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남겨준 숫자 4(四)에 대한 잘못된 강박관념
우리나라에서 쏘아 올린 아리랑 2호 위성이 궤도에 안착함으로서 우리도 엄연히 위성선진국의 대열에 들었다는 기사를
보다가 필자는 매우 놀라운 내용을 발견했다. 아리랑 위성의 호수를 헤아리는 숫자에 4를 빼고 5로 건너뛴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4가 死로 인식되기 때문이란다. 더구나 KT에서 쏘아 올리는 상업용 위성인 무궁화호도 4호를
건너뛰어 5호로 명명하여 쏘아 올린다고 하는데, 그것 역시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http://cfs10.blog.daum.net/upload_control/download.blog?fhandle=MDhSVk5AZnMxMC5ibG9nLmRhdW0ubmV0Oi9JTUFHRS8wLzE0LmpwZy50aHVtYg==&filename=14.jpg 어느 건물의 층표시, 4가 F로 표기되어 있다.
국가 보훈처에서 발표한 생활 속의 일제잔재 몰아내기에 발표된 글에 의하면 四가 死로 연결되어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 이후 일제시대 부터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4가 死로 인식된 것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농간에 의한 것이
틀림없다.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없어진 것이 역사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는 자신의 잃어버린 문화를 찾는데 있어서 매우 소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없어진 전통을 살려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현재의 우리 실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4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는 것
또한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잘못된 인식으로 비롯된 강박관념으로 인해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고층빌딩은 4층 대신에 F층을 사용하고 있으니 이로 인한 불편과 피해는 엄청나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4를 죽음의 숫자로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4를 무척이나 좋아하여 생활 속의 언어에 4가
들어가는 것이 엄청나게 많을 정도다. 우리의 언어문화에서 보면 유난히 3과 4가 들어간 언어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 있는 것은 3은 주로 신과 관련된 숫자에 쓰고, 4는 주로 인간의 일과 생활에 관련된 것에 썼다는
사실이다. 특히 신에 대한 것으로 3을 쓰는 것은 어느 민족에게나 공통된 문화현상으로 보이기 때문에 3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세계성을 가진다.
신과 관련된 것으로 3을 썼다는 것은 단군신화에 가장 먼저 보인다. 환웅이 천부인 세 개를 가지고 땅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라든지,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왔다고 하는 것, 삼칠일만에 단군왕검을 낳았다는 것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신에 대한 것이 모두 3과 관련된다는 것은 무당의 굿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굿의 단계가 신을 부르는 청신(請神),
신을 즐겁게 하는 오신(娛神), 신을 보내는 송신(送神)의 삼단계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신에 대한 것을 3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면 불교의 삼존불, 기독교의 성부·성자·성신 등의 것들과도 일치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을 나타내는데 있어서는 3이라는 숫자가 가장 적당하다고 여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이 4를 좋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밝혀낸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4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게 된다면 현재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새로운
문화현상들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4라는 숫자를 좋아하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쓴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가장 잘 파악하고 순응하는 그런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방향을 나타내는 동·서·남·북과 계절을 표시하는 봄·여름·가을·겨울 등이 모두 4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방향과 계절이야말로 인간의 삶에 끼치는 영향이 가장 큰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어디를 가든지 방향을 정해야 목적지에 갈 수 있으며, 사계절의 변화에 적응하지 않고는 생활 자체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4라는 숫자를 매우 좋아해서 그 숫자를 이용한 것들을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냈던 것이다. 생활 속에서 쓰이고 만들어진 4와 관련된 문화현상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 중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보도록 한다.
우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구려 무덤의 벽화네 나타나는 사신도(四神圖)는 동서남북의 방향과 관련이 있는 4라는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무덤 앞에 세우는 장명등도 사방을 밝힌다는 의미에서 구멍이 네 개로 되어 있다.
또한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중국의 唐나라와 함께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신라에 있었던 사절유택(四節遊宅)에서도
4를 사용하고 있다. 사절유택이란 신라 사람들이 계절마다 찾아가 놀던 집으로, 동야택(東野宅), 곡량택(谷良宅),
구지택(仇知宅), 가이택(加伊宅)이 그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왕조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한 왕조실록을 보면 하나만 만든 것이 아니라 네 질을 만들어서
정족산, 태백산, 오대산, 적상산의 네 곳에 보관한 사실에서도 우리 민족이 4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알 수 있다.
600년 전에 수도인 서울을 만들 때도 4라는 숫자가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북악산 ·남산· 인왕산 ·낙산
을 서울을 지키는 네 개의 중요한 산으로 보아 내사산(內四山)을 두었던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4를 좋아하는 이런 문화는 한약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는데, 인삼 백출 백복령 감초를 재료로 하여 기(氣)를 보하는
명약인 사군자탕(四君子湯)과 당귀 천궁 백작약 숙지황의 네 가지로 혈(血)을 보하는 명약인 사물탕(四物湯) 등에도
쓰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들을 일컬어 4대 성인이라 하고, 학문적으로도 일정한 경지
이상에 도달한 사람을 가리켜 4대가라 불렀다. 왜 3대 성인이나 5대 성인 혹은 3대가나 5대가라 하지 않고 4대가라
했는가? 이는 4라는 숫자가 인간의 삶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예로 든 것들 외에도 중국문화와 관련이 있는 문화현상들도 상당히 많은데,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말하는 사주(四柱)가 그렇고, 사람의 팔과 다리를 나타내는 사지(四肢)에도 역시 4가 들어간다.
또한 어디에도 친척이 없는 것을 나타내는 사고무친(四顧無親),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교과서인
사자소학(四字小學), 고사성어인 사자성어(四字成語), 아버지 쪽의 사친족(四親族), 공자께서 말씀하신 사단(四端),
선비가 숭배하는 사군자(四君子)인 매·난·국·죽, 통과의례인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말하는 사례(四禮) 등에도
모두 4가 들어간다.
이 외에도 생활 속에서 4가 들어가는 예를 부지기수로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중국과 우리나라 등이 자연의
순리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숫자인 4를 매우 좋아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http://cfs5.blog.daum.net/upload_control/download.blog?fhandle=MDhSVk5AZnM1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NzYuanBnLnRodW1i&filename=76.jpg 엘리베이터 안의 층 표시, 이것 역시 4층이 F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4가 死와 관련이 있는 숫자로 잘못 인식된 것일까? 그것은 왜인들의 교활하고
간악한 음모와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한 일본인들은 자신들에게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있는 것이면 무엇이나 없애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 민족이 지니고 있는 문화 중에서 자신의 것들보다 월등하다고
느끼는 것은 모조리 말살시켰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선 서울의 중심을 이루는 십자대로로 엄청나게 넓었던 세종로와 종로를 좁혀서 지금처럼 좁은 길로 만들었고,
손님을 오리까지 배웅하고 그곳에서 이별하는 미풍양속 중의 하나였던 오리정(五里亭)을 모두 부숴버리고 흔적을
남겨놓지 않았다.
이와 함께 우리말로 되어 있던 지명들은 전부 일본식 한자로 바꾸어서 표기를 하였는데, 지금 ‘풍납동’이라 불리는
지명은 일제강점기에 생긴 것으로 원래 이름은 ‘바람들이’였던 것을 일본식 한자어로 바꾸어서 그렇게 되었다.
왜인들이 저지른 만행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조차 번거로운 일이겠으나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4라는 숫자에 대한
강박관념을 심어 놓은 일은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그까짓 숫자가 뭐 그리 대단하랴 싶을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4가 死라는 의미로 연결됨으로서
불편한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살펴본다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건물의 층수가 1에서 3까지는
잘 가다가 갑자기 F로 바뀐다든지, 4가 들어간 숫자의 자동차번호는 피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모두 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불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와 관련된 생활 에피스드 중에 필자가 겪은 이야기를 하나 할까 한다. 어느 날 퇴근하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마침 유치원을 들어갔을까 말았을까 하는 정도의 남자 아이를 데리고 탄 어머니와 동행하게 되었다.
http://cfs10.blog.daum.net/upload_control/download.blog?fhandle=MDhSVk5AZnMxMC5ibG9nLmRhdW0ubmV0Oi9JTUFHRS8wLzE1LmpwZy50aHVtYg==&filename=15.jpg 4층이 아예 없는 상가 건물의 층 표시
그런데, 꼬마 어린이가 어머니에게 묻는 것이었다. “엄마, 딴 층은 다 있는데, 왜 4층은 없는 거야?,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죽는다는 뜻과 같아서 없앤 것이란다.’ 하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때
4는 죽음의 의미로 알 것이 틀림없다.
그만큼 언어문화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것을 잘 아는 왜인들이 악랄한 수법으로
바꿔놓은 4와 死의 관련성을 아직도 고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국가 기관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서 쏘아 올리는 위성에서까지 4호는 빠지고 없는 상태라고 하니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이 시대를 바라볼 때 과연 어떤 평가를 내릴지 두렵기까지 하다.
올해는 우리가 해방을 맞은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의 국토와 나라는 60년 전에 되찾았으나 잃어버렸던
우리 문화는 아직까지 되찾지 못한 것이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문화를 되찾는 일에 좀 더 힘을 기울여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쓴다.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은 필자가 찍은 것임)
*퍼온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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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소녀의 공포체험>에서 가져왔습니다. 원 출처는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