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GM 플린트 '공장점거파업' 승리의 역사
1. 1936년 미국 GM 플린트 '공장점거파업'의 전개
1936년 12월 28일-1937년 2월 11일 사이에 이루어졌던 전설적인 GM 플린트공장 점거투쟁은 1930년 다른 어떤 파업보다도 더 극적으로 형세를 역전시켰다. 플린트공장에서 노동자들은 미국의 역사에 전례 없는 ‘공장 점거투쟁’이라는 전술을 채택하여 자본가계급을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Linder, 1965). 플린트공장 점거투쟁 동안, 15만여 명의 GM 노동자들 가운데 14만여 명이 점거농성을 하거나 파업에 참가했다. 파업의 중요성은 이미 자동차공장을 넘어섰다. 미국의 모든 국민들은 플린트공장 자동차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지도부, 경찰, 사측이 고용한 폭력배, 그리고 심지어 루즈벨트에 이르기까지 여러 당면한 문제들에 직면해서 대항하고, 행동하고, 결국에 가서 승리하는 것을 예의 주시했다(Smith, 2006).
플린트공장은 GM왕국의 중심지였다. GM은 1936년 플린트공장에 47,000여 명을 고용했다. 플린트공장 내의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 조합원은 10월의 150여 명에서 그해 12월 말에는 4,500여 명이 되었다. 미국자동차노동조합 지도자들은 1937년 1월에 미시간 뉴딜 주지사인 프랭크 머피(Frank Murphy)가 취임할 때까지 파업을 연기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역행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12월 27일 점거농성은 클리블랜드에서 시작되었고, 그 다음날에는 플린트에 있는 피셔바디(Fisher Body), 시보레공장(Chevrolet plants)으로 확산되었다. 불과 일주일도 안 되어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이 앤더슨, 인디아나, 노우드, 오하이오, 자네스빌, 위스콘신, 디트로이트로 확산되었다(Smith, 2006).
GM 관리자들은, 그들 자신들은 와그너법 (Wager Act)을 준수하지 않으면서도, 점거농성이 불법이라고 선언하면서 대응했다. 생산이 감소하자 GM은 파업노동자들을 쫓아내기 위한 명령을 얻기 위해 법원에 의지했다. GM은 재판관으로 하여금 법을 들먹이면서 노동자들에게 공장 밖으로 나갈 것을 종용하도록 했으며, 회사에 충성하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플린트동맹’을 만들어 파업파괴팀을 구성했고, 공장 점거파업 노동자들에 대해 자경단을 구성했다. GM은 1937년 1월 2일 법원의 금지명령을 획득 했고, 공장 내부에 남아 있던 동맹파업자들 및 데모에 동참하여 파업진압자들에게 항의하는 동맹파업자들을 구속했다. 그러나 보안관이 점거농성 동맹파업자들에게 법원의 금지명령을 소리내어 읽자, 그들은 그에게 “공장 밖으로 나가라”라면서 비웃었다(Smith, 2006). GM은 계속해서 파업노동자들이 공장을 비우지 않으면 노동조합과 협상하지 않겠다고 윽박질렀다(Linder, 1965). 사장인 알프레드 슬로안(Alfred P.Sloan)은 동맹파업자들에게 GM은 “어떠한 노동조합도 그들의 노동자들을 위한 단독의 단체교섭 대상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월 11일 경찰이 피셔 차체2공장 (Fisher Body No. 2)에 침입했으나, 노동자들은 용기, 조직, 단결력으로 경찰의 침입을 이겨 냈다. 관리자들은 이날 피셔 차체2공장의 난방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공장 경비원들은 공장 안으로의 모든 음식물 공급을 차단시켰다. 동맹파업자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은 공장문에서 근위대들과 맞부딪혀 곤봉, 최류탄, 폭동진압용 단총을 가진 경찰들과 전투를 벌여야 했다. 동맹파업자들은 문경첩이나 화재 진압용 호스 등으로 응답하였다. 동맹파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지자들 수천 명이 물결처럼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경찰들을 무력화시켰다. 노동조합원들은 후에 이 투쟁을 ‘불런전투’라고 불렀다(Smith, 2006). 이 투쟁에서 승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여성들이 보여준 투쟁력 때문이었다. 이 전투에서 두드러진 두각을 나타낸 여성활동가인 제노라 존슨(Genora Johnson)은 여성부대의 전위반인 여성응급구조대를 구성하여 활동했다. 여성 집단의 지도자들이 분대장이었는데, 그들은 전화와 차를 가지고, 응급상황을 해결하고, 작업현장으로 운송했다(Linder, 1! 965).
GM은 계속 미국자동차노조와의 협상을 거부했다. 사측이 2월 초 동맹파업자들에 대해서 두 번째 금지명령권을 확보하자, 주지사 머피까지 GM과 파업노동자들을 협상시키려고 했는데, 이 협상 테이블에는 오직 미국자동차노동조합만이 모습을 나타냈다. 현장의 파업노동자들은 협상 테이블에 참석하지도 않았으며, 이 협상에 만족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사측이 태도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지사 머피는 교착상태를 깨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겠다고 위협했으나, 현장 노동자들은 논의와 투표를 거친 후에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공장점거를 계속하겠다고 결정한다.
트레비스(Travis)와 플린트공장 현장 지도부는, 협상이 지속되는 15일 동안 GM 사측이 노동조합의 요구사항을 점점 덜 받아들이게 압력을 가하는 것을 보면서, GM 사측과의 협상을 깨지 않고 협상자체에만 의존한다면, GM이 다시 공격적으로 될 것임을 깨달았다. 트레비스는 공장점거를 통하여 파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협상이 이루어지기 전에 공장에서 철수하는 것은 퇴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와중에 파업지도부인 트레비스, 크라우스(Kraus), 로이 빅터(Roy Victor) 등이 ‘불법집회’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파업지도부가 체포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은 협상을 계속 유지하려고 했다(Linder, 1965). 현장노동자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노동조합에 대한 명백한 인정과 결정적인 승리 없이 휴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결국 현장노동자들은 GM이 미국자동차노동조합과 협상한 내용조차 어기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한 후, 공장철수를 거부하였다. 트레비스는 즉각 노동자들에게 공장을 철수하지 말자고 요청했고, 노동자들은 함성을 지르면 기뻐했다. 밖에 있던 5,000여 명의 군중들도 환호성을 울렸다(Linder, 1965). 1934! 년 톨레도공장의 1천여 명의 노동활동가들, 아크론 고무노동자들, 피츠버그 광부들을 포함한 연대파업 참가자들이 피셔 차체1공장 (Fisher body no1) 주위에 집결해서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였다.
GM은 다시 동맹파업자들이 있는 공장 내에 난방을 차단했다. 이제 점거농성자들은 1월의 날씨에 공장 내의 수도시설이 모두 얼어붙도록 공장문을 다 열어제쳤다. GM 보험사는 손상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안할 것이다. 플린트시(市) 관료들은 ‘반(反)노조자경단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1월 20일 루이스는 루즈벨트에게 GM으로 하여금 협상에 잘 응하도록 힘써 달라는 요청했으나, 루즈벨트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회사측은 로즈벨트의 거절에 힘입어 ‘파업파괴 전략’을 선택하고, 파업을 파괴하기위한 자경단을 꾸렸다. 사측은 점점 더 공격적이 되었고, 노동조합은 점점 약화되어 새로운 반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파업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될 지경이었다(Smith, 2006).
이때 트레비스와 그의 파업동조자들이 일을 수행했다(Linder, 1965). 1월 29일 금요일 트레비스와 그의 파업동조자들이 난공불락의 시보레 제4공장 (Chevrolet Plant No. 4)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 훌륭한 성공적인 공장점거는 트레비스와 파업노동자들의 독창력과 영웅적인 행동에 의해 수행된 것이었다 (Linder, 1965). 공장 점거파업자들의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전술상의 책략은, 시보레 제4공장을 점거하면서, 파업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Smith, 2006).
플린트 점거농성 34일만에 노동자들은 다시 공격적이 되었다. 결국 GM은 2월 4일 공장을 비울 때까지는 협상에 응하지 않겠다던 태도를 바꾸어서 협상을 개시했다. AFL은 계속 배반을 했다. AFL은 GM 사측을지지, 파업을 ‘패배’로 규정하면서 공장을 가동시킬 것을 요구했다. AFL의 대표 윌리암 그린(William Green)은 루즈벨트로부터 CIO의 지지를 받고 있는 파업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GM에게는 미국자동차노동조합을 인정하지 말라고 요청했다(Linder, 1965).
항간에 주지사 머피가 공권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파업지도부는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고, 파업참가자들의 대부분은 ‘목숨을 건 투쟁 위원회 (Fight to the death commettee)’에 서명함으로써 투쟁의 결의를 보여주었고, 머피에게 통신문을 통해 그들이 계속 공장에 남아 투쟁하기로 결의했음을 알렸다(Linder, 1965).
공장 내부의 결의가 이러하였으므로 공장 외부에도 많은 지원군이 있었다. 트레비스는 최후의 결판을 위해서 많은 대중의 지지를 요청했다. 수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았고, 약 10,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노동자들을 향해 디트로이트에서 쏟아져 나왔다. 또한 2월 3일은 ‘여성의 날’이어서 수백 명의 여성들이 각지에서 쏟아져 나와 플린트공장으로 향했다. 마침내 총 5,000여 명으로 구성된 플린트 여성응급부대가 공장에 도달했다. 2월 9-10일 사이에 시보레 제4 공장의 전기와 난방이 모두 꺼진 상태에서 플린트공장을 둘러싸고 10,000여 명이 모여들었다. 공장 안에 있던 약 5,000명의 점거농성자들은 싸우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2월 11일 공장 점거농성 44일째 되는 날, GM이 드디어 항복했다. 그들의 공장과 장비들의 안전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1936년 2월 11일 퇴각한 것이다. GM은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과 협약을 맺고, 20개의 파업공장들과 여타의 모든 공장들에서 UAW를 협상 대상 노동조합으로 인정할 것을 승인했다. 1936년 2월 11일 UAW와 6개월 계약을 맺었고, 최소한 6개월 동안 다른 집단과 협상하지 않을 것임을 인정했다(Linder, 1965). 이 파업의 결과, 동맹파업 참가자들의, 노동자들의 조직할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법”을 불복종하려는 의지가 성공의 열쇠였음이 판명되었다. 이 시기에 점거파업 노동자들의 절반 이상이 노동조합 인정을 요구했고, 그들의 사업주에 의해 무시되어오던 와그너법에 의해 인정되었다(Smith, 2006).
2. 1936-37년 미국 GM 플린트공장 점거파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미국 GM 플린트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클리브랜드 공장 점거투쟁이 시작된 후, 이틀 후인 1936년 12월 30일 피셔 차체1공장에서 시작되었다. 30일 밤 야근을 시작하러 공장 안으로 들어가던 노동자들이 회사측이 철도차량을 뒤로 빼고, 물류를 빼돌리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것은 바로 GM관리자들이 몰래 공장을 옮기는 방식으로, 생산을 노동조합의 힘이 약한 곳으로 옮겨서 피셔 차체1공장을 파괴하려는 공개적인 시도였다. 트레비스는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이 사실을 보고 받고, 즉각적으로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200와트의 빨간 전등을 깜박여 노동자들의 중식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서 그는, “지금 사측이 공장을 이전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클리브랜드 노동자들도 그들의 일을 지키기 위해 파업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노동자들에게 질문했다. 곧바로 “공장을 점거하자! 까짓것 공장을 점거하자!”라는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UAW의 편집장이었던 헨리 크라우스(Henry Kraus)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노동자들은 출입구 앞에 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자연의 힘에 쇠사슬을 감으려는 시도 같았다. 그들은 뒤로 물러설 수 없었고, 전방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그들은 출입문을 깨고, 공장정문을 향해야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1/4마일 높이의 빌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Linder, 1965).
한 무리의 노동자들이 철도차량 부두로 달려갔다. 거기에서는 한 공장관리자가 차량 적재를 지시하고 있었다. “파업이다!”라고 노동자들이 기관차 엔진노동자에게 소리쳤다. “좋아”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제동수(制動手)로 하여금 작업을 멈추고 걸음을 멈추게 했다.
공장 내부의 노동자들은 즉각적으로 공격자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공장 안의 보안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작업을 덜 끝낸 뷰익(Buick) 차체들을 모아서 출입구에 쌓아 거대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다. 아세틸렌 토치램프를 가지고 노동자들은 모든 출입구 주위를 강철로 용접했다. 모든 창문에는 방탄용 천을 덧댔고, 그 천을 구부려서 소방용 호스의 주등이가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또한 그들은 최루가스의 공격을 막기 위해 젖은 천들을 준비했고, 금속 부품들을 전략적인 요새지마다 쌓아 바리케이트를 쳤으며, 침입자가 올 때를 대비하기 위해 스프레이용 페인트 총을 공장 전체에 배치했다. 관리자들이 작업으로 돌아가라고 호각을 불어댔지만,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갑자기 3층 문이 열리고 노동자들이 팔을 내밀고 외쳤다. “어이 밥, 그 여성들은 우리 편이야!” 절단가공 부서의 여성들이 노동조합 지도부에 보고되었다. 거의 3000명의 야간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이와 동시에, 작은 공장인 피셔 차체2공장에서도 공장 점거파업에 동참함에 따라, GM공장에서 차체의 생산이 멈추었다. 수천의 파업 선언문들이 미국 전역의 부품 제조업체나 조립공장으로 전달되었다. 1월 7일까지 10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1월 3일 무려 10개의 도시에서 300개의 전국노조회의가 열려서 플린트공장에서 공식적인 요구를 주장했는데, 그 요구들은 UAW의 인정, 노조활동으로 해고된 모든 노동자의 원직복직, 강제휴업 동안 근속수당 지급, 새로운 최저임금제, 주 30시간 5일 노동, 잔업시간 반으로 줄이기, 성과급제 폐지, 조립라인 작업속도 감소 등이었다(Linder, 1965).
3. 플린트공장 점거파업에서 시보레 공장 탈환시의 노동자들의 독창적ㆍ영웅적 투쟁
시보레4(Chevrolet 4)공장은 주간 7,000명, 야간 7,000명이 오후 3시 30분에 교대하는 사업장으로 총 1,4000명이 근무하는, GM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장이다. 이 공장을 점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왔었다. 이 공장의 감독관인 (나찌) 돌격대원 아놀드 렌즈(Arnold Lenz)는 밤낮으로 공장 내부를 순찰하였고, 노동조합이 점점 발전하자, 렌즈는 노동조합의 활동가들을 해고했다. 이러한 사건이 계속 발생하자, 트레비스는 순찰병을 불러 시보레4공장에 관한 몇 가지 질문들, 즉 부두의 형태, 접근 방법, 보트로 플린트강에서 공장까지 도착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렌즈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시켰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감독관 렌즈는 “트레비스가 웃기는 놈이군! 그는 시보레4공장을 점거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텐데......”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트레비스는 GM 관리자들이 시보레4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절대로 공장 점거파업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렌즈는 1월 29일 금요일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3-4명의 노동자를 해고했다. 트레비스는 일요일 밤에 시보레 노동조합원들을 소집했고, 약 1,500명이 모였다. 그는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폭력불량배의 공격에 대해서 설명하며, 노동조합이 해고노동자의 복직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의장에는 전폭적인 지지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눈을 똑바로 뜨고 보시오!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오.” 회의는 휴회되었으나, 약 150명의 대의원들과 조직부는 따로 남았다. 트레비스(Travis), 크라우스(Kraus), 로이 로이터(Roy Reuther)가 근처의 어두운 방으로 들어간 후, 촛불만 켠 상태에서 남은 노동자들을 한 사람씩 들어오라고 했다. 그들이 들어오자 3인 위원회는 가장 ‘믿을 만한’ 30명을 뽑아서 “지도자를 따르시오”라는 비밀지침을 포함한 종이와 함께 휴게실로 보냈다. 그 30명의 사람들은 다음날 오후 3시 20분에 시보레9공장에서 점거농성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보레 4ㆍ6 공장에 있던 노동자들은, 9공장을 도와주러 나가지 말고 그들의 작업장에 남아서 사! 태를 예의주시하라는 이야기와 함께, 9공장에서 어떤 공격적인 소리가 들려도, 9공장의 노동조합 조직력이 다른 곳보다 더 강하고 방어를 잘 할 것이므로, 안심하고 있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트레비스는 그러고 나서 9공장의 가장 믿음직한 두 명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옆으로 데리고 가 귓속말로 그들에게 6공장이 ‘진짜 표적 공장’이므로, 6공장이 점거될 때까지 오후 4시 10분까지 공장을 지키고 있으라고 말했다. 이 와중에 트레비스는 6공장과 4공장의 3명의 지도자, 즉 에드 크롱크(Ed Cronk), 하워드 포스터(Howard Foster), 커밋 존슨(Kermit Johnson)에게 9공장은 오직 ‘유인책’으로 활용될 것이니, 크롱크는 6공장의 노동자들을 4공장으로 집결시키고, 나머지 4공장의 두 사람에게는 공장문을 닫으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오직 6명―트레비스, 크라우스, 로이 로이터, 에드 크롱크, 하워드 포스터, 커밋 존슨―만이 4공장이 ‘실제 점거파업의 표적 공장’임을 알았다.
그러나 정작 4공장은 어떠한가? 로이터와 크라우스가 “만약 30명의 가장 신뢰 있는 사람들 중 몇몇이 9공장에서 점거농성이 있다는 계획을 말해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질문하자, 트레비스는 “바로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30명이 아침에 공장에 나올 것인데, 공장의 밀고체계를 타파하려면 이 방법, 즉 밀실에서 종이에 쓰인 비밀지침, 그리고 휴식시간 등과 같이 복잡하고 비밀스러운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30명 중 몇몇이 9공장에서 점거파업이 있을 예정이라는 소식을 렌즈에게 가지고 갈 때, 그 관리자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첫째, 극단적으로 비밀을 유지하려는 방법을 썼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렌즈를 비롯한 관리자들은 노동조합이 4공장을 점거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트레비스는 GM 스파이 체계가 관리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9공장은 표적공장이 될 것이고, 공장 순찰원들이 모두 9공장으로 간 사이에 노동자들이 4공장을 점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음날인 2월 1일 오후, 법원에서 GM의 금지명령 처분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을 때, 트레비스는 노동조합 강당에서 대중들에게 “법원으로 항의행진을 하러 갑시다”라고 제안했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모였고, 여성응급구조대는 총력을 다 하여 싸웠다. 노동조합 파수대에 의해 둘러싸인 노동조합 방송트럭이 시가지를 돌고 있는 가운데, 마침내 ‘이상한 제보’가 9공장과 6공장에 날아들었다. 노동조합 강당에서 5분 후에 도로시 크라우스(Dorothy Kraus)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한 장의 종이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트레비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법원까지 행진하려고 모인 대중들을 향해서 “9공장에 우리의 동지들이 얻어맞고 있으니, 우리가 바로 그리로 갑시다!” 하고 말했다. 노동자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 쪽지에는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군중들은 미친 듯이 계단으로 내려가 긴 줄로 늘어져 있는 자동차를 집어타고 몇 분도 채 안 걸려 9공장에 갔다. 일찍이 비밀정보를 캐들은 취재기자들이 벌써 9공장 앞에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그곳에는 문제가 있어 보였다. 결국 렌즈는 완전히 덫에 걸렸다. 시보레 공장 전체의 무력군대가 9공장 옆의 빌딩에 배치되었다. 오후 3시 20분에 밤근무 교대 노동자들이 “파업”이라고 큰 소리를 지르며 행진하자, “붉은 군대들,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소리 지르는 렌즈를 선두로 공장의 순찰대원들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한 여인의 남편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열려진 창문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는 큰 소리로 붉은 군대들에게 외쳤다. “저들이 노동자들을 숨 막히게 하고 있다! 노동자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자!” 여성들은 조직적으로 공장의 모든 창문을 깨기 시작했다. 여성들 중 한 명은 나중에 그때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만약 우리가 없었다면 투쟁은 더욱 거세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머리 위에 펄럭이는 깃발을 따라 행진했다. 관리자들의 가스총에서 나온 독가스가 우리 쪽으로 확산되었다. 우리가 독가스 공격을 받았지만, 그대로 직진했다. 우리는 공장 내부에서 독가스 공격을 받고 있는 우리의 동지들을 위해 창문을 깨야만 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남편들을 보호하려고 갔다.
오후 3시 30분경 호각이 불자 몸싸움이 치열해졌다. 폭력단원들의 곤봉과 가스총에 맞서서 남성 노동자들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마련했다. 오후 3시 45분경 4공장의 관리자가 4공장에 있는 모든 사측의 사람들을 9공장으로 끌고 갔기 때문에, 4공장에는 사측의 무력부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 마침 오후 4시 10분경, 두 명의 내부 지도자들인 테드 라 듀크(Ted La Duke)와 톰 클레시(Tom Klasey)는 “우리가 업무를 완수했다”고 외쳤다. 곧이어 크라우스(Kraus), 도우 켈러(Dow Kehler), 켈리 말론(Kelly Malone)이 컨베이어라인을 세웠다.
관리감독자들과 실권 없는 상사들에 의해 ‘해고’의 위협에 처해 있던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조직원들이 주변을 행진하면서 “파업이 시작되었다. 동참하라!”라는 외침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파업대오가 늘어나면서 그들은 점점 더 용기백배 해졌다. 실제로 관리자들의 폭력은 거의 자행되지 못했다. 파업참가자들은 수백 명이 되었다. 컨베이어 작동 열쇠가 있는 모든 곳에는 노동조합 조직원 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다른 노동자들도 정문을 지키고 망루를 보았다.
현장관리자들이 다시 정렬했고, 한 관리자는 수동적인 노동자들에게 공장을 재탈환하라고 촉구했다. 노동자들이 관리자들에게 “나가라”고 외쳤고, 관리자들은 감독사무실로 퇴각한 후 문을 걸어 잠궜다. 그러자, 크롱크(Cronk)와 노동자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그들에게 “5분 안에 나가시오”라고 소리쳤다. 관리자들이 지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전화를 하려고 하자, 크롱크는 벽에서 전화기와 줄을 잡아채었고 관리자들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거대한 공장이 마비되었다. 공장은 완전히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통제 하에 놓였다.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한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호소들이 쏟아졌다.
우리는 동지들이 우리와 같이 하기를 원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고, 곧 안정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노동조합을 갖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 많은 동지들이 지금 결정의 순간에 있습니다. 일부 동지들은 집에 갔습니다. 약 2000명이 남아 있고, 나머지 2000명은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다수는 단결의 의지를 표명하며, 거대한 곤돌라에 그들의 점심을 놓아두고 갔습니다. 그들 중 반 이상은 음식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후 4시 15분쯤 노동자들은 현장관리자들을 몰아내고, 공장에 바리케이트를 치기 시작했다. 9공장에 갔던 순찰대원들이 돌아와서 북동쪽의 문으로 들어오려고 했으나 노동자들이 그들을 막대기와 로커암으로 연결한 자체개발 딱총으로 위협하여 그들은 내보냈고, 다른 사람들은 물호스 등을 준비했다. 이때쯤 2공장에서 방송차가 돌아왔다. 여성응급부대는 마이크를 잡고, 9공장의 전장에서 돌아온 여성들을 맞이했다.
공장 내부의 노동자들은 공장문마다 바리케이트를 치느라 바빴다. 2월 1일 오후 4시 45분이 되자, 미국자동차노동조합-산업별노동조합회의 노동자들이 ‘전혀 함락당할 것 같지 않았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GM 공장의 가장 큰 규모를 가진 4공장에 요새를 구축했다. 사측의 경비대나 국가 군부대의 탈환 위험에 대비해서 여성들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트레비스에 의해 고안된 영리한 계획과 파업참가자들의 창의성과 영웅적인 태도가 수조 달러의 자동차공장에 중상을 입혔다.
어둠이 몰려오고, 조 사옌(Joe Sayen)은 군중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었 때문에 투쟁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원합니다. 우리는 자유, 생명,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합니다. 지금이 우리에게는 큰 기회입니다. 우리가 패배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죽임을 당한다면요. 우리의 생명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잃을 것은 단지 목숨 밖에 없고, 노예가 아닌 영웅으로 죽어갈 것입니다(Linder, 1965).
4. 플린트 공장 점거파업에서의 ‘해방구’ ―노동자들의 창의적이고 효과적인 조직과정
피셔 차체1공장 노동자들은 공장 내부에서 미국 전역에서 그때까지 전혀 본 적이 없었던 가장 효과적인 조직 작업을 수행했다. 공장 안전체계를 마련한 후 노동자들은 곧 집단회의에 들어가서 파업을 통치하기 위해서 현장대표위원회와 5개의 파업전략위원회를 구성했다. 버드 시몬스(Bud Simons)가 의장이 되었고, 월터 무어(Walter Moore)와 조 데이빗(Joe Devitt)이 지도자로 선출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11월 13일 최초의 공장 점거파업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노동자들이었다. 각 위원회들은 음식, 규찰, 정보, 위생, 건강, 안전, 인민재판, 오락, 교육, 체육 등을 조직했다. 모든 위원회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되었고 권위는 사라졌다. 최고결사대 1,200명만 공장 안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그들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밖으로 내보내졌다. 전체 공장에서 매일 두 번의 회의가 이루어졌고, 여기서 행정적인 처리를 수행했다(Linder, 1965).
파업위원회는 게시판에 모든 규칙들을 공고했다. 담배는 제한된 곳에서만 피우고, 술과 도박은 금지하고, 정보는 오직 공식적인 위원회를 통해서만 주고 받고, 개인끼리의 어떠한 전화도 하지 않는다. 모든 외부나 언론으로부터의 질문들은 서면으로 미리 받았으며, 단지 파업전략위원회에 의해서만 답변이 이루어졌다. 규찰위원회는 공장으로 들어가는 모든 입구를 지키고, 게시판에 모든 노동자들의 이름과 교대를 적었다. 이 위원회 안에 65명의 가장 믿음직한 노동자들이 특별순찰대를 구성해서 한 시간마다 35분 순회를 실시했고, 이를 24시간 동안 전체 파업기간 동안에 수행했다. 그들은 규칙이나 원칙들을 위반하는 사례들을 보고했고, 모든 소문들을 조사했다. 규율을 파괴한 사람들은 인민재판소에 보내져 가벼운 벌을 받거나, 3회 이상 반복할 때에는 공장 밖으로 추방됐다. 접견위원회의 승인 없이는 누구도 공장을 드나들 수 없었다.
공장 내부에서 모든 노동자는 하루에 6시간 동안 특별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들은 24시간 동안 3시간 업무, 9시간 휴식, 3시간 업무, 9시간 휴식을 하였다. 매일 오후 3시에는 전체 청소를 실시했으며,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청결하게 유지했다. 공장우체국이 세워져서 모든 메일은 미리 검열한 후에 전달이 되었으며, 노동자들의 가족이 면회를 왔을 때, 부인과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자녀들은 창문을 통해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요새는 너무나 확고해서, 노동자들은 오직 한번만 하루 동안 집에 다녀올 수 있었다. 공장 점거투쟁 동안 계급의식과 절대적인 현장 민주주의가 고조되었다.
파업노동자들의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는 가족들로부터 떨어져서 지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단조로움과 지루함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생활체조가 조직되고, 파업노동자들 사이에 오케스트라가 조직되었고, 매일 저녁 연주회가 열렸다. 각 집단은 라디오나 축음기를 가지고 있었다. 탁구, 체스, 카드 등이 공급되었고, 농구팀, 권투, 레슬링 팀이 조직되었다. 파업참가자들은 시도 쓰고, 노래를 지었으며, 가장 잘 된 것은 노조신문에 개재되었다. 그것들은 대개 GM 사측이나 관리자들을 풍자하는 것들이었다.
노동운동의 역사에 대한 노동자 교양강좌가 매일 열렸다. ‘살아 있는 신문’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파업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을 연출하였다. 드라마팀은 디트로이트 현대극장에 초대되어 연극을 상영했다. 찰리 채플린이 그의 영화, 모던 타임즈를 비롯한 여러 필름을 제공했다. 글쓰기팀은 미시간대학교 학생들의 지도를 받아 연극을 썼다. 여성부대가 파업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들은 공장 앞에서 전 국민을 대표하여 댄싱을 조직했고,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기도 했다.
여성들은 플린트공장 점거농성에서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약 350명의 파업자들의 아내들이 ‘플린트 여성응급구조대(Flint Women's Emergency Brigade)’을 구성했고 후에, ‘불런전투’에 참가했다. 여성응급구조대는 분계선을 따라 조직되었고, 동맹파업가의 아내인 제노라 존슨(Genora Johnson)과 개별분대들을 총괄하는 분대장들의 명령을 받았다. 전형적인 ‘여성 보조기관’과는 달리, 여성구조대는 여성 발언자들의 접수처, 피켓을 드는 여성들을 위한 탁아시설, 방어라인을 조직하여 순간적으로 경찰과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용기는 공장 내의 남성들과 똑같았다. 1월 20일 존슨은 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우리가 파업대오를 둘러싸고 띠를 형성할 것입니다. 만약 경찰이 총을 쏘려고 한다면 우리를 먼저 쏘아야 될 것입니다. 투쟁 속에서 새로운 여성들이 태어났습니다. 어제의 여성은 노동조합주의에 대해 공포에 떨었었다면, 단 하룻밤 지나고 나서 우리는 노동조합 투쟁의 파수꾼이 되었습니다(Smith, 2006).
공장 밖의 조직체계도 공장 내부의 노동자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동조합 지도부가 음식공급, 출판, 복지, 구제, 방어, 노조발전 등을 위해 중추적인 위원회의 역할을 했다(Linder, 1965).
노동자들의 환상적인 정신과 조직이 나라 전역에 널리 퍼졌다. 공장 점거투쟁은 나라 전체의 일이 되었다. 나라 전역의 사람들이 신문을 펴들고 “플린트공장 노동자들이 아직 잘 있는가”를 먼저 확인했다. 공장점거 파업자들은 이렇게 해서 공장 내부와 외부의 결합에 의해서 회사와 경찰병력에 대응하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세웠다(Linder, 1965).
5. 플린트공장 점거파업 승리의 결과
플린트공장의 승리는 전국적으로 계급투쟁에 영향을 미쳐서, 노동자계급의 신뢰를 한층 높였다. 노동운동사 연구가인 시드니 파인(Sidney Fine)은 “공장 점거투쟁의 극적이고, 성공적인 한 예를 보인 GM 투쟁의 전술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공장 점거투쟁은 모든 상상할 수 있는 형태의 방법을 포함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공장 점거투쟁은 또한 다른 투쟁의 활동무대였으며, 강력한 저항의 표현이었다.
1936년 플린트 공장 점거파업 승리의 결과는 그 이후에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파업의 물결에서 나타난다. 즉각적인 승리의 효과는 매우 컸다. AFL 대표 그린(Green)이 노동자들은 진정하라고 요구했지만, 파업과 점거파업의 물결은 미국 전역에서 일어났다. 디트로이트 자체에서만 해도, 그 뒤의 2주 동안 87건의 공장 점거파업이 발생했다. 4일 후에 GM 공장 밖으로 나와 행진을 했는데, 이때 UAW 조합원들은 20만여 명에 달했다. 또 10만여 명이 그 다음 수개월 사이에 추가적으로 가입했다. 2월 24일 플린트공장 점거농성이 끝난 지 채 2주도 안되어, 미국 전역에서 최소한 3만 명이 공장 점거농성을 했고, 디트로이트에서만 17개의 파업이 진행되었으며, 그 다음 14일간에도 새로은 공장점거파업이 진행되었다. 1937년 3-6월 사이에 GM 자동차공장에서만 170건의 공장 점거투쟁이 발생했다. 3월2일 미국 철강노조가 파업 없이 CIO 협약에 동의했다. 3월 2일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강철회사인 유에스스틸(US Steel)이 CIO 산하 철강노동자 조직위원회(Steel Workers Organising Committee)와 무파업 협약을 맺었다. 3월 3일까지 47개의 공장 점거파업이 있었다(Linder, 1965). 1937년 중반에는 거의 50만 명의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투쟁에 참여했다. 파업수는 1936-37년 사이에 2,172건에서 4,740건으로 증가했다(Smith 2006).
플린트공장의 승리는 CIO가 다른 대량생산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37년 9월에 CIO의 구성원은 3,718,000여 명으로 늘었다. CIO가 조직한 농성파업이 전국을 휩쓸었다. 4년이 지나지 않아, 4백만여 명의 노동자가 CIO로 조직되었다. 자신들의 공장도 점거되지 않을까 두려워 한 빅스틸(Big Steel)은, 노동자들이 투쟁도 하지 않았는데도 항복했다. 이 시기는 미국 노동운동의 절정기였다. CIO의 성공은 또한 AFL에도 혜택을 주어, 양 조직은 1930년대 파업의 물결이 이는 동안에 매우 주요하게 성장했다. AFL은 약 1백만 명의 새로운 회원을 모아 전체 약 360만 명이 되었다. AFL은 CIO의 분리를 유발시켰던 산업조직들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인 후, 계속해서 미숙련노동자들을 일반회원으로 기입시켰다(Smith, 2006). 플린트공장의 공장 점거파업은 무엇보다도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시기가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명동 카페마리의 현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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