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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37206
    작성자 : 숏다리코뿔소
    추천 : 31
    조회수 : 2004
    IP : 119.195.***.230
    댓글 : 10개
    등록시간 : 2012/10/05 09:29:36
    http://todayhumor.com/?panic_37206 모바일
    배경음) 당신을 닮아가요 -1부-




    정현이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는 길을 걷다가도, 버스 정류장 한편에 우두커니 서
    있던 순간에도 문득문득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했다. 말쑥한 정장 차림을 한 훤칠한 사내가 성큼성큼
    길을 걸을 때면 그는 조용히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는 했다. 그는 뚜벅거리는 구두굽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며 그 울림을 마음에 담았다. 말끔한 소매의 끝을 보며 그 깔끔한 모습을 기억의 단편에 엮어
    매달았다.

    때로는 지하철에 서서 옆칸의 젊은 여성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화사한 옷을 입은 것도 아니었고,
    뭇 남성들의 이목을 끌어들일 만큼 외모가 빼어난 것도 아니었다. 내가 그에게 그녀를 바라보는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그녀의 손이 너무 아름답다고 대답하였다.

    가늘고 작으면서 야무진 손, 거친 기색이 없는 살결의 매끄러움을 한눈에 알 수 있다고 했다.
    혹여 그녀의 손을 잡는다면 따스한 손바닥 표면의 온기와 촉촉한 느낌을 생생히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고 했다. 그녀의 깨끗한 손톱이 자신의 살갗을 간질이면 자신이 지을 웃음을 지금이라도 당장 지어
    보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사람을 미워한 적이 없다. 아이들의 천진함을 사랑했다. 사람들의 개성을 신기해했다.
    그는 청량한 목소리를 들을 때면 눈을 감았고, 좋은 향이 느껴질 때면 미소를 지었다.

    당신들은 모를 것이다. 당신이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던 죄로, 당신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정신이
    팔렸을 때, 당신이 창문 밖을 바라보며 창틀에 팔을 괴였을 때, 당신이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약속시간을
    헤아릴 때, 당신이 서 있을 때, 앉아 있을 때, 말할 때, 웃을 때, 울 때, 정현이는 서서히 당신들을
    닮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당신들은 모를 것이다.

    정현이는 사람들을 보고 관찰하며 잠시, 잠깐 사이에도 그들에게 반하고 동경했다.
    그리고 그는 애꿎게도 그 반한 모습을 닮아갔다. 그는 이런 현상을 스스로 표현하길 운명이라고 하였다.
    흔하고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표현이었다. 옆에서 오랜 시간 그를 바라본 나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살면서 단 하루도 같은 얼굴을 하고 살아간 일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표현할 때, 모조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곤 했다. 자신의 본연에 주어졌던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그는 어떤 작고 사소한 매력도 놓치는
    일이 없었다.

    그와 나는 오랜 시간을 친구로 지내왔다. 긴긴 복도 위 왁스 칠을 한 나무냄새가 자욱했던 그 옛날
    국민학교 시절부터, 그는 나를 알고 지냈다. 그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가 나에게 주목을 했던
    이유는 나의 말솜씨가 빼어나다는 것이었다. 아직 어린 시절이었지만 나는 주변을 설득하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이야기로는 나는 틀린 말을 하면서도 주저함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나의 당당함에 설득되고 나는 당당함에 억눌린 아이들을 간결하고 힘 있는 말솜씨로 현혹하곤 사실도
    거짓도 기정사실화했다고 한다. 나는 엉터리를 말할 때가 많았지만 나 자신이 엉터리가 되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는 거울로는 볼 수 없는 나의 모습을 꿰뚫어주는 그의 이야기가 좋았다. 나의 말솜씨를 닮아,
    나 자신도 너처럼 말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그의 말이 오묘하면서도 나를 투영하는 것 같았다.
    그가 말하길 그것은 원래 나의 화법이라고 내게 설명하려 애썼다. 그는 나의 말에는 부드러움이 있다고
    했다. 은은하고 아름다운 선을 그리듯 미려한 멋이 있고, 그 선을 따라 그릴 수 있다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너는 엄마, 아빠를 빼고 처음으로 닮고 싶었던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는 그를 나도 좋아했다. 아직 꼬맹이였을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이야기지만 지금에
    들어서는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찾는 사이가 되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아직 허물이란 것이 없었다. 화가 날 때면 소리를 쳤고, 분하면 울었다. 달리기를
    할 때면 응당 웃는 것이 옳은 것처럼 즐거워했고, 넘어지면 괴로워 모래 맨바닥에서도 먼지를 풍기며
    뒹굴어 괴로워했다. 좋아하면 매만지고, 싫어하면 금을 그으며 다가오기를 정확히 거부했다.

    우리는 모두 그 때엔 순수한 만큼 잔인하고, 당당하고, 직설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모두 정현이에게 독이 되어 돌아갔다.

    <에드워드 펄롱> 당시 세계적으로 흥행했던 <아놀드 슈왈츠 제네거>의 주연영화 <터미네이터 2>에서
    <존 코너> 역으로 출연했던 십 대들의 우상과도 같았던 헐리우드의 배우. <에드워드 펄롱>은 지금
    기억에도 이목구비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좌우의 길이가 비대칭인 세련되었던 암갈색의 생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짙은 쌍꺼풀이 새겨진 날렵하고 큰 눈은 비밀을 담고 있는 듯 깊어 보였고,
    우수에 젖은 듯 슬퍼 보였다. 투명한 것처럼 불그스름하니 뽀얀 피부와 날렵한 턱선,
    선홍의 다부진 입술. 나는 처음 그 배우를 여자아이라 착각까지 했었다.

    아마 비단 나만이 그런 오해를 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알고 있다.
    남자이면서도 양성의 미를 갖은 아름다운 배우.

    정현이는 자신이 그 <에드워드 펄롱>을 닮아 간다고 했다. 이 일은 그가 겉모습을 바꾸는 것을
    가까이서 처음 지켜봤던 경험이다. 그는 원래부터도 요목조목 잘생긴 아이였다. 더 옛날부터 무의식에
    남들의 좋은 점을 닮아 버렸을지 몰랐지만 내가 이미 그를 만났을 때는 충분히 예쁘장한 소년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눈은 크더라도 크고 동그랗게 옆이 슬쩍 처진 상이었고, 코는 큰 편이었지만
    어느 쪽이냐면 코끝이 조금 더 뭉뚝하게 보이는 편이었다. 머리칼은 순수하게 검고 원래부터 생머리였는지 윤이 나면서 길게 뻗었었는데, 언젠가부터 슬금슬금 암갈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한 번도 깎은 적이 없다는 단정하던 머리 모양은 시간이 지나며 특정 부분만이 자라기 시작했고
    곧 앞머리가 비대칭을 이루기 시작했다. 눈이 날렵해 질 무렵에는 그의 말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분명 그는 서서히 <에드워드 펄롱>이 <터미네이터>에 출연하던 그 모습처럼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색마저 변해가는 것을 느끼며 신기해하자, 그는 말했다.

    “이것도 그렇게 오래가진 않을 거야.”

    아이들의 스스럼없음은 여과되지 않은 관심이라는 형태가 되어 정현이에게 쏟아부어 졌다.
    아이들은 모습이 바뀌어 가는 그의 외모에는 알아차리는 기색이 없으면서도 그가 빼어나게 아름다워
    졌다는 것은 인지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정현이가 서서히 자연스럽게 바뀌어 갔었던 것이었는지 모르나
    아이들의 관심이라는 건 사실성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정현이에게는 비에 젖는 솜뭉치처럼 점점
    그 무게를 더해갔다.

    본래 사람이 좋았던 정현이는 쏟아지는 관심을 마음속부터 진심으로 즐겼다. 나는 그런 정현이에게
    자신이 타인에게 호감을 준다는 사실이 기분 좋은 현상이라 공감을 해주었다만 정현이는 다양한 매력들이
    자신의 주위를 감싸는 것에 더 흥미를 느낀다고 했다. 한 아이는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이 다부지게
    느껴져 자신도 그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한 아이는 스스럼없이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해 올 줄 아는
    솔직함을 가졌다고 그것을 본받으려 애쓰는 듯했다. 공을 잘 차는 친구의 민첩함을 동경하는가 하면,
    공부를 잘하는 아이의 집중력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개구장이 같은 아이의 용기에 놀라며, 세침데기 같은
    아이의 묵묵함을 아름답다고 여겼다.

    그에게 이런 주위 환경은 강렬한 자극에 벌거벗은 채로 노출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관심에 범벅이
    되어가던 정현이는 그 와중에도 사람들의 단편적이고 좋은 기억들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엮으며 그 수많은
    모습을 매일 닮아가고 매일 지워갔다. 오랜기간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나였음에도 그 모습 얼마큼이나
    변했지는 느끼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지난 후에 사진으로 비교했을 때나 확연하다는 것을 간신히 알게 될 뿐 평상시의 모습에서
    그의 변화를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부모님 정도였을 것이다. 정현이는 서서히 먹이 스미는
    한지처럼 천천히 온 바닥을 검게 물들이듯, 사람들의 모든 것을 자신 안에 담아갔다.

    과부하 같은 현상이었을까, 작은 그릇 안에 담으려고 했던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었을까.
    정현이는 정상적인 아이들과 비교하여 점점 체력이 약해져 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분명 정현이는 우리와 뜀박질을 할 때 한 뼘을 더 도약하는 것 같았고, 한발을 더 먼저 디디는 것 같았다.

    누구보다 빨랐고, 누구보다 달리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점점 주위에 몰려드는 아이들이 많아질수록
    주변의 아이들의 훌륭함에 가슴 벅차할수록 정현이는 야위어갔다. 학교를 마치고 공을 찰 때면 어느
    사이엔가 운동장 한켠에 정현이가 주저앉은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아도 그가 왜
    지쳐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지만,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내가 조금 더 가려가며 친구를 사귀는 것은 어떻겠냐고 묻자 정현이는 내게 반문을 해왔다.

    “그럼 어떤 친구만 사귀는 게 좋은 건데?”

    아무 대답도 돌려줄 수 없는 질문에 나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우리가 첫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정현이는 탈진을 했다. 말 그대로 과부하였다. 버스의 옆자리,
    방 배정, 활동 조원 배치, 아이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정현이를 자신의 옆자리로, 방으로,
    조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열을 올렸다.

    인기가 지친다는 감각을 나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정현이는 아마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광적인 집착은 정현이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을 전제로 나아갔다. 아이들은 정현이에게
    단 한마디만을 듣길 바랐다. “응.”하는 한 마디. 아이들은 번갈아가며 정현이에게 “응.”하는
    한 마디를 강요했다. “내 옆자리에.”, “우리들의 방에.”, “우리 조에.” 아마 벌써 오래전에 정량을
    초과했던 아이들의 관심이 정현이가 담을 수 있던 마음의 그릇 위로 흘러넘쳤던 것 같다.

    정현이는 쉬는 시간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던 중 바람에 힘을 잃은 종잇장마냥 쏟아져 내려갔다.
    책상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주변의 의자까지 함께 무너트렸다. 그때의 기묘한 정적을 기억한다.
    자신의 옆자리에 함께하길 바라던 정현이를 바라보던 정적. 모두가 얼어붙었던 순간.

    정현이를 업고 양호실로 향하는 동안 아이들의 모든 눈과 귀가 나를 바라보았다.
    몇몇 아이들이 뒤로 넘어지려는 정현이의 몸을 지탱하고 나의 뒤를 따랐다.
    쉬는 시간, 그 모습이 무슨 의미였던 것일까. 아이들, 선생님들까지 전부 복도로 쏟아져
    나오며 소란을 피웠다.

    정현이를 업고 발을 딛으니 나무바닥의 삐걱이는 소리가 묵직했다. 살이 빠져 가뿐하게 짊어질
    수 있을줄만 알았던 정현이의 몸은 나 혼자서 이고 가기엔 버거웠다. 그저 내 힘이 부족했을 뿐인
    시기였지만 난 정현이의 삶의 무게를 비로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쥐죽은 듯 고요한 양호실 침대 위에서 조용히 잠든 정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평생의 친구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몸을 마사지 해주면 좋아. 발 같은 곳을 꾹꾹 주물러줘.”

    양호선생님께서 정현이를 바라보던 내게 말씀하셨다. 나와 정현이를 번갈아보던
    선생님은 커다란 머그컵을 입에 가져가며, 커피를 홀짝이더니 물으셨다.

    “이쁘네, 여자친구야?”
    “아니요. 정현이 남잔데요.”

    나의 퉁명스런 대답에 선생님이 입가에서 호호 불던 컵을 떼어내며 눈을 동그랗게 뜨셨다.
    내가 <터미네이터>의 <에드워드 펄롱>을 보던 그 느낌과 같은 것이었을까. 정현이의 발을 주무르며
    선생님 올려다보자, 선생님은 신기하기라도 하다는 듯 정현이의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나도 정현이를 이렇게 가만히 관찰하듯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들의 모든 것을 담으려고 하는
    작은 몸, 얼핏 보면 정말 여자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통 희고 뽀얀 피부가 누구의 모습을 닮아간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여린 피부결에 손톱이라도 닿으면 상처가 날 듯 보드라와 보였다. 밑으로 쏟아져
    내린 머리칼들에 탄성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아마 그때는 내가 어려서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정현이는 여자아이들의 아름다움을 단순히 좋아하고
    관찰하던 것이 아니라, 여자 그 자체를 동경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마 정현이 스스로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정현이도 알아차릴 수 없었던, 다른 세상의 좀 더 먼곳의 이야기를 그 어린아이들이 어찌
    알 수 있었을까.

    “코코아 한잔 타줄까?”
    “선생님, 저 정현이 일어날 때까지 있어도 되요?”

    선생님은 잠시 얼굴을 찡그리더니 나와 눈눞이를 맞추려 몸을 수그리며 말했다.

    “그래도 수업은 받아야지. 담임선생님도 기다리셔.”

    나는 정현이의 발을 계속해서 주무르면서 선생님을 빤히 올려보았다. 선생님은 입술을 꾹다물며 지긋이
    나를 내려다 보시더니, 슬쩍슬쩍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선생님의 손에 묻은 은근한 로션향이 코를
    쓸며 지나쳤다.

    “그럼, 정현이 일어나면 바로 수업들으러 가야되?”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선생님은 내 머리를 한번 스삭거리며 한번 더 쓰다듬으시더니
    양호실 책상 앞 작은 의자를 향해 돌아서 걸어갔다. 한껏 열어 젖은 창문으로 초여름 나른한 바람이
    불어들었다. 바람에 몸을 부풀린 얇상한 커튼 사이로 바깥 운동장에 우뚝 솟은 은행나무가 보였다.
    멀리에서 바라보기에도 진한 녹색옷을 입은 은행나무. 은행나무가 사사사하며 바람을 반가워하고 있었다.

    “그럼 어떤 친구만 사귀는 게 좋은 건데?”라던 정현이의 말이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정현이는 어떤 기준를 가지고 자로 제듯 사람을 바라보는 아이가 아니었다. 정현이는 누구를 걸러낼
    수 있는 눈을 가진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목소리를 경청한 적이 없었다. 앞으로
    변함이 쉽지 않을 것만큼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발은 왜 주물러?”

    정현이가 멀쩡하다는 얼굴을 하고선, 말똥말똥한 눈을 뜨며 되게 궁금한 듯 물었다.

    “선생님이 이러면 좋데.”
    “무슨 선생님?”
    “양호선생님.”

    의자바퀴가 삐그덕하며 콘크리트 바닥을 비비더니 주르륵하며 뒤로 밀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양호선생님의 구두가 또각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워져 왔다.

    “정현이 일어났네?”
    “네.”
    “기억나?”

    정현이가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이더니 말이 없었다.

    “어지러웠어?”
    “아니요. 안 어지러웠어요.”
    “그럼?”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다리에 힘이 풀렸어?”

    양호선생님이 화사한 웃음을 머금었다. 학생이 쓰러졌는데 걱정도 안되나 싶었지만,
    이상하게 양호선생님의 웃음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모르겠어요. 기억안나요.”
    “부모님께 전화할까? 조퇴할래?”

    정현이는 애꿎은 나를 돌아보며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왜?”
    “같이 가주면 안돼?”

    담임선생님은 정현이의 터무니없는 요청을 순순히 허락하셨다. 선생님은 마치
    내가 희생을 강요당하기라도 하다는듯, 나를 타이르며 설득조로 말씀하셨다.

    “정현이네 부모님께서 일하시느라 바쁘셔. 니가 좀 도와줘. 이해하지? 응? 이해하지?”

    순 거짓말. 정현이네 집은 자주 찾아가봐서 잘 알고있었다. 정현이네 어머니는 항상 집에 계시는
    전업주부셨다. 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털듯이 끄덕이자 선생님은 내 어깨를 다정히
    감싸시며, 내 자리의 책가방을 내 가슴에 안겨주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정현이가 웃음을 참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현이가 웃음을 참는 모습을 보며 나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아 혼이 났다.

    아직 수업이 한창인 시간, 밖은 한산한 모습이었다. 사람도 몇 지나지 않는 통학로. 정현이가
    학교 앞 슈퍼에서 나오며 양손에 쥔 아이스크림 중 하나를 내게 건냈다. 무엇이 그리도 신이났는지
    한웅큼의 함박웃음도 함께 건내 받았다.

    “진짜 괜찮아?”
    “응, 아무렇지도 안아.”

    일단 물어는 보았지만, 정말 괜찮아보였다. 모순이었다. 내가 본 사람중 누구보다도 사람을 좋아하는
    아이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 자체가 힘이 든 일이라니. 베어문 아이스크림을 오물거리는 정현이의
    얼굴에는 때가 없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의 시끄러움이 싫고, 재미없음이 싫었다. 순수함을 가장한
    독선적임에 신물이나고, 조용함을 가장한 어둡고 재미없는 것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정현이는
    나와는 정 반대였다. 그런 정현이가 이해 안 가면서도 존경스러웠다.

    무엇보다 나는 이유없이 정현이 놈이 좋았다. 착해서, 잘생겨서가 아니라 정현이는 함께있을 때면
    동질감 같은 것을 갖을 수 있는 유일한 녀석이었다. 별 특별한 공통점도 없는 사이였지만, 이상하게도
    그랬다.

    “정현아.”
    “음?”

    아이스크림 종이를 체 다 벗기지도 못한 정현이가 손을 멈추고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떤 친구만 사귀는게 좋냐고 물어봤었잖아.”
    “어.”
    “우리는 우리끼리만 친구하자.”

    정현이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동안 나를 응시했다. 따뜻한 햇살이 아이스크림을 살살녹여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정현이는 검지에 슬쩍묻은 아이스크림을 낼름 핥아내더니 물었다.

    “그럼 뭐야? 다른 친구들은?”
    “그냥 아는 친구.”
    “그럼 우리는?”
    “진짜로 친구.”

    정현이는 웃었다. 정현이는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서야 들은 말이었지만,
    진짜 친구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도 지금에 이르러서도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정현이에게 진짜 친구를 운운할 생각은 없다. 다만 조금 아쉬운건 진짜 친구가 무엇인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정현이는 내가 이야기를 꺼낸 다음날부터 행동이 바뀌었다.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가워 진 것은 아니었다. 목석처럼 말없고 퉁명스러워 진 것도 아니었다.

    정현이는 자신의 외모가 바뀌어가는 것처럼 서서히 여유를 갖고 아이들과 거리를 벌려갔다.
    남들은 알 수 없는 벽이 내 눈에는 비추는 것 같았다. 정현이는 어느 선 이상 아이들에게 다가서는
    것을 멈췄다. 우수운 것은 정현이에게 그렇게 열광하던 아이들도 정현이의 이상한 벽 앞에서 서서히
    정현이와 거리를 벌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정현이는 어느 정도 이상의 것을 아이들에게 바라지 않았고,
    그런 정현이에게 아이들도 조금씩 기대감이란 것을 지워갔다. 나의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 줄은 몰랐지만
    정현이는 스스로에게 이상적인 인간관계를 쌓아가는 듯 보였다.

    확실히 그 영향이 있었는지 정현이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건강해져갔다. 사람 좋아하는 아이가 사람을
    멀리하며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 때론 슬퍼보였지만, 정현이는 항상 의연한 표정을 지었다. 정현이의
    스스럼없는 웃음을 볼 수있는 것은 오랜 시간동안 나를 제외하곤 어머니, 아버지 정도 였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수학여행 기념사진, 졸업사진, 입학기념사진, 또 다른 졸업사진, 또 다른 입학기념 사진.
    수 많은 사진 속의 사람은 나와 정현이 밖에 없었다. 그것이 외로워 보였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정현이는 친구가 나밖에 없다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유일함을 벗어나 나와 진정한
    친구라는 것을 즐거워해주었다. 그것이 나에게도 큰 유대감을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낯간지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우리는 우리이외의 아이들에게
    친구로서 가까워 질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어느덧 대학생이 된 나와 정현이는 같은 대학교 같은 과에 입학을 하였다. 함께 자라고 함께 생각을
    했었던 것이 이유였는지 우리는 비슷한 꿈을 그리고 비슷하게 행동했다. 나는 눈치체지 못했지만 가끔
    사람들은 우리가 형제나 쌍둥이인지를 물어왔다. 오랫동안 보아 온 정현이의 얼굴에 정말 얼핏 나의
    모습이 녹아있는 것을 나도 알 수가 있었다.

    정현이가 훨씬 잘생기고 훤칠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억울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래도 정현이가 나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때면 쑥수러우면서도 뿌듯한 기분이 일었다.

    그리고 대학교 1학년의 어느 여름밤이었다.

    “주호야.”

    자취방에 앉아 TV를 보던 정현이가 화면에 시선을 멈춘체 내 이름을 불렀다. 대충 말린 머리칼에 물기가
    서려 축 늘어졌다. 늘이진 머리칼 끝에 물방울이 떨어질 듯 말 듯 대롱거리며 매달려있었다. 시끄럽게
    떠드는 TV의 볼륨을 한칸 두칸씩 내리던 정현이는 리모콘의 전원 버튼을 확 누르며 TV를 꺼버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내 마음이 갑갑증을 일으켰다.

    “뭐야, 말을 해.”

    정현이가 고개를 휙 하고 돌리자 물방울이 얼굴에 튀었다. 입술로 튄 물방울이
    기분 나빠 손등으로 입술을 쓸어내는데 정현이가 대뜸 물었다.

    “술 마시러 갈래?”
    “술?”

    술을 마신다면 물론 우리 둘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우리는 보통은 같이 자취하고 있는 방에서 영화를
    보며 마시거나, 음악을 틀어놓고 수다를 떨며 마시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술을 마시러 어디론가 떠나자는
    말은 퍽이나 새로운 이야기였다.

    “마시러 가자고?”
    “어.”
    “어디로?”

    내가 물었다. 나는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것이 드물었기 때문에 솔직히 집 앞에도 어떤
    술집이 있는지조차 잘 몰랐다. 나도 나였지만 정현이도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가보면 알지?”

    정현이가 설래듯 들떠하는 표정에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나가서 술을 마시자는 것에는 이런 저런
    그럴듯한 이유들이 떠올랐지만, 정현이의 붕뜬 분위기를 설명할 방법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가서 마시자. 응?”

    내 허벅지를 툭툭하고 친 정현이는 벌떡 일어서더니 옷장 문을 열어 젖혔다. 성급하게 열리는 옷장문이
    선들한 바람을 만들며 내 머리칼을 간질었다. 정현이는 입고있는 티셔츠를 훌렁 벗어던지며 옷장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비닐을 꺼내들었다.

    얼마전 인터넷에서 구입하고 아직 포장조차 뜯지 않은 새 옷 냄새가 물씬 풍기는 티셔츠였다.

    “뭐야. 새옷까지 챙겨입고?”

    정현이는 대꾸도 안은체 옷매무새를 갖춰갔다. 원래부터 외모가 빼어난 놈이 굳이 외모를 가꾸며 거울을
    들여다 보는 모습이 가슴에 불을 지르는 듯 아니꼬운 기분이 들었다. 정현이는 자신을 바라보는 나의
    눈길을 슬쩍 보더니 옷장에서 몇몇 옷가지를 집어 땅바닥에 던졌다.

    “옷 입어. 나가게.”

    번쩍이는 자동차들 조명이 앞으로 뒤로 인도 옆켠 도로를 부산히 지나쳤다. 정현이가 긴다리를 뽐내듯
    큰폭으로 걸음을 하는 통에 나란히 걷는 것도 숨이 찰 지경이었다. 정현이의 기운찬 뒷모습에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적어도 오늘 마시게 될 술은 쓰디쓴 독주가 아닐 것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자취방 근처의 실내 포장마차로 들어서자, 어떤 여자가 들릴까 말까한 소리를 치며 우리에게 손짓을 했다.

    “어! 여기!”

    나는 생각없이 지나치려는데 정현이가 소리친 여자의 테이블에 당당히 걸어가 자릴 잡았다.
    정지은. 학교의 같은 과 2년 선배.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뭐해? 한잔 따라봐.”

    내 얼굴 앞에서 술병이 좌우로 흔들렸다. 정현이는 싱글벙글 입을 다무는 법을 잊은 놈처럼 헤실거렸다.
    누나는 우리보다 먼저 술집을 찾아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와는 관계없이 정현이와 벌써 술 약속을
    잡았던 것이었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 당황스러웠다. 모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랐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몰랐다.

    “누나 팔 빠진다.”

    지은 누나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농담을 했다. 아마 굳어있는 나의 분위기를 좀 풀어주고 싶어했던
    것 같지만, 그렇게 스위치 켜고 끄듯 한번에 전환될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정현이가 나 이외의 사람과 술 약속을 한 것도 그렇지만, 심지어 그 사람을 나에게 소개하자고 자리를
    마련했다. 이례적이고 색다르며, 충격적이었다.

    “애인답네.”
    “애인이요?”

    지은 누나 입에서 애인이란 소리가 나왔을 때, 정현이가 키킥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며
    지은 누나도 함께 웃음을 쳤다. 나는 바보처럼 눈만 굴리며 두사람의 심중을 헤아리려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야했다.

    “정현이가 자기랑 술 마시려면 애인한테 허락받아야 된다던데?”

    지은 누나가 애인,애인 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정현이를 돌아봤을 때 정현이는 마치 나를 놀리듯
    웃음만 짓고 있었다. 정현이는 내가 알고있는 이상 여자친구를 사귄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너, 니가 자기 애인이래. 얘 니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 잘하게 안생겼는데?”

    지은 누나가 정현이를 보며 동조를 구하자, 정현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그제서야 상황이 파악된 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지은 누나가 손에 쥐고 있던 술병을 빼앗아
    들며 지은 누나의 술잔에 가져가자 누나도 반기며 술잔을 들었다.

    “주호라고?”
    “네.”

    잔에서 술병을 띄어내기가 무섭게 누나는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깨끗하게 비어버린 잔을 내게 내밀며
    까딱까딱 흔들었다. 코 앞에서 흔들리는 술잔에서 진득한 소주향과 섞인 핸드크림의 달콤한 향이 풍겨왔다.
    오묘한 미소를 짓는 누나의 표정이 애사표정은 아니었다. 남자들 잡아 먹을 상. 그렇게 표현하면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현이가 너한테 허락 못 받으면, 자기랑 술 못 마신데. 애인단속 잘하네?”
    “구속받은 애인 코스플레네요. 저는 그런거 강요한적 없어요.”
    “그럼 나 앞으로 맨날 정현이 불러내도 되는거네? 나 지금 허락 맞은거야?”

    지은 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현이를 바라보았다. 정현이는 낄낄거리며 익살스런 웃음을 날렸다.
    입가에 술냄새가 비릿하게 올라선 정현이는 취기가 올랐는지 침을 튀기며 말해왔다.

    “지은 누나는 내가 엄마, 아빠, 너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닮고 싶어진 사람이야.”

    그가 닮고 싶다고 말하는 의미에 대해서 조금은 더 곱씹어 보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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