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개념이 등장한 것이 근대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근대인권의 기준으로 칭기즈칸을 평가하는 것은 에러임.
제대로 된 역사평가라면 여기서 끝나고 말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 세계의 지식인들과 후대인들의 칭기즈칸 평가는 결코
승자이기 때문에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만은 아님.
일단 몽골인들은 이상하리만큼 정복전쟁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음.
그렇기 때문에 몽골인에 의한 피해상은 대부분 피해국의 기록에 의존하는 형태가 되기 쉬운데,
자....그럼 일단 여기에서 칭기즈칸에 대한 기록이 승자의 기록이라는 헛소리가 틀어지는 거지.
칭기즈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대개 군사전문가들의 평가임.
그들은 칭기스칸을‘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 ‘동서양 역사상 최우수 전략가’라고 생각하지.
천재적인 군사적 역량을 부정할 수 없는 것만은 사실이니까.
그럼 히틀러가 욕먹고 있는 데에 반해 칭기즈칸은 욕을 안 먹고 있느냐?
동시대 중국/러시아/중동/서유럽 사람들의 기록은 빠짐없이 칭기즈칸을 악마로 기록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디의 무슨 자료를 읽고서 칭기즈칸은 욕을 안 먹고 있다는지 링크 좀.....
역사가들이나 피해국 전문가들의 칭기스칸 평가는 냉정함.
특히 몽골지배를 받아 피해가 컸던 러시아나 이슬람권에서는 그들이 '잔인하다'고 묘사한 테무친의 실제 행동보다 더 잔인한 인물로 칭기스를 악평. 후대의 역사학자들도 테무친이 범한 문화의 파괴, 인간에 대한 학살·학대에 중점을 두어 관찰함.
유럽에서 뭐라고 했는지 볼까?
카톨릭권에서는 아예 대놓고 칭기즈칸을 '신이 시련을 주기 위해 보낸 악마'로 규정함.
그 대표 중의 하나가 교황 이노센트 4세의 사절로 유럽인 최초로 1245년 몽골을 방문한 이탈리아의 카르피니. 대부분의 여행기가 그렇듯이, 또한 몽골인에 대한 공포까지 가미 되어 구라를 풀어가며 몽골을 묘사했는데....카르피니는 테무친이 백성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치고 있고, 금나라 공격 때 식량이 떨어지자 살아있는 전우 10명 중 한 명을 잡아 살을 베어내어 배를 채웠다고 씀. 근데 이런 일은 칭기스칸의 철학이나 몽골의 군율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몽골의 대법전 <자사크>는 도둑질한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고 분명히 규정했다. 원나라 때에도 길에 떨어진 물건조차 아무도 줍지 않았다는 얘기는 유명하자나.
게다가 카르피니는 테무친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씀-_-;;;;; 중세 유럽애들은 도대체 왜 이렇냐?
중동은?
출처가 불명확하지만 중동측의 기록. <초자연적인 힘이 아니고서야 이런 대격변은 있을 수 없다. 명백히 인류의 종말이 다가오는 듯싶었다. 몽골인들은 파괴와 살육을 일삼았다. 이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들은 약탈한 것들을 싣고 떠났다>
몽골 군사사상 연구자인 일본인 고바야시(小林高四郞)는 “칭기스의 몽골군은 질풍처럼 기동하면서, 1222년 호라즘의 헤라트에서 시민 160만 여명을 살해했다.”고 썼다. 이것은 이슬람 사료를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근데 이게 아마도 뻥......당시 중동으로서는 한 도시에 100만 인구가 넘을 리가 없음.
일본의 칭기스·몽골 전문가인 사까이야 다이이찌(堺屋太一)는 최근 저서에서 “사마르칸트나 부하라에서 1백만 명의 시민이 학살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숫자는 과장일 것이다. 당시 사마르칸트 인구는 10수만 명, 부카라는 그 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중동 측에서 몽골인들의 학살을 과장까지 해가면서 떠들어댔다는 명백한 증거.
게다가 일칸국(=페르시아 지역)의 재상이었던 라시드 앗 딘이 쓴 <集史>라는 책이 있다. 이 집사의 징기스칸기가 소개하는 다음 일화는 징기스칸의 악마성을 말하는 데에 빠짐없이 인용되는 일화이다.
징기스칸이 4명의 아들들을 모아놓고 남자의 즐거움이란 무엇인지 물어보았지만, 누구도 만족스러운 대답이 없자
“남자의 즐거움이란 반란자를 진압하고 흉악한 적과 싸워 이겨서, 그들의 뿌리를 말려 없애고, 모든 재산을 압수하여 그들의 아내를 울고 눈물 나게 하고, 그들의 준마를 타고, 그들의 아름다운 후비를 잠옷과 베게로 삼으며, 후궁들의 장밋빛 볼과 달콤한 입술에 입 맞추는 것, 천하의 만백성들에게 영원한 태평성대를 누리게 해주는 것. 이것이 바로 남자들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이거야 말로 남의 불행에 기뻐하고, 성욕에 미쳐있으며 파괴와 살육을 일삼는 마왕 그 자체...
이런 기록이 몽골의 식민지 칸국의 재상이 쓴 책에 나온다는 거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칭기스칸을 철저히 부정하여, 위성국인 몽골에 대해 칭기스 박해정책을 강하게 폈음.
소비에트 정권은 칭기스칸에 대한 일체의 연구와 발표·토론을 원천적으로 금지.
1964년 4월 소련의 당 기관지 푸라우다(Pravda)는 칭기스를 ‘피에 굶주린 야만인’(bloodthirsty barbarian)이라고 쓰면서, 그런 ‘야만인 칭기스칸을 역사적인 진보적 인물로 단상에 앉혀 숭배하는 일’을 엄중히 금지했다.
중국은?
중국은 전통적으로 칭기스칸-오고타이-쿠유크-몽케 등 4대 대칸시대를 중국역사로 쳐주지 않았음. 그 50년간 금과 남송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쿠빌라이부터를 중국사로 쳐줌. 근데 요즘은 칭기스칸도 중국인물로 취급함. 지금의 소수민족이 점유하고 있는 내몽골·신강위구르·티베트와 서남지역을 중화의 권역으로 굳히려는 중국정부의 역사공정이지.....
고려는?
고려사의 기록. <이 해에 몽골 군사들은 남녀 20만 6천 800여 명을 잡아가고, 살육된 자는 이루 셀 수가 없다. 그들이 지나간 주군(州郡)은 다 잿더미가 됐다(是歲 蒙兵所虜男女 無慮二十萬六千八百餘人 殺戮者不可勝計 所經州郡皆爲盡)>.
이것은 1년 동안의 피해만을 다룬 것이고, 그 외 피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강화도로 도망간 병신들이 피해를 집계조차 못함.
미국은?
콜럼비아 대학 해럴드 램은 칭기스를 ‘악마적인 살인자’로 평가. <칭기스칸은 그때까지 알려졌던 세계의 절반을 정복했고, 그의 발길이 지나갔던 지역의 주민들은 수 세대에 걸쳐 공포에 떨었다. 그가 쓸고 지나간 도시들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강의 위치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사막에는 도망가는 사람들과 쓰러져 신음하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그가 지나간 곳에 남는 흔적이란 오직 늑대와 갈가마귀 뿐인 경우도 있었다.>
볼테르가 한 말도 있음. 칭기스칸의 중국정벌을 다룬 그의 희곡 '중국의 고아(The Orphan of China)'에 나오는 부분. “왕중의 왕인 사나운 칭기스칸, 그는 아시아의 비옥한 들판을 황무지로 만들었다. 그는 오만하게 왕들의 목을 짓밟은 파괴적인 압제자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기를 써오고 피를 흘리는 일을 해온 거친 스키타이의 병사(Scythian soldier)에 불과했다. 그는 천막·수례·들판에 사는 약탈의 거친 아들들일 뿐이다.”
자유주의자인 볼테르는 칭기스칸이 주변문명의 우월한 덕목에 원한을 품은 사람으로, 문명사회의 여자를 유린하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파괴하고자 한 야만인이라고 묘사.
결론 : 칭기즈칸의 잔혹한 파괴행각은 인권개념이 없던 당대에도 지옥의 군주, 악마, 신의 징벌 따위로 묘사됐음.
칭기즈칸이 욕을 안 먹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책 안 읽은 것 인증임.
그리고 현대인들이 실제 상황에서 히틀러만큼 징기스칸을 경계하지 않는 이유는
시대가 일단 600년이 넘게 흘러서 몽골인들에 의한 피해가 희석됐기 때문이 가장 크고,
징기스칸의 역사적 의미(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팽창)는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반면
히틀러의 잔영(자본주의의 비인간성, 과도한 민족주의, 타락한 법치주의)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
漢昭烈 將終 勅後主曰 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
유비가 유선에게 남긴 유언이다.
"선이 작다고 해서 아니 행하지 말 것이고,
 악이 작다고 해서 행하지 말 것이다"
댓글 분란 또는 분쟁 때문에 전체 댓글이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