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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military_36896
    작성자 : 해달꼬랑지
    추천 : 24
    조회수 : 1413
    IP : 163.152.***.39
    댓글 : 12개
    등록시간 : 2014/01/09 16:48:33
    http://todayhumor.com/?military_36896 모바일
    철책선과 불과 사단장님
    철책선 안쪽에는 불이 자주 났었다. 북한군인들이 종종 지르기도 하고, 낙뢰에 의해 자연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특히 북한 쪽은 풀이 자라는 계절에 시계 확보를 위해 종종 불을 지르기도 했다. 한 번은 북쪽에서 지른 불이 바람을 타고 그들 쪽으로 번져서 큰 불이 난 적도 있었다. 갑자기 커진 불에 쩔쩔 매던 북한군을 보고 온 OP 관측병이 낄낄거리며 얘기를 해 준 기억이 있다. 그쪽 소초가 홀랑 타버렸다는데 불을 지른 군인은 모르긴 몰라도 탄광이나 수용소로 보내졌을 것이다. 남쪽이나 북쪽이나 불조심은 중요한 것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는 철책선의 특성 상 한 번 불이 나면 자연적으로 꺼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철책선에 올라가 얼마 안 됐을 무렵, 처음 불이 난 때에는 우리 소초원들 모두 크게 당황해 허둥지둥거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불은 얼마 안 가 자연적으로 꺼졌고, 그렇게 다들 철책 안쪽의 화재에 시큰둥해져 갔다. 다만 땅에 묻혀있던 지뢰들의 신관이 불에 펑퍼버버버벙퍼벙 하고 터져 나가는 소리에 가뜩이나 짧은 취침시간이 방해받는 것만이 약간의 스트레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옆 소초 섹터에서 불이 났다. 다들 이제 그러려니 하고 상황실에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상급부대에 보고를 했고, 여느 때처럼 상급부대에서도 상황을 주시하라는 말만이 내려올 뿐이었다. 그러나 반나절이 지날 무렵, 불은 꺼지기는 커녕 양 옆의 소초 섹터까지 활활 태우며 커져만 갔다. 양 옆의 소초 섹터...... 즉 우리 소초 섹터까지도 불길이 뻗쳐 온 것이다. 다들 급격히 커진 불에 당황했지만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야간 근무가 시작되고 나서도 불은 기세를 키워만 갔다.

    그리고 그날 밤, 별님이 우리 옆 소초 섹터에 강림하셨다. 사단장님께서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셨는지 친히 왕림하신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그 분의 존안을 뵙지 못했지만, 가끔 만나 수다를 나눈 대대 통신병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사단장님은 대한민국의 장군답게 오시자마자 철책선 앞에 자리 잡고 앉아서 지긋이 불을 바라보셨다. 불에게도 군기가 있었다면 그 분의 눈빛을 받자마자 꺼졌어야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불은 군기가 빠져 있었다. 그 분의 뒤로 완전히 얼어버린 대대장님이 신교대의 신병 부럽지 않은 차렷자세를 유지하고 계셨다. 들은 바로는 사단장님은 대대장님에게 옆자리에 앉을 것을 권유하셨지만 대대장님은 감히 앉을 엄두를 내지 못하셨다고 한다.

    한참 불을 바라보시던 사단장님은 갑자기 '라면이 땡기네'라고 혼잣말을 하셨다. 사단장님의 일거수 일투족에 온 신경을 쏟고 계시던 대대장님은 즉시옆에 있던 통신병에게 가까운 소초로 가서 빛의 속도로 라면을 끓여 올 것을 주문하셨고, 통신병 역시 라면셔틀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소초를 향해 달려가서 자던 취사병을 깨워 라면을 끓이게 했다. 그리고 라면과 김치, 젓가락 등을 모두 챙겨 돌아왔다. 단지 사소한 문제라면 대대장님 몫의 라면이 없었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혼자 드시기 미안하셨던지 사단장님은 손수 대대장님에게 라면을 집어 주셨고, 대대장님은 황송하게도 그 라면을 받아 드셨다고 한다. 이 얘기를 전해 들은 나는 불경하게도 먹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새와 아기새... 그림이 떠올랐지만 조용히 내 가슴에 묻어두기로 했다.

    라면을 다 드신 사단장님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며 말씀하셨다.
    "대대장아, 내가 많이 겪어 봐서 아는데 이 정도면 내일 아침쯤 꺼질 거다."
    통신병은 '역시 장군 짬밥은 보기만 해도 아는구나'라고 생각하며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보고에 기대지 않고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주도면밀함, 개의치 않고 흙바닥에 앉으시는 담대함, 라면을 즐겨 드시는 소탈함 등 무엇 하나 장군으로서 빠질 수 없는 장점들을 갖추고 계신 사단장님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샘솟는 것을 느낀 것이다.


    한편 불은 다음날 우리 사단 전체 섹터를 태우고, 그 다음 날이 되어서야 간신히 사그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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