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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
도봉경찰서는 지난 17일 오후 19시 19분께 도봉구 방학3동의 한 가정집에 침입해 A(30) 씨와 그의 남편 B(34) 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로 최 모(35) 씨를 긴급체포했다. 최 씨는 가택을 무단 침입하여 홀로 집에 있던 A 씨를 안방에서 살해하였으며 곧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 B 씨마저 흉기로 5차례 이상 찔러 무참히 살해했다.
평소보다 퇴근이 조금 이른 날의 저녁이었다. 오늘 마지막 일정이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고 또 사무실에 들르기엔 조금 모호한 시간이라 현장에서 바로 퇴근했더니대략 한 시간가량은 일찍 집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반갑게 맞이해줄 아내를 기대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지만, 슈퍼라도 간 건지 안에선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다행히 열쇠는 가방 안에 항상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주섬주섬 꺼내서 열쇠 구멍에 밀어 넣고 키를 돌렸다. 잠금장치가 묵직하게 돌아가는 느낌이 손끝에 전해졌다. 황당한 건 그런데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몇 차례 문고리를 잡아당겨도 현관문은 꿈쩍을 하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으로 꽂혀있던 열쇠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더니 그제야 철옹성 같았던 문이 당겨졌다.
‘뭐야? 문도 안 잠그고 나간 거야?’
아내의 꼼꼼한 성격치곤 상당히 드문 실수였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보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묘한 냄새에 신경이 더 쓰였다. 뭔가 비릿하고 시큼한, 아니 시큼하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 같다. 하지만 익숙하지도 않고 달갑지도 않은 냄새인 것은 분명했다. 오늘은 대체 무슨 요리를 하려는 것일까.
아내는 연애 시절부터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것에 대한 경험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나와 결혼을 해서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주부가 되고 나니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을 요리로 풀기 시작했다.
아내의 요리는 이름부터 화려했다. 삼겹 깍둑 부대찌개 같은 건 그나마 평범한 축에 속했다. 나는 그저께 먹었던 까슈 어쩌고 하는 요리는 여러 번 이름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아내의 요리는 수시로 국경을 넘나들었기 때문에 요리의 이름과 맛에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 요리가 완성되기 전에 이 비릿한 향의 정체를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좁은 주방 그 어디에도 요리 재료로 의심될 만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거실의 창을 활짝 열어젖힌 뒤 상의를 벗어 소파에 내팽개치고 그 옆에 털썩 앉아 TV를 켰다. 아내를 기다리며 몇 차례 채널을 돌려봤지만, 흥미 있는 방송은 없었다. 멍하니 20분 정도는 앉아있었던 것 같은데 아내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팔을 뻗어 던져놨던 상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아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 초 후, 익숙한 벨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소리는 지금 내 귀가 아닌 핸드폰을 들고 나간 아내의 귀에 들려야 할 소리였다. 양미간을 좁히며 집중하니 소리의 근원지는 안방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정말 이상했다. 문도 안 잠그고 나간 것도 이상한데 핸드폰마저 안방에 두고 갔다니. 평소의 아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딱히 아내가 두고 간 핸드폰을 찾으러 갈 생각은 아니었지만 나는 별생각 없이 안방 문을 열었다. 아직 다 열리지 않은 문틈 사이로 방안의 비릿한 공기가 코끝으로 확 밀려들어 왔다. 구역질이 날 만큼 역겨운 냄새였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조금 전까진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드는 정도였다면 이젠 확신을 넘어선 불안감이 온몸을 엄습해왔다. 그리고 잠시 후 완전히 열린 문 뒤로는 그 불안감보다 더 끔찍하고 소름 돋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오면서 가장 공들여 꾸몄던 곳이 바로 안방이었다. 우리 부부는 하얀색 실크벽지를 고르면서 가구와 침구류, 커튼까지도 온통 하얀색으로 꾸몄다. 우리만의 화이트하우스였다. 그랬던 그곳이 붉은색 페인트라도 쏟아부은 듯 온통 새빨갛게 오염돼 있었다. 나는 공포감에 얼어붙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기괴스럽게 변한 방 안의 풍경을 경악스럽게 바라보았다.
“여보!!”
굳었던 몸이 움직여진 건 바닥에 쓰러져있는 아내가 눈에 들어오고 나서였다. 나는 비명에 가깝게 아내를 부르며 아내의 곁으로 달려갔다. 아내는 피의 웅덩이에 잠겨 붉게 물들었다.
“여보! 정신 좀 차려봐. 여보!!”
세차게흔들어 아내를 깨웠지만, 아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인중에 손가락을 대봐도 호흡이 느껴지질 않았다. 나는 밀려오는 무서운 상상을 애써 떨쳐내며 아내의 입에 공기를 불어 넣었다. 어디선가 배운 흉부 압박도 시도해봤다. 아내의 가슴 어귀를 강하게 누르는 순간 아내에게서 다량의 피가 뿜어져 내 얼굴로 튀어 올랐다.
나는 절규하듯 울부짖었지만 잠시 후엔 그나마도 할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내 옆구리에 날아와 박혔다. ‘헉’소리를 내지르기도 전에 쑤욱 뽑힌 그것은 내 배를 향해 다시 한 번 찔러 들어왔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더 같은 행위가 반복되었다. 온몸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나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의 욕설이 들려왔다.
“개 같은 놈이 감히 내 여자를 건드리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제 서방도몰라보는 년이나 쓰레기 같은 네 놈이나 다 뒈져야 해. 다 뒈져 없어져야 한다고!”
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꿈틀거리며 몸을 뒤집었다. 점차 흐려지는 눈앞엔 피 묻은모자를 눌러쓴 한 사내가 보였다. 사내는 나를 향해 뭐라고 계속 말하는 듯이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흡사 음소거 버튼을 눌러놓은 TV 화면 같았다. 눈앞의 사내가 아내의 전남편이라는 걸 간신히 떠올렸을 때쯤엔 소리 없는 화면마저 꺼지고 말았다.
온몸에서 느껴지던 강력한 통증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다. 통증이 가시는 건 다행이었지만 저 아픔이 완전히 사라지면 나도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아내의 손을 맞잡았다.
*
눈을 떴다. 축축하게 젖은 침대가 끈적였다. 멍한 머릿속에 무언가 떠오르려 했지만 지금 당장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수 분이 지났지만, 팔다리는 눈을 떴을 때 그 자리 그대로 놓여있다. 나는 그것들을 움직일 힘이 없다. 어쩜 움직이려고 생각할 힘조차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몸에 붙어있지만 내 것 같지가 않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눈을 떴다가 또 감는 것을 반복했다. 힘들이지 않고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게 두 눈뿐이었다. 눈앞엔 천장이 있었지만, 무늬도 색깔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른다. 천장 벽지가 격자무늬로 되어있다는 걸 인지할 때쯤 목구멍이 타들어 갈 정도의 갈증이 갑작스럽게 밀려왔다. 지금 당장 물을 마시지 못하면 온몸이 말라 비틀어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힘겹게 몸을 굴려 침대 밑으로 떨어뜨린 다음 기다시피 하여 냉장고로 향했다. 마침내 손에 쥔 물병의 뚜껑을 벌벌 떨리는 손으로 열고는 단숨에 목구멍으로 모두 털어 넣었다. 그 순간 전기에라도 감전된 듯한 싸한 느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려가며 모공의 털들을 바짝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제야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뭘 해야 하지.
아직도 머리는 조금 멍한 편이었지만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편한 자세로 냉장고에 등을 기댄 채 오늘의 할 일을 떠올렸다.
근데 어젠 뭘 했더라?
뒤척이며 허리를 잠깐 세웠다. 그런데 그때 옆구리 부근에서 시린 통증이 갑작스럽게 몰려왔다. 잠시 후엔 온몸이 뜨겁고 또 화끈거렸다. 눈앞이 흐려지더니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쓰러져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게 벌어진 그 끔찍한 기억이 폭발하듯 깨어났다. 나는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 미친 듯이 아내를 찾았다. 나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곳에 내 아내는 없었다. 핏자국도 없었고 미친 살인마도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입고 있던 셔츠를 찢어발기듯이 벗어 던졌다. 황급히 둘러본 내 몸 어디에도 칼에 맞은 상처는커녕 생채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속이 메스꺼웠다. 두개골을 드릴로 뚫는 것처럼 머리가 쑤셔왔다. 꿈이라고 하기엔너무나 생생한 기억, 하지만 현실이라고 하기엔 그것은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거실로 걸어 나와 소파에쓰러지듯 앉았다. 멍한 시선이 머문 곳엔 영국 국기가 그려져 있는 벽시계가 걸려 있었다. 처음으로 간 유럽 여행의 길거리 좌판에서 산 중고시계였다. 그 시계를 볼 때면 유럽을 자유롭게 누리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의 기억이 더 튀어나왔다. 신혼집으로 이사를 하던 날과 부주의한 이삿짐센터 직원 그리고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난 시계 잔해의 기억이었다.빗자루로 쓸어 담아 쓰레기통에 넣으면서 속상해했던 마음이 아직도 생생한데, 어째서 지금 저 시계가 여기 걸려 있는 것일까?
속은 여전히 울렁거렸고 머리는 계속 아려왔다. 다시 목이 말랐다. 낡고 작은 냉장고에서 물 한 병을 꺼냈다. 뚜껑을 돌려 물을 마시려는 순간 나는 흠칫했다. 이제 구매한 지 1년밖에 안 된 냉장고가이렇게 낡았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60인치 TV는 온데간데없고 그 반도 안 되는 구형 브라운관 TV가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나를 더욱더 당황하게 만든 것은 이 모든 게 낯설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다 내가 총각 때 쓰던 것들이었다. 어째서인지 한참 전에 버렸던 것들이 다시 다 이곳에 모였다. 그리고 ‘이곳’마저도 원래의 우리 집이 아닌 총각 때 살던 옛날 집이었다는 걸, 나는 곧 깨닫게 되었다.
*
나는 진짜 과거로 돌아오게 된 것일까. 정말 믿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것만이 지금의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데꼬박 3일의 시간이 걸렸다.
우선은 기뻤다. 지난밤의 끔찍했던 일들이 모두 없던 일이 되었음을 깨닫게 된 순간 난생처음으로 신께 감사드렸다. 한편으론 무서웠다. 아내와 함께한 달콤한 추억이 내 기억 속엔 이렇게 생생히 남아있는데 아내의 기억엔 나와 했던 모든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도 무서웠다. 불행과 행복이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처음 아내를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한가로이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을 때였다. 택배가 아니라면 딱히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는 우리 집 초인종이 오랜만에 울렸다. 나는 귀찮은 몸을 일으켜 살짝 인상을 쓰며 문을 열었는데 교회쟁이라거나 방문판매 따위의 것이라면 한바탕 쏘아줄 참이었다. 하지만 문 너머에 있던 건 교회쟁이도 방문판매도 아니었다. 그저 처음 보는 젊은 여자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떡을 두 손 모아 곱게 들고 서 있을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503호로 새로 이사 왔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곤 떡을 건네는 아내의 첫인상은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얼굴은 손바닥만큼이나 작았으면서 눈은 사슴같이 컸고 피부는 또 얼마나 하얀지 뽀얀 눈이라도 내려앉은 듯 밝게 빛났다. 가만히 있어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게 전형적인 웃는 상이었는데 바라보는 사람을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그런 얼굴이었다. 첫눈에 반했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나는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물론 수초 뒤 나타난 그녀의 남편(당시엔 남편이었고, 후엔 전남편이었으며 마지막엔 살인자였던 바로 그놈!) 덕에 최단시간의 짝사랑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녀의 남편, 그놈은 정말 그녀와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적인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고 봐도 역시나 어울리지 않았다. 옆으로 길게 째진 눈은 어딘가 음흉하고 야비해 보였고 웃고 있을 때조차 어딘가 화나 보이는 그의 인상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내와 그놈은 그래도 한 반년 동안은 꽤 다정했다. 물론 잠깐씩 스치듯 보며 느낀 것이기에 실상은 아닐 수도 있었다. 어쨌든 1년쯤 지났을 때부턴 확실히 겉보기부터 다정하지 않았다. 밤마다 부부싸움이라도 하는지 조용하게 넘어가는 날이 드물었다. 가끔 혼자 비상계단 앞에서 슬픈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녀의 모습을 볼 때면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날은 상당히 늦은 밤이었다.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아 복도 난간에 기대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있을 때였다.
“혹시 그거 저도 하나만 줄 수 있어요?”
그녀였다. 울기라도 했는지 두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담배 한 개비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고 곧 담배를 입에 물자 불을 붙여줬다.
“캑캑.”
한 모금도 제대로 빨기 전에 그녀는 연신 기침을 해댔다. 아무리 봐도 이번이 처음인 듯 서툴렀다.
“세상에 뜻대로 되는 게 정말 하나도 없네요. 이깟 담배 하나 피는 것조차도.”
나는 그 순간 그녀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 우린 새벽 시린 바람의 차가움도 모른 채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고 그날을 기점으로 우리는 상당히 가까워졌다.
그녀는 나를 많이 의지했다. 그녀는 결혼생활에 대해 큰 회의감을 토로했고 나는 그녀를 위로하며 그녀의 마음을 다독였다. 그러면서 그녀에 대한 연민의 마음은 언제부터인가 사랑의 감정으로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나 혼자만의 마음만은 아니었다.
얼마 뒤 아파트 주민 모두가 알 정도의 큰 소란이 있었다. 조용한 아파트에 경찰까지 출동했을 정도로 큰 소동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그녀는 이곳을 떠났다. 오래지 않아 이혼 소식도 들려왔다. 그때부터 나는 그녀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내 마음을 구애했다. 그리고 1년 후, 마침내 우리는 부부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죽음이라는 참혹한 결말로 끝나버리고 말았지만. 바로 악마 같은 그녀의 전남편, 바로 그놈 때문에.
*
아내를 되찾아야만 한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아내는 그놈과 이혼하고 그 뒤 우린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테지만 내겐 그때까지 기다릴 심적인 여유가 없다. 나는 다정하게 그놈의 손을 꼭 잡고 걷고 있는 아내를 볼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아내느라 얼굴에 경련이 올 지경이었다. 잡은 그 손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것인지 그녀는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하루빨리 그녀를 악마로부터 구해내야만 했다.
“여기서 또 뵙네요. 장 보러 오셨어요?”
“아, 안녕하세요. 저녁 찬거리를 좀 사려고요.”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아내와 그러니까 앞으로 내 아내가 될 그녀와 마주쳤다. 그녀가 무얼 좋아하는지, 낮 동안 어떤 걸 하고 어디를 가는지 모조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주 반가운 미소로 내게 화답했다.
“새우요리를 하시려나 봐요?”
나는 그녀의 카트에서 새우를 발견하곤 물었다.
“아 네. 까수엘라 한 번 해보려고요.”
“까슈… 뭐요?”
“아 까수엘라라고 스페인 요리에요.”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요리의 이름을 듣고 나니 예전에 먹었던 음식임이 생각났다. 우리가 결혼을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내게 해줬던 요리였다. 그때 선물로 받은 칠레산 모스카토를 곁들였는데 술을 잘하지 못했던 우리 둘은 첫 잔만으로 취해 그대로 뻗어버렸다. 그런 우리 둘의 모습이 우스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분명 우리 둘의 추억이었지만 이제는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기억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내가 아닌 그 악마를 위해 요리를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자 또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물론 얼굴에 그런 감정을 비치진 않았지만, 그녀는 내가 잠시 말이 없어지자 가벼운 목인사와 함께 카트를 밀며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마음만 먹으면 우연인 척 한 번 더 마주칠 수 있었지만, 오늘은 그만두기로 했다. 조급하다고 서두르는 건 옳지 못했다.
우리는 그 뒤로도 이곳저곳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물론 순전히 그녀의 처지에서만 우연이겠지만 말이다.
마트에서, 카페에서, 집 앞 산책로에서, 마주치는 횟수만큼 우리의 사이는 점점 더 가까워져 갔다. 때때로 정말 우연히 그녀 쪽에서 먼저 나를 발견할 때면 그녀 역시 내 이름을 반갑게 부르며 아는 척할 정도로 우리 사이는 돈독해졌다.
이제는 충분히 가까워졌으니 슬슬 두 번째 단계를 준비해야 했다. 그녀가 그놈을 증오하게 만들어 그녀를 그 악마 놈의 손아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게 만들어야 했다.
내가 겪었던 미래에서의 그녀의 이혼 사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잦은 욕설과 폭행, 또 주사까지. 하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놈의 외도였다. 어떻게든 참고 결혼생활을 영위하려 했던 그녀는 그놈의 외도사실을 알게 된 그 날 밤, 크게 싸운 후 이혼을 결심하였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1년 후쯤 벌어질 일이었지만 이번엔 내가 나서서 그 시점을 앞당겨줄 참이었다.
‘상대는 남편 회사의 여직원이었어요. 깜짝 놀래주려고 남편 회사 앞으로 몰래 찾아갔다가 둘의 모습을 보게 됐죠. 그렇게 다정한 남편의 모습은 처음이었어요. 남편이 내게 조금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워도 그게 그 사람만의 애정표현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는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그날에서야 알게 된 거죠.’
그 말을 하던 날 그녀의 애잔한 눈매가 아직 잊히질 않는다.
*
“너무한 거 아냐? 일요일까지 일을 시키는 회사가 어디 있어.”
“어쩔 수 없잖아. 지금이 제일 바쁜 시기니까. 이번 프로젝트만 잘 끝내면 또 한동안 널널 할거야. 우리 그때 여행이나 갈까?”
“여행 필요 없으니까 주말에 일 좀 시키지 말라 그래. 이러다 당신 쓰러지겠어.”
“그래그래 알았어. 아, 나 늦었다. 여보 나갔다 올게. 집 잘 보고 있어.”
마치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벽 너머의 얘기가 또렷이 들려온다. 오래된 아파트의 구조적 폐해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아침 일찍부터 벽 가까이에 귀를 붙이고 있던 나의 공이 더 컸지 싶다. 그런데 주말 출근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순순히 믿어버리고 마는 그녀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불쌍한 그녀를 어서 빨리 구원해야지. 나는 오늘이야말로 그놈의 외도현장을 잡을 좋을 기회임을 직감했다.
그놈이 낡은 쇳소리가 나는 현관문을 밀고 나서자 나는 서둘러 채비를 챙겨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라나섰다. 챙이 긴 모자에 플랫 선글라스, 캐논사의 미러리스 카메라가 채비의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준비는 충분했다.
나는 그놈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간격을 두고 미행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탐정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수많은 인파 속에 나를 숨겼기 때문에 발각의 염려는 없었지만, 누군가를 미행하는 건 처음이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뜻밖이었던 건 그놈의 목적지가 진짜 회사였다는 점이었다. 예상보다 더 치밀한 놈이었다. 아무리 회사 동료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지만 일요일 데이트 장소를 정말로 회사로 삼다니. 한편으론 일을 핑계로 눈치 안 보고 만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난 그놈의 회사 입구에서 그놈이 다시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만 했다.
마침내 그놈이 다시 나타난 건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무렵이었다. 예상대로 여자와 함께였다. 나는 멀리서 줌을 당겨 연속해서 셔터를 눌렀다. 물론 이 정도 가지곤 부족했다. 조금 더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그들은 대로변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섰다. 반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고 걷긴 했지만 누가 봐도 다정한 연인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그 모습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뭐야 어디 갔어?’
나는 신중을 기해 그들의 뒷모습이 꺾어지는 골목 안쪽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걸 확인한 뒤에 한 블록 차이를 두고 따라붙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시야에서 사라진 건 대략 10초 정도, 골목 사이로 몇몇 식당들이 보였지만 그 안에도 그들은 없었다. 짧은 골목이었기에 이미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있어 나는 빠르게 한 블록을 더 이동했다. 그리고 그제야 그들이 향한 곳을 알아챌 수 있었다.
‘행운모텔.’
골목을 빠져나가자 낡은 모텔이 하나 보였던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미 그 둘은 쥐덫에 걸린 생쥐나 다름없었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입구에서 담배 한 대를 태운 후 모텔 안으로 들어섰다.
카운터는 50대쯤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지키고 있었다. 낡은 모텔에 딱 어울릴만한 인상이었다. 나는 낮고 은밀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에 들어온 남녀는 몇 호실로 갔죠?”
“뉘슈?”
아줌마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아까 담배를 태우면서 이와 같은 질문을 해올 때의 대답을 미리 생각해놨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경찰입니다. 아무쪼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아줌마는 내려간 안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영장은 가져 왔고?”
아뿔싸,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미처 생각해 놓지 못했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아줌마는 강하게 쏘아붙였다.
“협조고 나발이고 수색영장 없으면 아무것도 못 건드니까 알아서 해.”
반쯤 열려있던 직사각형 모양의 유리창이 '쾅' 하고 닫혔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나는 닫힌 창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염병할, 우리 모텔에 살인자가 있어도 영장 없으면 안 된다니까!”
다시금 벌컥 열린 창문에서 아줌마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재수 없는 여편네. 나는 어쩔 수 없이 모텔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순 없다. 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카메라를 모텔 입구에 겨누었다.
후미진 곳에 자리 잡은 낡은 모텔인데도 참 많은 군상이 드나들었다. 등산복 차림의 아줌마 아저씨, 시커먼 차에서 내려 고상한 척하는 여자와 젠틀한 척하는 남자까지, 뻔한 목적을 가지고 뻔한 곳에 왔으면서 예의 차리는 가식적인 모습들이 우스웠다.
시간이 상당히 지났지만, 여전히 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더 나중에 들어갔던 커플들도 이미 거사를 치르고 하나둘 나오고 있는데 어째서 그들은 나오질 않고 있을까.
나는 혹시나 해서 다시 모텔로 들어갔다. 아줌마의 눈을 피해 카운터를 지나 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설마 했던 계단이 하나 보였다. 그리고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작은 뒷문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빌어먹게 치밀한 놈.
*
4월 4일 토요일, 일산 호수공원에서 단둘이 데이트함.
6월 9일 화요일, 회식이 끝나기도 전에 둘만 사라짐. 과연 어디로 갔을까.
7월 17일 목요일, 당신 이래도 계속 그 남자랑 살 거야?
나는 발신 번호를 감춘 채 그녀에게 문자와 사진을 보냈다.
그녀와 그놈의 다투는 소리가 밤마다 끊이질 않는다. 이혼이 머지않았음이 느껴졌다.
얼마 후, 그녀는 이곳을 떠났다.
*
이쯤이면 분명 이혼 소식이 들려와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그녀는 여전히 그 빌어먹을 놈과 부부다. 불안하다. 이곳을 떠난 뒤 그녀는 곧바로 이혼해야 했다. 나의 개입이 없어도 그녀 스스로가 그래야만 했다. 내가 한 것이라곤 그녀를 조금 더 빨리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그 시기를 앞당긴 그것밖에 없는데, 그녀가 이곳을 떠나는 것까진 분명 계획대로 진행됐는데 어째서 그녀는 여전히 그놈과 부부로 지내는 것일까.
가끔 안부를 묻는 나의 문자에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전화를 걸어도, 그게 내 전화든 공중전화든 간에 전혀 받지를 않는다. 우리의 미래가 변한 건 아닐까, 나는 겁이 났다. 이대로 기다리면 예정된 미래가 다가오는 건지, 변화를 바로잡기 위해 내가 무언가 행동해야 하는 건지, 대체 정답이 뭔지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이사 간 집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
“누구세요?”
초인종을 누르자 그녀가 누구냐고 물어왔다.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가 몹시도 반가웠다. 나는 나라고 밝히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일부러 목소리를 굵게 내며 택배가 왔다고 재치 있게 둘러댔다. 곧 문이 빼꼼히 열렸고 나는 얼른 문틈에 발을 집어넣어 다시 닫히는 걸 막은 후 집 안으로 들어섰다.
“뭐, 뭐에요!”
그녀의 가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난 우선 그녀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흥분한 그녀는 놀란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그녀가 연신 소리를 지르자 나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소리를 듣고 이웃집에서라도 올까 봐 겁이 났다. 일단 나는 급한 김에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일단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해요. 놀라셨겠지만 다 사정이 있어서 그랬어요. 저 누군지 아시겠어요?”
나는 모자와 마스크를 벗었고 그녀는 무척이나 놀란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일단 입 막은 건 풀어드릴게요. 대신 소리 지르지 마시고 일단 제 얘기를 좀 들어보세요. 아셨죠?”
“흐윽, 흐윽,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크게 떨렸다. 이런 식으로 우리 사이가 틀어졌으면 안 됐는데. 나는 지금이라도 바로잡기 위하여 그녀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천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원래 부부였습니다. 당신은 사실 지금 여기에 있으면 안 돼요. 그놈은 범죄자에게요. 당신과 나를 죽인 살인자란 말입니다.”
“아저씨 스토커잖아요. 진짜 저희한테 왜 그러시는 건데요. 대체 언제까지 쫓아다니실 건데요. 제발 저희 좀 살려주세요.”
그녀는 울먹였고 나는 흥분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다 당신을 위한 거였다고. 왜 말귀를 못 알아먹어!”
끓어오르는 분노로 인해 얼굴에 또 경련이 왔다. 그녀는 어째서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걸까. 어쩜 그놈에게 세뇌당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지독하게도 심하게 세뇌당해 진실을 보는 눈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조금 과격한 방법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녀를 구해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는 가져갔던 과도 한 자루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
그녀가 시뻘건 핏물을 연신 쏟아내고 있다. 그녀는 완전히 미쳐버렸다. 도저히 구해낼 방법이 없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다. 그놈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놈에게 복수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잠시 후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놈이 들어 올 것을 대비해 방문 뒤로 몸을 숨겼다.
마침내 그놈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잠깐 멈칫했던 그놈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쓰러져있는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나는 등 뒤에서 그놈의 옆구리를 향해 칼을 쑤셨다. 그놈이 날 쳐다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난 개의치 않고 칼을 뽑아 재차 쑤셨다. 다시 뽑고, 또다시 쑤시고. 나는 분이 풀릴 때까지 계속 반복했다.
결국, 그놈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칼을 방바닥에 던져 팽개치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개 같은 놈이 감히 내 여자를 건드리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아? 제 서방도 몰라보는 년이나 쓰레기 같은 네 놈이나 다 뒈져야 해. 다 뒈져 없어져야 한다고!”
*
나의 미래는 어디서부터 변하게 된 걸까.
변하긴 한 걸까.
이젠 뭐가 진실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
도봉경찰서는 지난 17일 오후 19시 19분께 도봉구 방학3동의 한 가정집에 침입해 A(30) 씨와 그의 남편 B(34) 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로 최 모(35) 씨를 긴급체포했다. 최 씨는 가택을 무단 침입하여 홀로 집에 있던 A 씨를 안방에서 살해하였으며 곧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 B 씨마저 흉기로 5차례 이상 찔러 무참히 살해했다.
최 씨는 자신이 원래 B 씨의 남편이고 A씨가 자신과 B 씨를 죽였기 때문에 그걸 막기 위해서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은 최씨가 B 씨를 오랫동안 스토킹한 스토커이며 망상 병 환자임이 의심된다며 정확한 조사를 위해 정신과 감정을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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