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영웅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하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대중의메시아적 환상이 투여된 영웅,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권력의 필요에 의해 이데올로기 통제의 일환으로철저히 조립된 영웅.
역사 속에서 우리는 전자에 속하는 영웅을 수도 없이 많이 배워왔다. 이순신이그랬고, 일부 우익들에게는 박정희가 그 영웅의 롤모델이 될 것이다.
영웅은 다른 의미에서 존재론적으로 초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초인이되어야만 그들이 지니는 존재가 당위를 얻기 때문이다. 초인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서의 ‘영웅’은 실존할 수 없다. 다른한 편에서, 그런 초인에 대한 환상의 일환으로 우리는 그것의 인간적인 면모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 <칼의 노래>처럼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려낸소설, 혹은 박정희의 막걸리 ‘설화’처럼, 그것은 철저히 재구성된 것이고 이데올로기화 되어있다.
가령 – 이순신이 골방에서 여인네와 끈적한 성관계를 나누는 상상을우리는 전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초인이고 – 초인이기이전에 ‘인간’으로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칼의 노래>가 담아낸 장면은 그래서 충격적이라고 할수 있다.)
박정희를 영웅으로 보고자 하는 시각에서 – 그가 여대생과 함께 시바스리갈을마시다 총살당했다는 것은 지극히 실재적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실재로서의 인간이기 이전에‘초인’으로서 재구성된 박정희, 그리고 ‘초인’의 뒷모습으로서재구성된 ‘인간’ 박정희의 두 양면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기에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로서 – 박정희를 영웅으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괴로운 것이다.
영웅은 언제나 작업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노예해방의 영웅, 링컨이 엄청난 언론탄압과 더불어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한 것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들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링컨은 ‘노예해방’이라는 네 글자로 작업되었기 떄문이다. 또, ‘바보’로 알려진 노무현 정부에서 파업이 잔인하게 진압되었다는 사실들은노무현을 영웅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에겐 너무도 가혹한 사실일 것이다.
일련의 예시들에서 추출할 수 있는 것 – 대중은 영웅을, 곧 메시아를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에서, 그러한 요구들과 더불어 권력의 필요와 맞물리며 영웅은 ‘조립’되게 마련이다.
대중은 영웅을 통해 대리만족을 보상받고, 권력은 그러한 영웅의 미담을통해 대중의 욕구를 통제한다. 시시각각으로 쏟아지는 영웅물 – 스파이더맨, 배트맨, 어벤져스 등의 영화들은 사실상 미국 대중의 불만을 억제하고, ‘활개치는 사회악’에 대한 ‘영웅’들의 ‘응징’을 통해 그불만을 대리해소시키는 이데올로기 도구다.
천안함의 46 장병들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우리는 그들에 대한 추모를 들을 새도 없이, 46 장병들의 눈물겨운미담과 ‘자유를 위해 싸우다 스러져간 용사’라는 칭호까지붙여주며 그들을 영웅화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은 진정 자유를 위해 싸웠는가? 아니면, 한국에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국가의 의무에 충실한 시민이었는가? 그들의 비극적인 죽음은 영웅적 죽음인가, 비참한 죽음인가?
46장병의 추모인가, 아니면‘영웅’의 희생의 추모인가?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