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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38288
    작성자 : 숏다리코뿔소
    추천 : 48
    조회수 : 4754
    IP : 119.195.***.230
    댓글 : 2개
    등록시간 : 2012/10/31 11:59:39
    http://todayhumor.com/?panic_38288 모바일
    배경음) 인어 이야기

     

     

     


    눈을 감고 높은 곳에서 부터 떨어지면, 아주 검고, 아주 부드럽고, 아주 상냥한 물이 나를 감싸 안아 줄 것만 같았다.
    잠이 드는 것처럼 물 속 저 깊은 곳까지 가라 앉으면 감았던 눈을 떠야지. 그러면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던 할머니가
    나를 반기며 기다렸다는 듯 나를 끌어 안아 주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할머니가 내게 고개를 끄덕여주시면 할아버지에게
    전해 들었던 하얀 꽃을 찾아가야지. 대여섯 암초가 모여있는 못생긴 바위 위에 향기도 없이 달빛에서만 피는 꽃,

    햇빛에는 고개를 조아리는 꽃. 그 꽃을 찾아가야지. 그렇게 마음 먹었다. 다섯살이었다.

    "인어였단다."

    아주 오래전 내가 다섯살배기 였던 어느 화창한 여름날. 할머니에 대해 물었더니 할아버지께서 해주셨던 말씀이다.
    울퉁불퉁한 시골의 평상. 기둥위에 짜여진 가로세로의 나무가지에 얼킨 덩쿨의 그늘밑, 바로 앞에 있는 산의
    우거진 나무들이 바람을 쓸어다 젖은 풀냄새를 옮겨왔었다.

    나는 잠을 잘 것처럼 눈을 감았고, 할어버지는 내 이마빼기에 솔공송골한 땀을 지워주려고 살살 부채질을 하셨다.

    "인어가 뭔데?" 하고 물으니 할아버지는 나를 굽어보셨다.
    희끄무리한 수염이 인중에서도, 턱에서도 넓게 펼처지며 근사한 미소를 만들었다.

    "너, 바다는 가봤냐?"
    "엄마, 아빠랑."

    할아버지는 내가 본 바다가 얼마나 커다랬는지를 물었다. 내가 끝도 없이 물이 있었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땅을 다 합치더라도 바다의 크기의 반도 안된다고 말했다.
    그 바다 위를 한참동안 떠있다보면 육지가 보이지도 않는 곳이 많고 많다고 했다.

    그런 곳에 할머니는 계셨다고 했다.

    소금물에 젖은 머리가 햇볕을 받으면 갈색으로 반짝였다고 했다.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고 했다.

    노랫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으면 어느새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코앞에 다가와 더 작은 소리로 노래를 속삭여 줬다고 했다.

    할머니가 손을 내밀면,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고 했다.

    "인어는 사람을 물 속으로 끌고가서 잡아 먹는 단다."
    "허?! 그럼 할아버지는 어떻게 살았어?"

    할아버지는 빙긋 웃으시며 오른손을 들어 보여줬다. 할아버지는 검지가 없으셨다. 중지는 가운데 마디까지밖에 없었는데,
    그 끝이 둥글고 매끄러웠다. 내가 혹여 그 손가락을 만져보려고 하면 할아버지는 아프다며 엄살을 부리셨다.
    그래도 내가 만저보자 떼를 쓰면 할아버지는 그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내가 왜 손을 보여주는지를 묻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이건 할머니한테 준거야."
    "왜?"
    "할머니한테 이 것만 주고, 나머지는 아주 나중에 주기로 약속했단다."
    "그럼 할머니 배고팠겠네?"

    할아버지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내 고약한 말에도 그렇게 미소만 보였다.

    "아빠는 그럼 물속에서 낳았어?"
    "아니."
    "그럼?"
    "할머니는 할아버지랑 땅 위로 올라와서 살았지."
    "그럼, 할머니네 엄마랑 아빠는?"

    그 물음에는 할아버지가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때, 이미 할머니는 할아버지 곁에 계시지 않았다. 내가 할머니를 찾자,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할머니가 있는 곳을 떠올리듯 설명하셨다.

    이름도 없는 바위섬에 하얀꽃이 피는 서러운 바위 암초들이 살고있다고.
    할머니는 그 이름도 없는 바위섬에 이름 모를 하얀꽃을 찾아서 떠났다고.
    아버지가 태어나시던 날. 그렇게 말도 없이, 찾아서 떠났다고.

    인어들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머리를 말리러 수면 위로 올라와 바위에 걸터 앉는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아주, 아주 커다란 배를 타고 할머니를 만나러 가면, 할머니는 팔을 들어 인사를 해줬다고 했다.

    "인어는 물 속에서도 숨을 쉬어서 바다 저 깊은 곳에서도 자유롭게 헤엄을 친단다. 느이 할미는 한 번 바다로 들어가면 한참을
    그 안에서 있었어. 그러다 아주 잠깐 할아버지를 보려고 물 위로 올라오곤 했었지. 나는 할머니가 내려간 바다 위 그 자리에서
    꿈쩍을 안고 기다렸단다. 그러면 할머니는 물길을 알고 있는 것처럼 항상 내려갔었던 그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었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어였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건 내가 열두 살 때였다. 할아버지를 땅에 묻는 자리에서 아버지는 무릎을 꿀고 용서를 빌었다.
    땅에 머리를 빻는 아버지의 뒤에 할아버지의 연배로 보이는 많은 할아버지들이 해군복을 입고 거수경례를 했었다.
    그 머리칼들이 온통 하얗던 할아버지의 쩌렁쩌렁한 경례소리가 산을 다 매울 것처럼 우렁찼었다.

    내가 군입대를 앞두고 문득 생각이 들어 할아버지의 손에 대해서 물었을 때.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한 때 인쇄공장에서 일을 하셨던 분이라고 말씀하셨다.

    종이를 자르는 공장. 그 공장에 매일 새벽에 걸어서 출근을 하셨었더라고,
    아버지가 키가 지금처럼 다 자라서도 다니셨더라고,
    어머니가 아버지와 처음 만나셨을 때도 다니셨었더라고,
    어머니가 나를 낳아서도 다니셨더라고, 아주 오래 다니셨더라고.

    그렇게만 말씀하셨다.




    내가 아내와 만나 결혼을 하고, 처음 제주 신혼여행에서 해녀를 보았을 때.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소쿠리를 옆구리에 차고있는 그녀들은
    바다에 몸을 담구기 전까지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랫소리가 할아버지가 들었던 것이었는지 가늠을 해보았다.



    내가 다섯살 났던 그 시절, 내 손을 잡고 시골에 가던 나의 아버지 만큼, 나의 아들이 나이를 먹어서,
    그 아들놈이 다섯살난 아들을 가졌다. 나는 할아버지 보다 키가 더 컸지만, 할아버지에 비해서
    웃음이 볼품이 없었다. 수염을 길게 길러보았지만, 할아버지의 수염에 비교를 하자니 주눅이 들었다.

    지금의 내 나이가 몇 이었더라. 떠올리다, 손주 놈에게 인어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을 깜빡했는 걸 깨달았다.

    할애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넓은 바다로 찾아오라고 가르쳐줘야지.
    엄마, 아빠 손 꼭 붙잡고 찾아오라고 가르쳐줘야지.

    할애비는 할애비의 할애비, 할매 찾아서 바다로 간다고 가르쳐줘야지.
    그럼 내 할아버지 처럼 언젠가 훌쩍 떠나도, 이 녀석이 내 빈자리에 당황하지 않겠지.

    그 이름 모를 암초들이 어디에 살았는지 물어둘것을. 떼를 써서 물어볼 것을.
    냄새도 없는 하얀꽃들 어찌 찾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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