? 아, 내가 너무 예민해졌나보다. 오빠랑 빨리 결혼해야하는데 의심이나 하고 있다니.
빨리 결혼해서 그 동안 열심히 짜 둔 대본대로 오빠를 천천히 죽여야 되는데 오빠가 눈치라도 채면 난 끝이야. 내 돈들이 다 날라간다고!
저녁 먹는 내내 오빠의 이상한 행동들이 하나하나 떠올라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되니 오빠의 젓가락질도, 후루룩 국을 마시는 행동도 이상하게 보여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오빠가 국을 그릇째 들고 마셨었나...?
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오빠는 서재에 들어가서 꼼짝도 안 하고 있다. 루이보스티를 따른 찻잔 두 개를 들고 방문을 열었다.
" ..들어오지마. 내가 나갈게. "
쇼파에 앉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입을 여는 순간까지도 오빠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천 번 고민했다.
" 오빠, 나 요즘 자꾸 이상한 꿈을 꿔. 일주일 째 똑같은 꿈인데 너무 기분나쁜 꿈이야. "
" 무슨 꿈인데. "
티비만 응시하던 오빠는 관심 없다는 듯 눈길조차 돌리지 않고 물었다.
" 그냥... 내가 어디에 주저 앉아서 울고 있어. 그러다 갑자기 장면이 바뀌면 내가 막 도망가고 있고 누가 뒤에서 쫓아와. 그러다가 깨. "
오빠가 나를 쳐다봤다. 찻물이 조금씩 파도를 만들며 넘쳤고 이내 오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 그게 다야? 다른 거 더 기억나는 건 없어? 뭐 어디서 본 거 같다던지.. "
" 한 번도 안 가본 데야... 그냥 그러다 깨. "
거짓말이다. 나는 어떤 도로에 있었다. 그리고 나를 쫓아오던 사람은... 오빠였다.
이게 내가 꿈과 잃어버린 기억이 연관되어 있을거락 생각한 진짜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말자. 이 남자를 완전히 믿을 수 없으니까.
오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꿈을 풀이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기도 했고, 딴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 너가 요즘 피곤해서 그런걸꺼야. 내일은 나 월차낼테니까 드라이브라도 갔다오자. 그게 좋겠다. "
오늘도 같은 꿈이었다. 그런데.. 주저 앉아 있는 내 앞에 꿈틀대는 뭔가가 보였다.
다음날, 점심을 먹고 느지막히 출발했다. 평일이라 막히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난 기다리는 게 죽기보다 싫다.오빠는 말 없이 차를 몰았다. 우리는 경기도의 끝자락으로 달리고 있었다.
오빠도 내 꿈에 대해서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꿈은 내가 잃어버린, 사고에 대한 기억이었다.
쫓아오던 사람이 오빠였다는 것은 이 남자를 믿어선 안된다는 얘기다.
어떤 시골길로 들어서면서부터 끊임없는 데자뷰에 머리가 깨질것 같았다.
사고 지점과 가까워질수록 내 기억도 하나 둘씩 돌아오고 있었다.
마침내 차가 정지한 어느 도로에서 내 기억은 완전히 복구되었다.
" 여기가 바로 너가 사고난 곳이야.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이라 그동안 안 데려왔었는데 혹시나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을까 해서 데려왔어. 뭐 기억나는 거 있어? "
차에서 내려 한 바퀴 빙 둘러보던 나에게 오빠가 물었다. 기억은 벌써 돌아와 있었다. 내 앞에서 꿈틀대던 꿈 속의 그것은 돌아가신 오빠의 부모님이었다.
쫓아오던 오빠는.... 기억났다고 얘기하면 내가 죽을 것 같았다.
" 아니.... 머리만 아프고 잘 모르겠어... "
" 아, 핸드폰을 차에 두고 왔네. 회사에서 전화한다고 했었는데... "
오빠가 계획적으로 두고 온 핸드폰을 찾으러 가는 척 하면서 차에 올라 탔다. 안돼! 또 날 같은 수법으로 죽이려고!!
" 선영아, 이제 차 타. 이런 곳에 데려와서 미안해. 혹시나 했는데 성과가 없네. 우리 요 앞산으로 산책이나 하러 가자. "
어? 날 죽이는 게 아니었어? 이상하다. 내 기억에서 오빠는 나를 차로 치어 죽이려고 했는데... 뭐지? 내 기억이 왜곡된 건가?
오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차를 몰고 바로 앞 작은 산으로 향했다. 난 혼란스러웠다.
날 죽이려고 이 곳에 데려온 게 아닌가?
아, 내가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서 살려두는 거구나. 역시 난 똑똑해. 이제 연기하는 일만 남았군. 집에 돌아가면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야겠다.
오후 늦게 출발한 탓에 벌써 선선한 저녁 바람이 불고 있었다.
" 이제 좀 있으면 어두워질텐데 산에 올라가도 돼? "
" 걱정하지마~ 이건 산도 아니야. 언덕 쯤 되려나? 나 옛날에 여기 살았었거든. 눈 감고도 올라갈 수 있어.
위에서 보는 야경이 얼마나 멋진데! 너 나한테 감사하게 될거라니까~ "
정말로 10분동안 천천히 걸어 올라가니 정상에 닿았다. 올라가는 내내 편안해지는 푸른 녹색과 맑은 공기가 나를 이완시켜 주었다.
게다가 정말로 정상에 서 보니 은은하게 켜진 가로등과 불빛들이 촛불 이벤트라도 하는 듯 아름답게 켜져 있었다.
" 와... 여기 정말 예쁘다... 근데 산을 올랐더니 좀 덥네, 오빠 좋아하는 차 가져왔는데 좀 마셔~ "
보온병에서 차갑게 식힌 차를 따라 오빠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오빠는 야경에 취한 듯 날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 진짜 아름답지? 어렸을 때부터 항상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여기에서 프로포즈해야지.. 하고 생각했었어. "
설마 오늘 프로포즈를? 생각보다 일이 빨리 풀리는데? 역시 기억 안 난다고 하길 잘했어. 세상은 내 뜻대로 돌아가는군.
그나저나 오빠한테 이런 낭만적인 모습이 있었다니. 이 남자 볼수록 괜찮은데?
" 나 사실 그 동안 회사 다닌 거 아니야. 줄곧 이 곳에 왔었어. 장소를 찾고 있었거든. 그리고 어제 마음 먹었어. 여기에서 너한테 프로포즈해야겠다고. "
오빠는 다짐한 듯 숨을 살짝 들이쉰 후 이내 감았던 눈을 뜨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 너완 작년 이맘때쯤 만났어. 누가 옷깃이라도 스치면 따라가서 실컷 패주고 싶을 정도로 짜증나게 더운 날씨였지. 인터넷으로 만났다고는 말 했지?
하지만 말 안한게 있어. 우린 그냥 만난게 아니었어. 채팅에서 우린 거래를 했어. 난 너에게 애인 대행을 해주면 3억을 주겠다고 했지.
우리 부모님을 같이 죽이는 조건으로 말야. 솔직히 반 미친놈이 되기로 하고 말한거였어. 누가 아무것도 모르는 인터넷으로 만난 사람 말을 믿겠어?
근데 내가 운이 좋았는지 너처럼 멍청한 애가 걸린거야. 그때나 지금이나 돈이라면 환장하는. "
그래. 분명 난 그랬었다. 위험할 것 같다는 미현이의 말을 뿌리치고 3억에 눈이 멀어 이 사람을 만났었다. 난 지금 다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모르는 척 하자.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자.
" 우린 3개월동안 계획을 짰어.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 어떻게 죽이는 게 좋을까. 도구는? 사인은? 결국 결정한 곳이 사람이 거의 없는 그 도로였고,
차 사고로 위장하기로 했지. 뺑소니는 계획만 잘 세우면 절대로 잡히지 않으니까. 그리고 너를 부모님께 인사시켰어. 다행히 부모님께선 너를 좋아하셨지.
그리고 자연스레 여행을 가자며 그 도로로 간거야. 날이 어둑어둑해지던 시간에 맞춰서. 나는 숙소를 알아보러 갈테니 부모님과 너는 여기 내려서 구경하고 있기로 했지.
너는 우리가 살짝 그어놓았던 X표시 위로 부모님을 모셔갔고, 그 때 내가 사고를 낸거야. 악셀레이터를 꾸욱 밟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유산이 다 내꺼라고 생각하니까 발 끝에 주체할 수 없는 힘이 생기더라고. "
오빠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이런 남자와 같이 살았다니, 난 그래도 약간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 근데 약간의 문제가 생겼어. 어머니가 숨이 붙어계셨던 거야. 도와달라는 듯이 너에게 손을 내밀었지. 넌 어떡하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어.
하지만 부모님은 전적으로 차 사고로 돌아가셔야 했기 때문에 우리가 인위적으로 사인을 만들 수 없었어. 섣불리 건드렸다가 증거라도 남으면 끝이니까.
완전히 숨이 끊어질때까지 기다려야 했지. 이 얘기를 듣자마자 넌 미간을 있는대로 찡그리더군. 기다리는 건 죽기보다 싫어하는 너니까.
꿈에서 너가 주저 앉아서 울고있었다고 했지? 넌 울고 있지 않았어. 대신 모든 짜증이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 주체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고 중얼거렸지.
' 빨리 죽어버려, 빨리 죽어버려. '
그 때 난 마지막 계획을 실행하려고 차에 올라탔어. 넌 몰랐겠지만 마지막 계획은 널 위한 거였거든. 네 년한테 3억이나 주기도 아까웠지만,
내 완전 범죄를 누군가 알고 있어서도 안되는 거니까. 아까보다 더 세게 악셀을 밟았지. "
역시 오빠는 날 죽이려고 했었다. 내 기억은 왜곡된 게 아니었다.
난 일부러 눈을 더 크고 동그랗게 만들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척해야 한다. 연기만 잘 하면 난 프로포즈를 받고 결혼할 수 있다.
" 내가 차 시동을 걸자 넌 벌떡 일어섰지. 차가 움직이자 넌 달리기 시작했어. 하지만 얼마 못 가 차에 치었지. 숨이 끊어지길 기다렸다 119를 불렀어.
그게 내 최대 실수였어. 맥박도, 숨도 알아차릴 수 없을정도로 약했던 너를 극적으로 119가 살려낸거야. 그래서 난 계획을 바꿨지. 병원에서 죽이자.
근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너가 기억을 잃었더라고. 하지만 내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어. 너가 갑자기 기억해낼지도 모르니까. "
그럼 나랑 같이 살았던 게 날 좋아해서가 아니고 감시하기 위해서 였단 말야? 습관처럼 말하던 뭐하냐는 말도?
이 개자식... 혼인 신고만 해봐라. 바로 그 날 죽여줄테다.
" 오빠... 프로포즈 한다더니 왜 그런 끔찍한 얘기만 하는거야.. 그런 건 다 지나간 과거잖아. 난 오빠 용서할 수 있어. "
오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어깨를 살짝 쥐었다.
" 그래, 프로포즈 한다고 했지? 이제 말할게. 넌 기억 안 난다고 했지만 난 알아. 아까 내가 핸드폰을 가지러 차로 돌아갔을 때 차 안에서 네 눈과 마주쳤거든.
그건 너가 차에 치었을 때의 그 공포의 눈빛이었어. 넌 기억이 돌아왔어. 내가 널 죽이려고 했었다는 것까지도.
사실 그 도로에서 죽이려고 했지만 같은 곳에서 같은 사람이 또 뺑소니에 치인다는 건 웃기잖아? 날 바로 용의자로 몰 거라고. 그래서 널 바로 여기로 데려왔지.
여기도 그 도로만큼 꽤나 최적의 장소거든. "
오빠는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손으로 나를 밀었다. 난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그대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점점 작아지는 오빠는 처음보는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난 떨어지면서 생각했다.
" 아 씨발, 차부터 마시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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