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kind=&ask_time=&search_table_name=&table=history&no=2241&page=1&keyfield=&keyword=&mn=&nk=&ouscrap_keyword=&ouscrap_no=&s_no=2241&member_kind= >아르케부스와 16세기 전쟁구도의 급변화
와 해당글에 링크된 글들에게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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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케부스가 16세기의 전장에서 막강한 위력을 떨치긴 했지만 아르케부스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비가 오면 사격이 불가능하고, 장전시간이 길고, 유효사거리가 짧다는 점)등으로 인해 전장을 결정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은 아직 없었습니다.
특히나 적 부대가 돌격이 가능한 거리만큼 근접했을때 아르케부스는 당시 모든 원거리무기가 그러했지만 매우 취약했기 때문에 아르케부스 사수를 보호할 수 있는 근접병과가 필요했습니다. 16세기 초중엽에 등장한 테르시오 전술은 이러한 이유로 탄생합니다.
이탈리아 전쟁(1492~1559)당시, 스위스 장창병과 란츠크네히트 장창병의 교전을 묘사한 인쇄물 초기 테르시오에는 파이크외에 할버드나 양손검, 메이스등 온갖 잡다한 무기로 무장한 부대가 아르케부스 사수들을 엄호했습니다. 하지만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거의 모든 병사들이 파이크로 무장하고, 파이크병을 인솔하는 부사관이나 장교들은 할버드를 쥐는 형태로 정착하게 됩니다.
파이크는 고대부터 사용되어온 무기로 마케도니아의 사리사도 파이크류에 속하는 무기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파이크는 1314년 배녹번전투에서 수적으로 열세한 스코틀랜드군이 파이크 밀집전술을 이용해 수적으로도 더 많은 잉글랜드 기사들을 격파한 일로 유명한데, 당시의 파이크는 길이 5.5m 정도로 16~17세기에도 거의 동일한 형태의 파이크가 사용되었습니다.
파이크는 긴 길이때문에 개개인이 사용할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므로 밀집대형을 이루어서 전투를 벌였는데, 16세기 스위스 용병대가 사용했던 파이크 전술은 고대 그리스의 팔랑크스 전술과 매우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16~17세기의 전략가들은 고대시대의 팔랑크스 전술을 많이 참고했는데, 스코틀랜드의 전략가 제임스 터너 경은(Sir James Turner - 1615~1686) 1683년에 <고대 그리스,로마와 현대의 전법에 대한 군사적 논평 -Military essayes of the ancient Grecian, Roman, and Modern Art of War> 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합니다.
17세기 영국 파이크 병의 훈련교범, 복잡한 제식 동작들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파이크 밀집대형을 운용하는 데에는 매우 복잡하고도 섬세한 제식동작을 요구했습니다. 테르시오에 속한 수천명의 파이크 병은 하나하나가 뭉쳐서 동일한 동작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길고 체계적인 훈련과정을 요구했습니다.
17세기 잉글랜드군 훈련교범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파이크병이 된 병사는 열을 맞추고 발 맞춰서 걷는 연습부터 했으며, 그 다음으로는 밀집대형을 형성하는 방법과 기병대를 저지하기 위해 파이크를 비스듬히 땅에 대는 동작, 찌르는 동작등을 연습했습니다.
또한 대포알이 날아오고 총알이 날아와 옆의 전우가 쓰러지더라도 자신의 위치를 끝까지 지킬 수 있는 높은 사기또한 요구했는데, 스위스 용병대의 경우 겁을 집어먹고 전장에서 이탈하거나 이탈하려는자는 가차없이 교수형에 처함으로써 강도높은 규율을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파이크 병들끼리 난전을 벌이는 경우는 별로 흔하지 않았는데, 난전이 벌어졌을때 파이크는 별로 쓸모가 없었으므로 파이크 병들은 보조무기로 칼도 휴대하고 있었습니다.
파이크병은 한 대열, 한 깃발 아래에 모여있을뿐 개개인이 통일된 복장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는데, 이들은 당시의 일반적인 군대형태인 돈을 벌기 위해 참전한 용병들로 모든 무기와 방어구를 자기 스스로 마련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파이크병의 주 무기인 파이크조차도 자기돈으로 마련해야 했습니다. 보통 부유하지 않은 신병들은 모리온 투구와 가죽으로 만든 코트가 방어구의 전부였는데, 그 때문에 테르시오 대형에서 신병은 보통 뒷열에 배치되었으며 죽은 적의 갑옷을 벗겨서 착용하거나 월급을 모아 갑옷을 장만한 고참병들은 앞열에 배치되었습니다.
파이크병은 일반적으로 흉갑(Breast plate)을 착용했는데, 흉갑은 가슴과 국부, 허벅지만을 보호할 수 있었지만 과거 15세기의 플레이트메일에 비해 매우 두꺼웠기 때문에
물론 근접한 거리에서 총알을 맞는다면 뚫렸지만 원거리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비교적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습니다.
1548년 취리히의 연대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란츠크네히트 용병대의 모습 16세기 말 영국 테르시오 대열의 모습, P는 장창병(Pikeman), H는 할버드(Halberdier)병, O는 총병, S는 부사관(Sergeant)을 의미하며 기수와 장교들(C,D,E)은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아르케부스 사수와 파이크 병이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을 보완하는 테르시오 전술은 향후 150여년간 유럽의 전장을 지배합니다. 하지만 파이크는 공격용 무기라기보다는 방어용 무기의 성격에 훨씬 가까운 무기였으며 파이크 병의 임무는 아르케부스 사수들이 재장전 하는동안 적 기병대의 기습로부터 보호하는 역활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테르시오 전술에서 주된 전투력은 총과 대포에서 나왔고 그때문에 초창기 총병 1과 파이크 병 2의 비율로 이루어졌던 테르시오 대형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총병의 비율이 높아져 1600년대에 이르면 총병과 파이크 병의 비율이 1:1 정도로 총병의 비율이 늘어나게 됩니다.
총이 발전하면 발전할 수록 파이크의 인기는 쇠퇴해 갈수밖에 없었는데, 17세기 중엽에 처음으로 총검이 개발되고 장전시간이 획기적으로 빠른 플린트록 머스킷이 개발되자 파이크는 매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파이크 밀집대열은 멀리서 날아오는 총탄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없었고, 야전용 포에 쉽게 무력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1700년에 이르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미 파이크를 도태시켜버리고 러시아와 스웨덴에서는 극히 일부부대에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영국의 경우 1703년 군사개혁때 파이크 병과를 소총수 병과로 편입시킴으로써 정식으로 없애게 됩니다.
1582년 7월 26일 아조레스 제도 근처에서 에스파냐군과 네덜란드,영국,프랑스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진 떼르쎄이라섬 전투(Batalla de la Isla Terceira)당시 에스파냐군 테르시오 전술을 묘사한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