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그러면 왜 만주군하면 일본군이 떠오르는지 설명 드릴께요.
여러분 혹시 혼춘 참사 아시죠?
1920년대에 일본군이 마적단을 매수해서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학살했던 사건입니다.
사실 왜 마적단을 매수했냐면, 마적단이 일본 영사관을 습격했으니 그것을 일본인 보호라는 명분아래에 조선인과 독립군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위해서죠
그 이후로 전 만주군하면 일본군이 떠오른 겁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156265&mobile&categoryId=200000329
그 이전엔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분풀이로 간도 참변까지 저질렀는데,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169377&mobile&categoryId=200000329
네, 두 사건 모두 같은 년도에 일어났던 사건이죠.
간도가 어디냐면 지도를 보면 아시겠지만
압록강 바로 위쪽이라고 하시면 됩니다.
물론 간도 위에는 만주라는 지역이 있죠.
근현대사를 공부하시는 분들은 간도와 만주라는게 일본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곳인지 바로 알수있습니다.
박정희의 생년월일이 네이버 백과사전을 인용하자면 1917.11.14인데
만주신문에서는 요렇게 나와았습니다.
풀잎향기님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피로 쓴 반지(半紙)가 봉입(封入)된 등기로 송부되어 관계자(係員)를 깊이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자격 연령 16세 이상 19세이기 때문에 23세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만주신문> 1939.3.31. 7면)
쉽게 말하면 혈서를 두번썻거든요.
원래 날짜가 아리까리 한다고 신문에 있는 내용 다 짜르고 날짜만 이상하다고 하면 아마 그건 일본어를 못한거라고 할수있겠죠.
바로 1920년 이래로 일본군이 간도와 만주를 점령하던 시기에 입대를 한거죠.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