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력제 일행은 간신히 입국이 허용되어 버마의 수도에 도착하지만 정작 국왕은 만나보지도 못하고 그저 망백이 파견한 한인을 통해 말을 주고 받았다. 명색이 명나라의 황제인데 굴욕 중의 굴욕이었을게다. 하지만 그 처지에 무엇을 바랬으랴. 그저 훗날을 위해 병사를 빌려달라는 요청과 함께 이곳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싶다는 것이 말만 전하며 승낙만을 눈빠지게 기다렸다. 하지만 이 요청에 망백은 확실한 대답대신 이런저런 말로 얼머부린다. 우선은 좀 더 사태를 관망하고 청의 눈치를 봐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 영력제 일행을 푸대접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수도의 외곽에 거처를 마련해주었으니 푸대접이라 해도 되려나. 아무튼, 망백은 수도 외곽에 대나무로 만든 성을 지어주고 그곳에 일행을 머물게 했다. 청에게 아직은 자신들이 남명조정을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잠시나마 외국에 거처를 얻게 되었다지만 영력제와 그 신하들, 황후와 비빈들은 비참한 생활을 겪게 된다. 먼저 무장해제 당한 것은 물론이요, 버마에서 내주는 식량으로 연명하는데 그 양마저 마땅치가 않아 굶주리는 경우가 허다했고 아무래도 청의 눈치를 봐야하는 버마였던만큼, 그들의 냉대와 감시 속에 살아야만 했다. 일거수 일투족이 경계받고 감시당하는 처지였으니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안봐도 훤하다.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남명조정은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민폐가 그 증거다. 원래 호화로운 생활과 편안함에 익숙해져있던 남명의 신하들이었다. 쌀밥먹던 입 더러 갑자기 꽁보리밥 먹으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에 적응치 못하던 그들은 점차 타락해가며 결국엔 버마의 부녀자들을 희롱하고 노략질을 일삼는다. 게다가 중화사상에 물들어 본래 버마를 남만(南蠻)이라 멸시해오던 중국인들이라 했다. 그 대단한 중화사상에 찌들어 우월의식의 잣대로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버마인들이 무슨 노리개 감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조용히 쥐죽은 듯 살아가도 시원찮을 판에 자신들이 지금 처해진 상황은 안중에도 없이 타국사람들에게 희롱이며 노략질이라니 이게 될 말인가 싶다. 소위 말하는 사대부, 귀족출신의 대신들의 도덕수준이 이 정도였으니 이젠 반청복명이고 나발이고 안중에도 없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여튼, 그 소식을 들은 망백은 크게 분노하며 그 주모자들을 넘길 것을 요구하며 그렇잖아도 삼엄했던 감시를 한층더 강화했다 한다.
그러던 중 1661년, 이 버마에서 정변이 일어난다. 망백을 죽이고 그의 동생 타룬이 왕위에 오른 것이 그 사건이었다. 영력제 일행으로서는 어안이벙벙했을 것이다. 아니, 이에 대해 마땅히 무슨 태도를 취하기가 애매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싶다. 아닌게 아니라 새 국왕으로 즉위한 타룬은 이 영력제 일행에게 선물을 요구했다. 한마디로 나의 국왕취임에 대해 너희의 입장은 무엇이냐고 물은 셈이다. 여기서 이것은 도리가 아니다하여 선물 주기를 거절하면 그냥 바로 청나라 행 직행티켓을 취득하는 것이고 그렇다고 또 선물을 주자니 그 처지에 줄 것도 없거니와 천륜이 아닌 짓에 축하를 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었다.
결국 선비짓을 하기로 한 영력제 일행은 니가 벌인 짓거리는 천륜에 어긋나는 행위이므로 우리는 치하하지도 않고 선물도 안 줄거다..라는 말을 전하니 이는 당연히 타룬의 분노를 사게 된다. 그때만은 융통성을 좀 보였으면 좋았으련만, 뭔 자신감으로 그런 모험을 했는지 의문이다.
어쨌든 타룬과 버마조정에서는 이 영력제 일행을 제거하기로 마음 먹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모두 죽여버리면 모양새가 좀 그러니 함정을 파기로 했는데 먼저 영력제에게 수도로 와서 좀 보자는 내용을 담은 서찰을 보냈다. 하지만 그 때 영력제도 나름 함정의 기운을 느꼈나보다. 그도 자신이 타룬에게 악감정을 샀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하지만 어찌하랴. 힘이 없으면 끌려다니는 법이다. 웬지모를 심상찮은 기운을 애써 무시하며 마길상의 권유대로 앞서 말했던 목천파를 데리고 갔는데 그 이유는 바로 앞글에서 확인하시어 짐작하시길 바란다. 영력제와 타룬은 비로소 수도에서 만났지만 그의 예상대로 역시 그것은 함정이었다. 회견도중 버마군이 불시에 들이닥쳐 영력제와 일행을 사로잡고 마길상은 아예 죽여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타룬은 영력제와 황후, 태자 등 황족 25명을 작은 집에 가두어 놓고 죽지만 않게 물과 음식만 제공했다. 이제 앞으로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기 위함이었다. 이쯤 되어선 영력제도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을 것이다. 영력제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다른 이들도 이미 복명의 꿈은 물 건너갔음을 알았나보다. 황후와 여러 후궁들은 모두 목매어 죽고 자결하는 신하들도 속출했다. 이제 영력제 곁에 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냥 영력조정이란 것 자체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목숨만 부지하며 살아가는 거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명(明)의 장수였으나 청(淸)에 투항한 오삼계
그리고 드디어 1662년, 청군이 비로소 운남성-버마 국경에 이르러 영력제를 내놓으라는 무력시위를 벌인다. 이때 청군의 장군은 오삼계로, 그는 본래 명나라 장수였으나 청에 투항한 인물이다. 오삼계는 즉각 서신을 보내 버마의 타룬에게 영력제를 요구했다. 버마입장에서도 이는 반가운 일이었을 것이다. 골칫거리였던 영력제도 제거하고 한편으론 중국의 새 주인이 된 청나라에게 잘 보일수도 있는 기회였을테니 말이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청나라처럼 운남-버마 국경에 주둔해있던 이정국의 남명군을 치자는 건의도 한다.
앞 글에서 쓴 이정국을 기억하실 것이다. 그는 영력제가 버마로 들어간 이후 행여나 영력제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군을 이끌고 버마로 쳐들어갈 생각으로 국경에 머물러 있었던 것인데 영력제가 그 꼴이 되도록 계속해서 국경에 있었던 걸 보면 소식을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오삼계는 흔쾌히 동의하고 버마군과 협동하여 이정국을 쳐 몰아내는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후 이정국은 얼마 후 영력제가 청으로 압송되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애통해하다가 죽었다고 하니 만고의 충신이라 하겠다.
이정국도 몰아냈겠다, 완전 외톨이가 된 영력제는 오래잖아 버마에 의해 오삼계에게로 넘겨지니 그때가 1662년 중순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역시 처형당하여 남명정권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사실, 영력제 사후로도 정무제 주본현이란 황족을 황제로 세워 항전을 계속했다 하지만 2년 만에 모두 진압되니 중국본토에서의 반청복명 전쟁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오직 남은 것은 대만의 정씨정권(당시는 정성공의 아들들)으로, 그 정신을 계승하여 그 항전을 이어나가게 된다.
이때가 청나라 연호로 강희 2년이고 이 청나라는 순치제의 뒤를 이은 강희제의 치세를 시작으로 번영을 누리게 된다.
다음부터는 정성공을 써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