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비의 시대 (2)
연희 12년(249년) 정월, 위의 우장군 하후패가 투항했다. 하후패의 아버지는 하후연으로, 하후연이 촉한과 싸우다가 전사했기 때문에 우너수를 갚을 뜻을 갖고 있었고, 토촉호군이 되어 농서 지역에 주둔하면서 정서장군부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때의 정서장군은 하후현(하후상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조상이 사마의에게 주살되고 나서 사마의가 하후현을 불러 경사로 오게 하고, 옹주자사 곽회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게 했다. 하후패는 평소 곽회와 화합하지 못하여서 화가 반드시 자깅게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크게 두려워하며 촉한에 투항한 것이었다. 당시 하후패가 투항하자 촉한에서는 극진히 영접했는데, 특히 강유가 하후패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것 같다. 그는 하후패에게
"사마의가 이미 저들의 정권을 잡았으니, 당연히 다시 정벌할 뜻을 가졌겠지요?"
라고 질문했다. 이것은 사실 실제 그런 생각을 한건 아니었고, 자신이 북벌을 할 타이밍을 잡기 위한 질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만약 사마의가 정촉을 준비한다면 강유로써도 방어에 준비해야했다. 그러나 사마의가 정촉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강유는 북벌에 좀 더 힘을 쏟아부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하후패는
"저들은 자기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하기에 아직은 밖의 일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종사계(종회. 사계는 종회의 자.)라는 자가 있는데, 그 자는 비록 젊지만 만약에 조정의 정치를 관장한다면 오와 촉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강유에게 절이 주어졌다. 부절이 주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假維節, 즉 '오직 가절이 주어졌다'라고 해석해볼 수 있다. 아무튼 '부절'이라는 절은 없다. 절은 크게 세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가장 높은 것이 사지절, 그 다음이 지절, 그 다음이 가절이다. 사지절은 지방의 군사와 정사를 통솔하던 관리에게 준 것으로, 중급 이하의 관리를 참할 수 있는 권한이다. 촉한에서는 위연이 사지절을 받았었다. 지절은 관직이 없는 사람을 참할 수 있었고, 가절은 군령을 범한 자를 참할 수 있었다. 한편 월이란 군사책임자에게 국왕이 내리는 신표로써 도끼모양의 수기를 말한다. 아무튼 가절이 되었다는 것은 강유가 촉한의 핵심 장군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덧붙이자면, 절이 주어진 사람은 당시 강유뿐이 아니었다. 장익은 이미 절이 주어졌을 가능성이 있고, 종예 역시 249년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절이 주어졌다. 등지에게도 주어졌다.
(사진 맨 아래)
아무튼 절을 받은 강유는 가을, 다시 서평으로 출정했다. 그런데 지도를 보면 서평군은 한중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리 강유가 기동전을 선호했다 하더라도 위의 방어선을 뚫고 서평군까지 갔을리는 없다. 따라서 이 서평은 서평군이 아니라 한중과 량주가 맞닿아있는 특정 지역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후주전>에는 강유가 옹주를 공격했다는 기록은 있다. 서평군은 옹주 소속이므로 이 기록에 의하면 서평군을 공격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위로써는 불과 수천명에게 방어선이 뚫리고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올 때까지 보고만 있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서평군을 공격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이때 강유를 방어한 장군은 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 곽회와 분위장군 옹주자사 진태였다. 곽회가 정서장군이 되면서 진태가 옹주자사가 된 것이다.
강유는 국산에 의지하여 두 개의 성을 쌓고, 아문장 구안과 이흠 등을 보내 그 성을 지키도록 했으며, 또 강호의 이민족들을 병력으로 규합하여 공격해오자 곽회는 진태와 더불어 적을 제어할 방법을 상의했는데, 진태가 말했다.
"국성은 비록 견고하지만 촉나라에서 멀리 떨어져있고 길이 험난하므로 반드시 군량미 수송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강족은 강유를 두려워하여 부역을 징발하였으니, 반드시 그들에게 의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그들을 포위하여 빼앗는다면, 칼에 피를 대지 않고서도 그들의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들에게 구원병이 있다고 하더라도 산길이 험준하여 병사를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닐 것입니다."
곽회는 진태의 계책을 따라서 진태에게 토촉호군 서질과 남안 태수 등애 등을 인솔하고 병사를 나아가게 하여 그들을 포위하여 그 운송로와 성 밖의 물의 흐름을 끊도록 했다. 구안 등은 도전을 하였으나 위나라 군사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성안의 장수와 병사들은 곤궁하였고, 식량을 나누어 배급하고 눈을 모아서 시간을 끌었다. 강유는 구안과 이흠이 급박해지자 구원하러 와 우두산으로부터 나와 진태와 서로 대치했는데, 진태가 말했다.
"병법에서는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우두산을 끊으면 강유는 돌아갈 길이 없으므로 우리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각자 보루를 견고하게 하고 적과 싸우지 말도록 하며, 사자를 파견하여 곽회에게 진언하고 자신은 남쪽으로부터 백수를 건너 물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곽회로 하여금 우두산으로 달려가 적의 퇴로를 끊도록 하려고 했다. 이와 같이 하면 강유를 취할 수 있으며, 구안 등을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곽회는 그의 계책을 칭찬하고, 군사들을 인솔하여 백수로 진군하도록 했다. 후미가 끊길 염려를 한 강유는 군사를 이끌고 도주하였고, 구안 등은 고립되었는데도 원조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모두 투항했다. 강유의 249년 북벌은 변명의 여지없이 실패했다.
연희 13년(250년), 강유는 다시 서평으로 출병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아마도 무력시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비의 시절의 강유의 전략은 <강유전>에 잘 나와있다.
강유는 스스로 서쪽 지역의 풍속에 익숙하며, 겸하여 자기의 재능과 무력에 자부심을 가졌으므로 강족과 호족을 유인하여 자신의 오른쪽 날개로 삼으려고 하며, 농서를 위나라에서 끊어 지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항상 대규모로 출병하려고 하여 비의는 늘 그것을 제지하며, 그에게 준 병력은 만 명을 넘지 않았다."
떠도는 해석에 의하면 농산 서쪽이라고 되어있는데 隴以西 라고 나온다. 농산이라는 지명도 없거니와 농서, 즉 지금의 감숙성 일대, 삼국시대로 치면 량주 일대라고 보는것이 타당하다.
아무튼 강유는 제갈량의 북벌 전략을 대체적으로 잘 계승하고 있었다. 제갈량도 북벌을 할 떄에 1차 목표를 옹양주 겸병으로 하고 있었다. 비록 땅은 중원에 비하면 척박하지만 국력 신장을 위해서라면 이 두 주도 아쉬운 형편이었다. 또한 이민족들을 회유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고, 서역과 무역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의는 늘 강유를 제지하며 수천명만 줄 뿐이었다. 이러니 강유가 제대로 북벌을 수행했을리가 없다. 시각에 따라서는 '그럼 비의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북벌을 하면 되는데 왜 고집스럽게 249년, 250년에 연이어 위를 공격했느냐, 이것은 재정적 소모를 가져왔을 것이다'라고 비판할 수 있다. 필자 역시 강유의 북벌이 국정 악화를 가져왔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멸망을 초래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러나 촉한은 결코 안주해서는 성공할 수 없는 국가였다. 더군다나 강유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나와있으나, 자신의 본분에 고지식할 정도로 책임을 다한 인물이었다. 남들에게 뭐라 하지 않고 말없이 묵묵히 북벌을 추진했던게 아니었을까. 자신이 그리 나서면 남들도 본받아서 열심히 할거라고 말이다. 나중에 다시 소개하겠지만, 이것이 강유의 한계였다. 그리고 또한, 강유의 기대대로 촉한이 움직였던 것도 아니었다.
비의도 비의 나름대로 제갈량 사후 국력이 소모되고 있으니 최대한 재정에 부담이 안가는 쪽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따라서 비의의 시각도 옳은 것은 있었다. 하지만 강유를 늘 제지하던 비의는 진지에 대해서는 제지하지 않았다. 비의 생전의 진지는 그나마 국사를 잘 수행했기 때문이었을까. 진지는 246년부터 유선을 보좌했다. 비의는 253년에 죽었다. 그리고 진지는 258년에 죽었다. <진지전>에 의하면 진지가 처음에는 유선을 잘 보좌하고 소인배들을 멀리했다는 기록도 없다. '처음부터'라는 말도 없지만 소인배, 환관과 잘 사귀었다는 말만 나온다. 비의가 7년간 그 사실을 몰랐을까. 개인적으로 비의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강유의 북벌은 늘 제지했으면서 진지의 횡행에 대해서는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253년, 비의는 곽수에게 암살당했다.
[출처] 강유의 북벌 (7) (삼국지 도원결의) |작성자 포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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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을 작성하고 집에 돌아가 <자치통감>을 확인해보니 누락된 부분이 있어서 올립니다. 마찬가지의 내용이 <등애전>에 있어서 원문을 올려봅니다.
가평 원년(249)에 등애는 정서장군 곽회와 함께 촉나라의 편장군 강유를 막아냈다. 강유가 물러나자, 곽회는 그 기회를 틈타 다시 서쪽으로 강인을 공격하려는데, 등애가 말했다.
"적군은 아직 멀리까지 가지 못했으므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응당 병사들을 나누어 의외의 일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마선왕은 등애를 남겨 백수 북쪽에 주둔하도록 했다. 3일 후, 강유는 요화를 파견하여 백수 남쪽으로부터 등애를 향하여 진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등애가 장수들에게 말했다.
"강유는 지금 갑자기 돌아왔고, 우리는 병사가 적소. 병법에 의하면 적은 당연히 물을 건너야 하지만 다리를 만들 수는 없소. 이것은 강유가 요화를 보내어 우리를 견제하여 돌아갈 수 없게 하는 것이오. 강유는 반드시 동쪽으로부터 조성을 습격할 것이오."
조성은 백수 북쪽에 있었으므로 등애와는 60리 떨어져 있었다. 등애는 밤에 몰래 군사를 움직여 곧장 조성에 이르렀다. 강유는 과연 물을 건넜지만 등애가 먼저 도착하여 조성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
등애가 언제부터 강유를 막기 시작했는데 궁금해하신 분이 계신데, 249년부터 막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는 강유를 편장군이라 지칭하고 있는데, 그가 이끈 군이 수천에 불과한 편군이었기에 그런 식으로 인식이 된게 아닌가 합니다.
또한 사마선왕(사마의)가 등애를 백수 북쪽에 주둔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실제 사마의는 이때 낙양에 있었고, 등애에게 주둔하도록 한 것은 곽회입니다.
또한 언급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특이하게 위는 대촉한전선에 토촉호군 혹은 정촉호군 혹은 정촉장군을 신설해서 대비토록 합니다. 이것은 대오전선과는 다른 특이한 부분으로, 위에서는 그만큼 촉한의 북벌을 경계했다는 것이 됩니다.
제갈량의 북벌에는 대장군 사마의가 직접 견벽거수 전략으로 대응하는 등, 위에서는 상당한 노력을 들여 방어합니다. 하지만 강유의 북벌에서는 토촉호군 서질이 곽회, 진태의 휘하에서 싸웠기에 그만큼 강유의 존재감이 낮은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촉호군, 토촉호군, 정촉장군에 대해 찾아봤습니다.
처음으로 신설된 것은 유비와 조조의 한중공방전 당시로써, 이때는 조진이 정촉호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위진, 조엄이 조예 시절, 조방 시절에 각각 정촉장군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제갈량을 막은 사람은 정촉호군 대릉, 진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강유의 북벌에도 토촉호군 서질이 막습니다. 중간에 하후패 역시 정촉호군이었습니다.
즉, 대촉한전선의 임시직은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의 경중에 따라 직급이 높아지거나 낮아진 것은 아니었고, 정촉장군은 낙양 지휘부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호군은 직접적으로 촉한군과 교전을 한것으로 보입니다.
[출처] 강유의 북벌 (7) (삼국지 도원결의) |작성자 포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