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71년 3선에서 김대중을 힘겹게 따돌렸다. 3선 개헌과 선거개입을 통한 3선이었음에도 김대중을 누르는 것은 겨우 이루어졌다>
군인 처우개선을 위해 월급 40만원도 좋고 50만원도 좋지만 "개값"목숨부터 고쳐야 하지 않을까요..
==========================================================================================
1. 3선 이후 저항에 직면하는 박정희
박정희는 1971년 4월 27일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의 도전을 간신히 따돌리고 어렵게 3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박정희의 3선 첫해는 순탄치 않았다. 1971년은 1년 내내 빈민과 노동자에서부터 대학생은 물론이고 의사, 판사, 교수, 기자에 이르기까지 너나없이 데모에 나섰다. 유신의 긴 겨울이 오기 전, 1971년은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반짝 제 목소리를 또렷이 냈던 기간이었다. 이 때는 사법부마저 박정희에게 거세게 저항했다.
박정희는 1971년 7월 1일 7대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있었다. 대학가에서는 교련반대 데모가 일었고, 6월 16일에는 수련의들이 파업을 시작했고, 사법부에서는 획기적인 판결을 연이어 내놓았다. 6월 22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군인이 전투훈련 및 직무수행 중 전사, 순직, 공상으로 유족연금 등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제외한다”*는 국가배상법 제2조의 단서조항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의 원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으로, 군인의 희생으로 국고손실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를 배척했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위헌법률 심사권이 대법원에 있었는데, 대법원이 위헌법률심판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2. 대법원의 국가배상법 위헌 판결
1) 이중배상금지 조항의 배경 : 정부여당은 1967년 3월 3일 국가배상법을 전면 개정하면서 나치시대의 낡은 법이론인 특별권력관계**를 원용하여 군인 등의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제한한 바 있다. 사법사를 다룬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이를 베트남 파병 이후 발생한 사상자 문제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이 정설이다. 월남전에서 발생한 대규모 사상자에게 배상할 재원이 문제되자 배상청구 자체를 금지시켜 버린 것이다***. 박정희는 만약 국가배상법이 위헌 판결이 나면 국고손실이 엄청나게 되니 반드시 합헌판결이 나도록 법무부 장관이 책임지고 대법원판사를 설득(압력행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배영호 법무부장관은 이는 사법권의 독립을 해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답변하여 박정희의 노여움을 사 사표를 제출했다.
2) 박정희의 꼼수 : 박정희 정권은 대법원의 위헌 판결을 막기 위해 법원조직법을 개정하는 편법을 동원했다. 정부여당은 위헌 결정 정족수를 2/3출석과 출석과반수 찬성에서, 2/3출석과 출석2/3찬성으로 변경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1970년 7월 16일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켜버린 것이다. 위헌결정 정족수를 끌어올려서 대법원의 위헌판결이 나오기 어렵도록 하려는 것이다. 대법원이 어떻게 했느냐? 대법원은 1971년 6월 22일 국가배상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하면서, 위헌심사의 정족수를 제한한 법원조직법 역시 위헌으로 판결했다. 박정희에게 정면으로 저항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우리 헌정사상 획기적인 판결이라 찬양했고, <조선일보>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대외적으로 표방한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법원사>에서는 당시 국회가 행정부의 시녀처럼 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을 무조건 통과시키던 정치현실에 비추어 대법원의 결단과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 국가와 개인 사이의 첨예한 이해대립이 걸린 문제에서 사법부가 개인의 편에 서서 국가의 기본권 침해를 지적한 것은 왜 삼권분립이 필요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3) 참혹한 대가 : 그러나 그 대가는 매우 컸다. 박정희는 72년‘유신헌법’을 만들게 되는데, 대법원에서 위헌심사권을 빼앗아 헌법위원회****로 넘겼고, 위헌 의견을 낸 손동욱, 김치걸, 사광욱, 양회경, 방순원, 나항윤, 홍남표, 유재방, 한봉세 등 대법관 9명 전원을 모두 재임용에서 탈락시켜버렸다. 국가배상법 위헌판결 사건을 거치며 박정희가 사법부를 접수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가장 무지막지한 것은, 이미 위헌판결을 받았던 이중배상금지조항을 헌법에 명문규정을 박아넣은 것이다-_-;;;;;;***** 이 조항은 1987년 헌법을 개정할 때도 여전히 살아남아 현행 헌법에서 가장 부끄러운 조항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어떤 법률이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생각할 때 헌법재판소에 가져가 위헌 여부를 물어본다. 그런데 군인 등의 경우는 헌법에 떠억 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되어 있으니 제아무리 유능한 변호사가 수십 명 붙어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러니 군대 가서 죽으면 개값만도 못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3. 그 밖의 대법원의 저항판결
1) 신민당사 사건 : 대법원의 위헌결정이 있은 지 일주일이 안 된 6월 28일 서울형사지법은 신민당사에 들어가 국회의원 선거를 거부하라고 요구했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된 대학생들에 대하여 무죄판결을 내렸다. 재판장이었던 양헌 변호사의 회고에 의하면 이 사건은 경찰에서도 즉결감*******밖에 안 된다고 이야기했던 사건인데 검찰에서 무리하게 기소하다보니 당연히 무죄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무죄가 선고되자 검사가 “요씨” 라고 ‘두고 보자’라는 뜻의 일본말을 내뱉었다. 민복기 대법원장은 박정희가 격노해서 대법원장에서 직접 전화를 걸어 불만을 표시했다고 뒤에 말했다. 유신정권은 1973년 법관 재임용과정에서 양헌 부장판사는 물론이고 배석인 김성기, 장수길******** 두 판사까지 탈락시켜버렸다.
2) <다리>지 사건 : 검찰은 <다리>라는 잡지의 1970년 11월호에 실린 임중빈의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라는 글이 프랑스 5월혁명과 뉴레프트의 활동을 본받으라고 권유하여 국외공산계열과 북한을 고무ㆍ찬양했다며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그런데 <다리>지는 당시 김대중 후보를 적극 지지하던 김상현 의원이 운영하던 잡지였고, 필자 임중빈은 김대중 후보의 자서전을 대필하고 있었다. 임중빈의 구속은 김대중 후보 쪽이 기획한 자서전이 대통령선거에 맞춰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건을 맡은 목요상 판사*********에 따르면 <다리>지 사건 재판을 맡게 되자 중정 요원들이 비밀요정에 가자, 탤런트를 소개해주겠다는 등의 말로 유혹했다고 한다. 판결선고 전날에는 검사가 찾아와 지키고 있는 바람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런 미친ㅋㅋㅋㅋ), 목요상은 이웃의 친구 집으로 도망가 판결문을 작성했다. 다음날 법정에서 임중빈 등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방청석에 있던 문익환 목사와 김상현 의원이 “대한민국 만세”, “목요상 판사 만세”를 외쳐 “아이구, 이제 나는 죽었구나” 하고 눈앞이 캄캄해졌다고 회고했다. 검찰에서는 모 검사가 일주일 동안 잠복하면서 자신을 감시했고, 주위 사람들 다 조사하여 큰 형은 농협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7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법조계 안팎에는 정부가 곧 법원을 손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데, 이는 곧 사법파동으로 현실화되었다.
*이를 "이중배상금지 조항"이라고 부른다. 국가가 정해놓은 보상금(=이른바 개값)만 받을 수 있고 배상청구를 할 수가 없다. 즉, 군경이 직무수행 중 동료군경의 불법행위로 인해 발생한 손해에 대해 국가배상법에 의한 배상청구가 금지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정 독일에서 생겨나 나치시대까지 존속한 이론이다. 이는 國-民의 일반권력관계와는 달리 군인, 제소자, 공무원 등의 특별한 신분자는 국가에 대해 상하관계로서의 법률관계를 가지므로 시민권에 제한이 가해지게 된다는 이론이다. 오늘날 헌법학계에서는 부정하는 것이 통설이다.
***이런 설명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1960년대에 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의 희생자를 논외로 하고도 매년 평균 1400명 이상 사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라크전에서의 미군의 연평균 사망자 수가 800여 명인데, 우리는 전쟁을 치르지도 않으면서 믿을 수 없는 인명손실을 입고 있었다. 정부여당은 이런 인명손실을 줄일 방법을 찾는 대신, 군대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나 그 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제기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조항이 개혁대상인 점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지만, 4공화국 기간 동안 헌법위원회가 심사한 헌법재판은 단 한 건도 없다.
*****법률일 때 위헌판결을 받았던 법조항을, 개헌하면서 헌법조항으로 넣는다라..........<하면 되는> 군인이기에 가능한 발상이다.
******민주화 이후에 헌법으로 들어간 이중배상금지 헌법조항을 두고 위헌법률심판과 헌법소원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헌재는 "헌법조항은 헌법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형식논리를 들어서 본안재판조차 하지 않고 각하했다.
*******유치장에서 구류를 며칠 살고 나오거나, (요즘 돈으로)벌금 몇만원을 내는 정도의 벌을 받게 된다.
********장수길은 김&장의 "장"이다.
*********목요상은 계속 판사를 하다가 81년부터 국회의원이 되었다. 4선의원을 하였고 2000년에는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까지 역임하였다. 민한당-신한민주당-한나라당 소속이었다. 현재 헌정회(은퇴 국회의원 모임) 회장을 맡고 있다.
=================================================================================
사마광은 저서 <간원제명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뒷날 사람들이 장차 그 이름을 낱낱이 손가락질하며 논할 것이다. 누구는 충성했다, 누구는 속였다, 누구는 곧았다, 누구는 굽었다
(某也忠, 某也詐, 某也直, 某也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