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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37301
    작성자 : 홍화
    추천 : 10
    조회수 : 897
    IP : 1.224.***.77
    댓글 : 3개
    등록시간 : 2012/10/06 21:48:17
    http://todayhumor.com/?panic_37301 모바일
    [자작]괜찮아,2


     
     카페에서 얼마 멀지 않은 좁은 계단과 골목길을 지나 익숙한 간판 앞에 선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방까지 들어가 자연스럽게 가디건을 벗었다.

     

     

    "내가 먼저 씻을게,준아."

     

    "그래,그럼."

     

     

    샤워기 앞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TV를 보고 있는 준이를 본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지만 이렇게 함께 한다.
     
    그리고 오늘로 이 모든것은 끝이 난다.

    오늘 하루만 지나면,난 준이를 잊을 수 있다.

     

     

     

     

     


    기계적인 몸놀림과 간간히 내뱉어지는 신음이 끝나고

    준이는 쓰러지듯 내 옆으로 자리를 옮긴다.

     

     

    "아,아까 샤워했는데도 덥다,나 씻고올게."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이불을 끌어올려 얼굴을 가렸다.

    준이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

    금방 씻고 나온 준이는 내 쪽으로는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한손으로는 생수병의 뚜껑을 연다.


     

    "준아."

     

    "응?"

     

    "준아,우리..다시 만나자."

     

    "...."

     

    준이는 당황한듯 담배를 재떨이에 급히 비벼댄다.
    그 와중에도 준이의 시선은 나를 향하지 않는다.

    방 한쪽 구석 모서리만을 쳐다본다.

     

    그래,예상했었어,준아.


     

    "나-아직은 누구 만날 생각없어."

     

     

    "그럼...오늘은 왜 만나자고 한거야?"

     

     

    "그냥."

     

     

    "...그냥?.."

     

    잠깐의 정적이 흐른다.

    뛰쳐나가고 싶다,하지만 참아야한다.

     

     

    "그런 얘기하지 말자,우리.자자.나 내일 아침에 일찍 들어가 봐야 해."

     

     

    "...그래."

     

    그는 갈증이라도 나는듯 생수를 벌컥 벌컥 마신다.

     

    준이는 침대에 누워 잠드는 그 순간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단 한번도 쳐다봐 주지 않았다.

     

     

    그래,

     

    여기까지야,준아.

     

     


    눈을 떠본다,하얀 찬장이 보인다.
     
    눈을 감는다,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몇십번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으..으음.."

     

     

    준이가 몸을 뒤척이며 신음소리를 낸다.

     

     

     "이제 깼어?늦겠다,준아."

     

     

     "으음..."

     

     

    "아..준아..말하기가 힘들지?"

     

     

    그의 입에 붙어있던 청테이프를 떼낸다.

     

     

    "이.이...이년이 미쳤나.이거 안풀어?"

     

     

    그는 광기에 어린 눈으로 날 바라본다.
    이제야 날 바라봐주는구나,준아.

     

     

    "7개월전에..내가 알아버렸잖아.준아.니가 나한테 술먹이고 동영상 찍은거.
    그리고 나 그거 친구한테 들었잖아,내 10년 친구한테."

     

     

    "그거 나 아니라고.그때도 얘기했잖아.씨발."

     

     

    "준아,여기 노트북에 우리 동영상 담아왔어.
    민혁이한테 부탁해서 받았어.내 손으로 차마 찾아볼 순 없더라."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는 준이를 위해 핑크색 노트북을 들어보여준다.

    이 안에는 동영상과 그와 내가 주고받은 메일,

    그리고 내 유서가 있다.

     

     

    "근데 웃긴건..그날 하루때문에 내 인생이 바뀌었단 거야.

    준아,난 몇번이고 니가 죽이고 싶었어.

    꿈속에서,상상에서 난 몇백번 몇천번도 널 죽였어.

    무슨 생각으로 니가 그런걸 찍고..올렸는진 모르겠지만..

    그걸 올리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될지 생각이나 해봤어?.."

     

     

    "아..그냥.그냥 올렸어.미안해,미안하다고.

     그러니까 이거 풀고 얘기하자."

     

     

     

    "준아,근데,근데도 내가 실행할 수 없었던건..

     그 다음달에 알게 된거야,애기가 생겼단걸."

     

     

    그의 눈이 커진다.

     

     

     

    "그래서 연락해봤어,너한테 사과도 받고 싶었고..

     애기 문제도 해야 했으니까.

     근데 넌 끝까지 동영상에 나오는 남자가 너냐고 물었지?"

     

     

    "..."

     

     

    "그치,준아?우린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아."

     

     

    "미안하다..근데.근데.우선 이것좀 풀어주라."

     

     

    "애기 문제도 넌 어차피 안 믿을거였어.

    난 몇달만에 관계를 너랑만 맺었고 니 애였지만,

    동영상도 인정하지 못한 니가...니 애기라는걸 인정해줬겠니?"

     

     

    "진짜...냐?"

     

     

    "어차피 믿던 안 믿던 중요한건 아냐.

    불행인지 다행인진 모르겠지만

    나.선천적으로 자궁이 약하대.그래서 금방 가버렸어.애기가.
    그래서 못 견디겠는거야,

    불면증에 우울증에..약이란 약은 다 먹으며 버텼지..

    근데 애기가 있을땐 널 죽일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애기가 없어지고 나니 더 널 죽여야 겠는거야.

    그것도 동영상으로 똑같이 남겨줄거야,준아."

     

     

    "사..살려줘..살려주라.."

     

     

    준이의 몸이 파르르 떨린다.

    정신보다 몸이 먼저 죽음을 예상하고 반응하는 걸까?

    뭐부터 시작해야할까...

    그래,우선 준이부터 끝내고 봐야겠다.

    쇼퍼백안에 준비해왔던 칼을 꺼내 들었다.

    아까 놓아둔 비디오 카메라가 잘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한다.

    빨간 불이 보인다.

     

     

     

    "너무 억울해 하진 마.준아.나도 곧 따라갈거야."

     

     

    "이..이러지 마...이러지말라고.씨발..씨발.."

     

     

    하얀 침대보가 노랗게 얼룩이 진다.

    준이가 내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였던 적이 있었나...

    곰곰히 생각해보지만 그런 적은 없다.

    항상 자신있어했고 당당했고 제 멋대로 굴었다.

    뭐,어쨌든 상관은 없다.

     

     

     

    "처음이라...잘 못해도 이해해줘-."

    "사..살려줘...아..아악!!!!!!!아악!!!!"

     

     

     

    하얀 침대보가 붉게 물든다.

    뭐,어쨌든 상관은 없다.

    준이의 배 위에는 검은 손잡이만 보이는 칼만이 있다.

    그 차가운 금속 사이로 꿀렁거리는 붉은 것들이

    이제는 끝이라는 걸 알려준다.

    시간은 상관없다.시간은 많고 준이는 죽어간다.

    꼼꼼히 방문과 창문을 테이프로 막아버리는 바람에

    손을 씻을수는 없다.

     

     

    "...ㅇ...으.."

     

     

    "준아,잘가."

     

     

    붉게 물들어버린 손으로 그의 뺨을 어루어 만졌다.

    준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속죄의 의미던 공포의 의미던 억울함의 의미던 상관없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에 책임을 져야 한다.

    무책임하게 나를 준이에게 맡긴 것,

    믿음을 저버리고 날 온 세상이 농락하도록 놔둔 것,

    한 생명을 무시하고 책임지지 못하고 보낸 것,

    나와 준이는 이 모든것을 책임져야 한다.

    가방에서 연탄불과 준이의 라이터를 손에 든다.

    그리고 빨간 불을 빛내는 카메라 앞에 선다.

     

     

    "여기까지,김준과 안서영이었습니다."

     

     

     

     

    싱긋이 웃어보인다.

    우리는 끝난게 아니에요,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것 뿐이지.

     

     


     

     

     

    손에 묻은 핏자국들이 옅어지고 지워진다.

    후회하는거니,안서영?

    준이를 죽여서?니가 죽어서?모든게 후회되서?


    복잡해지고 싶지 않다.

     

    준이의 옆에 누웠다.

     

    아까 물에 탄 수면제때문인지 눈앞이 흐려진다.

     

     

     

     

     

    그래,안서영..서영아..너는 지금...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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