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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36928
    작성자 : 숏다리코뿔소
    추천 : 83
    조회수 : 4990
    IP : 119.195.***.230
    댓글 : 9개
    등록시간 : 2012/10/02 10:24:28
    http://todayhumor.com/?panic_36928 모바일
    배경음) 이 앞에는 허망이 기다립니다



    "이 앞으로 가면 무엇이 있나요?"

    내가 묻자 나를 바라보던 여인이 생각에 잠겼다. 하얗고 긴긴 네 갈레의 길
    앞으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그리고 뒤로 그 끝을 알 수 없이 길게 뻗어있는
    네 갈레의 길 정중앙에 서 있다.

    "저 앞에는 허망이 있죠."
    "막연하고 추상적이네요."
    "원래 그런 거에요."

    여인이 어깨를 으쓱 들췄다. 어깨에 떠밀린 여인의
    머리카락이 함께 들려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왼쪽에는요?"
    "미련이 기다리죠."

    너무 대충 대꾸를 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수 있었다.
    왼쪽 길 저 멀리에서 웃음을 짓고 서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하얗고 좁은 길 위로 따스한 초봄의 공기가 떠다닌다는 것을 냄새를 맡지 않아도,
    길을 지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꼭 한번은 걸어본 길처럼 익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오른쪽에는요?"
    "슬픔 밖에는 남아있지 않은 곳이죠."

    고민을 할 때면 엄지손톱을 번갈아 긁적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가 돌지 않고 멍하니 허공 속의 먼지만
    찾게 될 뿐이었다. 오른편에서 비나 내려야 느낄 수 있는 축축한 느낌의 찬바람이 한차례 숨펑하고 날아들었다.

    겨우 한차례의 바람에 이마빼기의 머리칼이 전부 왼쪽으로 쓸려 달라붙었다.
    꼴사나운 머리 모양이 눈에 선했지만 애써 매만질 필요는 없었다.

    "뒤에는요?"
    "후회가 남아있지요."

    여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니 어두컴컴한 길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하얀 발자국이 보였다.
    이곳은 춥지도, 덥지도, 따뜻하지도, 시원하지도 않았다. 편하거나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는 이 곳은 다만 평화롭다는
    느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마 지금 이 자리에 그저 남아 있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내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 답답스러운지 여인이 손가락을 세워 내 등을 툭툭 쳤다.

    "왜요?"

    내가 묻자 그녀는 또다시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인제 그만 정하시는 게 좋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요? 다들 비슷한가요?"
    "하도 천차만별이라 저도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감이 안 오네요."
    "그래도 좀 도움이 될 말은 없나요?"

    그녀가 한숨을 푹 뱉었다. 나 같은 놈을 상대하는 일에 그만 질려버렸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숨을 고르더니 주욱 말을 이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죠. 스스로 목을 매신 주제에 길 따위 아무렴 어때요?"

    그녀에게 대꾸할 말이 없었다. 스스로 정한 삶의 끝에 선 사람이 이제 와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왼쪽으로 몸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저 앞에 부모님은 웃고 계시는지 울고 계시는지 그저 흐릿한 존재감만 그 자리에 남아있는지도 몰랐다.

    "이봐요."

    그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발걸음을 세우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얼음이라도 박혀있는 듯 온기가 없어 보이고 자비심이 남아 있지 않은 듯 냉철해 보였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건 어때요?"
    "제가 어디에서 왔는데요?"
    "저 뒤에요."

    저 뒤로 후회가 남아있는 길 위에 발자국들이 나를 향해 줄을 서 있었다.

    "돌아가셔서 후회하세요."
    "무엇에 대해서요?"
    "목을 맨 자신에게 후회하세요. 그 미련스러움에 후회하시고, 그 한심함에 후회하세요."
    "그런 것에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녀의 말은 설득이라기엔 힘이 없었고, 부탁이라기엔 따뜻함이 없었다.

    "함부로 목을 매는 일은 의미가 있어서 하신 일이에요?"
    "저는 살고 싶지가 않은데요."
    "그럼 뒤로 돌아가서 그것도 후회하세요."
    "그럼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내가 묻자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이 우는 꼴이 우스워서."
    "죽었는데 울지도 못해요?"

    그녀의 눈에서 작은 물방울이 모이며 금방 떨어질 듯 위태위태하게 무게를 실어갔다.

    "죽고 우는 것보단 살아서 우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저 뒤에는 재미만으로 살아가기엔 너무 고독해요."

    고개를 돌려 왼쪽으로 뻗은 길을 바라보았다.
    이 길을 걷다가 중간에 쉬면서 잠시 잠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길 가운데에는 작은 자갈 조차 하나 없는 푹신하고 고운 모래들만이 부드럽게 밟힐 것 같았다.

    "당신이 어디로 가야 좋을지 물어봤잖아. 뒤로 돌아가라는데 왜 무시해?"

    그녀가 화를 내며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어깨를 움켜쥔 손의 파르르 떨려옴을 느꼈다.

    "괜히 갔다가 다시 이 자리에 서고 싶어지면 어떻게 해요."
    "그럼 그때는 내가 나머지 세 갈레 길 중에서 제일 좋은 길을 가르쳐 줄게요."
    "정말이요?"
    "그렇다고 괜히 금당 다시 갔다가 돌아오면 안 돼요. 그러면 죽어도 안 가르쳐 줄거에요."

    그녀가 히죽 하고 웃었다.

    "정말 제가 돌아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나머지 세 갈레 길보다는 죽어도 낫죠."
    "왜요?"
    "저는 당신이 살았으면 좋겠거든요."

    빙그레 웃는 그녀를 따라 나도 웃음을 보이고 싶었는데, 어설프고 멋쩍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뒤로 돌아서 갈 때에는 가슴이 끊어질 것 같을 때까지 뛰고 또 뛰셔야 해요."
    "왜 그렇게 뛰어가야 하는데요?"

    굳이 저 길고 긴 길을 뛰어 돌아가고 싶은 곳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원래 삶이라는 게 그런 거래요."
    "하, 누가 그런 소리해요."
    "뒤로 돌아가셨던 분들이요."
    "숨이 차면 어떻게 하라고는 안 가르쳐 줬어요?"
    "뛰어보면 알지도 모르죠."
    "저도 알 수 있게 될까요?"

    그녀가 뒤를 돌아 손 쭉 뻗어 후회가 남은 길 저 멀리를 가리켰다.

    "중간까지 같이 뛰어주면 안 돼요?"
    "안돼요."
    "왜요?"
    "그러면 당신을 응원할 사람이 없어지잖아요."
    "응원이요?"
    "당신이 숨이 차 괴롭지 않도록 이곳에서 빌고 있을게요."

    순 모순적이었다. 가슴이 끊어질 때까지 달리라고 말해놓고선,
    나를 향해 행렬을 이은 수많은 발자국들이 속삭이는 것 같다.

    '나만 따라오면 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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